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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9:27-31
강설날짜 2021-10-24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마9:27-3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애와 은혜와 공평과 정직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바로 세워져 가야 세상 사람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인이 보아도 교회는 타락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힘든 가운데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죽음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오직 예수님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모범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타락함으로 사람들은 더는 예수님을 믿고자 하지 아니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지팡이 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성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삶으로 복음을 전하며 신앙생활 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믿으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비천과 풍부와 주림이라는 환경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전진하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며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구원을 찾지 아니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지 아니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고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삶이 예배가 되는 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이 배운 것은 목마름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배워야 할 가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의 목마름이 아니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목마름이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지난주 강설을 요약해 생각해 보면서 오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 강설은 “예수님께서 관리의 딸과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이었습니다. 회당장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공통점은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은 목숨이 문제였고, 혈루증 여인은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사람들의 생명과 병을 고치심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부정한 자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죽음과 병에서 벗어남을 주신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죄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죄로 물든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처럼 그리고 혈루증 여인처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이란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혈루증 여인에게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아니라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것을 더 잘 드러내 주는 것이 회당장의 딸입니다. 회당장의 딸은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 즉 슬픔을 애곡 해 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의학으로도 과학으로도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향해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비웃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구원함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러자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일어 났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도 부활시키심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처에서 생활하도록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회개하고 천국을 믿으면 됩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죽은 회당장의 딸을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두 맹인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두 맹인은 무엇이하고 하였습니까?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맹인을 통해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본분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권위와 시각장애인의 신앙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마태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차분하게 오늘 본문을 생각해 봄으로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합니다.

 

회당장과 혈루증 여인처럼 두 맹인은 간절했습니다. 고대 세계나 오늘날이나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면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쳤습니다. 저라도 시각장애인과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을 것입니다. 두 시각장애인은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생각처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기 오심으로 죄로부터의 해방과 유대인들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거룩하고 영화로운 백성으로 만들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부터 구원하여 주심으로 온누리에서 왕 같은 존재로 생활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며 선지자들의 외침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시각장애인도 유대인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두 시각장애인이 외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는 것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분봉왕 헤롯이라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사용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두 시각장애인은 큰 용기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 두 시각장애인에게는 지금이 기회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시각장애를 고칠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헤롯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용어는 민감했지만, 두 시각장애인에게 있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들은 간절했기에 진정한 마음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두 시각장애인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앞을 볼 수 없으니 메시야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외친 두 시각장애인의 소리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두 시각장애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2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음성을 듣고 집에 들어가셔서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였습니다. 이 질문에는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슬퍼서 고쳐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해서 질문한 것입니까?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두 시각장애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믿음에 따라 고쳐주실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질문에 답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진실하게 믿으면 앞으로 보지 못하던 현실에서 눈이 밝아져 새로운 세상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통해 믿음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자들은 많습니다. 정작 두 시각장애인처럼 믿음이 있는가?할 때 어떠합니까? 비참한 현실 아니겠습니까? 어제 인터넷 신문을 보니 악마와 같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 근친상간 시킨 안산 '악마목사' 징역 25년”이었습니다. “어린 신도들을 세뇌해 성범죄를 저지르고 노동 착취까지 일삼은 50대 목사”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두 시각장애인처럼 간절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참된 행위의 삶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두 시각장애인은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대로 고쳐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입니다. 이 질문은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치유 능력을 믿느냐고 한 질문이 복음서에서 유일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치유와 믿음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죄로 물든 세상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의 눈을 뜬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구원의 은총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신앙 생활함으로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시각장애인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하시는 것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소원을 알고 있으니 믿음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두 시각장애인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간절한 소망과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질문에 답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에서 이제는 “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확고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유대인보다 눈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오히려 더 믿음이 좋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아신 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29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시각장애인이 원하는 대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지시며 그들의 믿음이 눈먼 것을 치유하는 능력과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에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강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도 충분히 치유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인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위를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만지신 것은 치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세워 주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많고 적음에 즉 믿음의 양과 질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정도에 따라 치유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믿기 때문에 너희의 간청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두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0절을 보시면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입니다. 시각장애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두 시각장애인이 그토록 원하던 대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도록 하셨기 때문에 짐작으로만 생각하던 세상을 자신들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외친 말씀대로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치유함을 받은 시각장애인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소문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메시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소문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문이 더 확장되면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더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엄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다윗의 자손을 드러내며 다윗 왕처럼 왕노릇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해 줌으로 자신들이 세상의 왕처럼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보다 오히려 정치적 메사야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문이 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잘못된 소문이 퍼지면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방해가 될 것을 아시기에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시각장애인들은 나가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습관입니다. 31절을 보시면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둠만 보다가 어둠이 아닌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기에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를 되돌아보며 주님의 은혜를 늘 간구해야 하는 백성입니다. 언제나 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을 생각하며 날마다 구해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마지막 때까지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는가를 두 시각장애인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였습니다. 그 누구도 시각장애인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질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할 수 있기에 질문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도록 한다는 것은 최초의 사건이며 전대미문의 일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였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었습니다. 죄로부터 긍휼히 여겨 주시며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메시야이기에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후 2000년이 지났지만 참되게 믿음이 있는 자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꼭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처럼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믿는 것은 구원의 소망이 없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보내어 주심으로 죄로 저주받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단지 시각장애인의 눈만 뜨게 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단순히 육체의 눈을 뜨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영적인 눈을 뜨도록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만 뜨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까지 눈을 떠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의 말처럼 우리는 영적인 눈이 뜰 수 있도록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줄 믿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구원의 능력과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영적인 눈을 뜬 공동체입니다. 주님을 메시야로 믿으며 고백하는 성도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수 있도록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를 믿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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