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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5:1-10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마5:1-10)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종교 시대처럼 타락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참된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많은 신자가 있지만, 알곡과 가라지가 있습니다. 참된 교회인 알곡을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인도하시며 추수하는 일꾼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기업과 같다고 하지만, 참된 교회는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삶이 예배가 되는 생활을 합니다. 참된 교회는 열매를 맺는 성도입니다. 알곡과 같은 교회는 예배당이 멋이 없어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생활하며 추수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이 믿는 바와 성경의 관계입니다. 성경과 다른 것이나 상반되는 것을 믿는 것을 이단이라고 합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믿고 있는가?입니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성경을 사모하며 사귐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믿기에 행복한 성도입니다.

 

오늘은 산상수훈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심으로 진리의 자유를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산상수훈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들의 의를 쌓으므로 복을 얻으려 하는 자들의 자존심을 내려놓도록 합니다. 세상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의를 옷 입혀 주시고자 하십니다. 산상수훈은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지팡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가르치시기 위해 무대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무대는 산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회당보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산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해안가도 좋지 않습니까? 이 또한 좋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유추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에서도 그렇지만, 마15:29절에서는 사람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습니다. 17:1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산에 오르셨습니다. 24:3절에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갈멜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28:16절에서 부활하신 후 산에서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산이 반복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이기에 산에서 전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독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1절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읽고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행동들에 상당한 무게감과 장엄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후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설교하려면 서서 해야 하는데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문화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설교할 때 서서 하지만, 유대인들은 앉아서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앉으신다는 것은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시겠다는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을 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과 함께 산에 오른 것인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고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환호를 받는 인기 절정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앉으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어수선한 행동들은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상태와 그 연유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과 진리요 생명이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육신이 피곤할 수 있는 가운데 있었지만,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산에 오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앉으신 것을 자세히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행동을 하셨습니까? 2절을 보시면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을 온전하게 알 수 있도록 입을 열어 전하셨습니다. 성도의 삶은 불신자의 삶과 달라야 하는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산상수훈은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생활하고 있는 가운데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헌법과 같은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성품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백성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중요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마치 재산을 모두 탕진하여 구걸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재산을 탕진함으로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탕자의 비유)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성품과 복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이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게만 의지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자입니다. 4절을 보시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죄의 무게와 영적 파산을 깨닫고 회개하며 탄식으로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애통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애통은 창자를 끊는 듯한 아픔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동반한 슬픔입니다. 죄 많은 처지를 슬퍼하며 자신의 영적 가난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위로하여 주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이웃을 긍휼히 여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함으로 애통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생활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며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5절을 보시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은 허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섬김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온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성도입니다. 온유한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통치를 받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은 기업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땅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여 주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받으며 생활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는 지팡이 교회입니다. 극치에 이르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지팡이 교회는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영적 가난이 무엇인지, 그들이 애통하는 원인지 무엇인지 하나님의 백성이 받은 위로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기업으로 받은 천국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것이 6절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가지지 못한 것이 바로 의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성도가 되면 의는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서 내어놓을 의가 없어서 가난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울 수가 없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탱할 수 없었고 살길이 막막하였던 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성도 즉 우리입니다. 의가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늘 애통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는 성도 아니겠습니까? 애통하고 슬퍼하며 우리는 항상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옳다고 여기시는 것을 너무나 사모하고 갈망하는 우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입니까? 주리고 목마름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가장 강력한 욕구 아니겠습니까? 배고프면 먹으면 됩니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까? 주리고 목마른 것은 단순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닙니다. 죽기 직전의 강력한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으로 간구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성도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복이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은 7절을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는 복음을 통해 이웃에게 사랑으로 긍휼을 표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긍휼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기서 청결이라는 것을 불교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니는 마음입니다. 불교에서 생각하는 해탈의 경지 그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한 신자는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믿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하나의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신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귐이 있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사귐의 공동체로 예수님께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신경을 사용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 하며 신앙생활 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를 받습니다. 마음이 청결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귐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리며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의 청결이 행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있다는 것은 행복한 백성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의 방식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백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됩니다. 9절을 보시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화평케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화평을 이 세상 가운데 나누는 생활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신 근거로 무엇을 하려고 해야 합니까? 화평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화평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보지 못하는 분이시므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도록 함으로 화평을 주셨습니다.

 

화평을 알고 있는 신자들은 복음을 통해 전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화평을 전하는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합니다. 화평한 삶을 살면 핍박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화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귐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이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생활하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신앙 고백할 수 있도록 외적인 준비를 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내적인 변화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십니다. 이것을 믿고 있는 지팡이 교회는 기도 해야 합니다.

 

이번에 생각할 것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팔복 가운데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박해를 받는데 왜 복입니까? 믿음을 지키려고 불이익을 당하며 박해를 받는 자는 복되다고 하십니다. 의를 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의로운 상태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팡이 교회는 의로운 성도입니다. 선한 행위로 인해 주어진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의를 행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멸망의 길 즉 지옥의 길로 가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과 화평케 하고자 애쓰는 자를 사랑하고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자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워하고 이용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은 거룩함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시민권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세상은 손해 보면서 긍휼을 베풀며 사랑하고 더불어 화평을 이루며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는 사명을 다하며 심령이 가난한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물질이 풍요하고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질은 좋아지는 것 같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이것이 마귀가 인도하는 유혹의 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자신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좋아합니다. 당시 초기 기독교도 세상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삶이 달랐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핍박받는 자들과 함께 나도 예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삶과 기독교의 삶은 다릅니다. 세상의 의와 하나님의 의는 다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진정한 의 즉 선한 생활을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같은 신앙고백을 하려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탕자가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고난의 길이기에 빌립보 교회와 디모데에게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며 신앙의 길을 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증거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감당하며 신앙의 길을 가는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박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이유로 박해를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 즉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이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특성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박해를 당해도 행복하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알기에 박해를 당해도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자신이 받는 박해의 깊이를 알았습니다. 박해받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박해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참 성도입니다. 하늘의 상급 즉 구원으로 인해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마음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행복한 사람의 공동체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화평하게 하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복이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성도에게 '너희는 복 받은 자'라고 선포하셨지만, 우리는 전혀 '복받은 자' 같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복받은 자'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부자되고, 건강하고, 사업에 성공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들과는 전혀 다르게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 받는 이런 것들을 복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실제로 스스로 그런 모습, 다시 말하면 자기 부인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다 가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런 자들이 복 받은 자라고 하시면서,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고 우리를 그 자리로 이끌어 가시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성도는 죽을 때까지 바로 그 목표를 향해 갑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적 자아가 점점 부인되고, 자존심이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기 원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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