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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요4:1-26

교회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요4:1-26)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하여 참된 신자는 예배의 중요성을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하지 못하는 현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코로나로 힘들어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참되게 믿으며 주일에 예배합니다. 모든 날이 주의 날이지만,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구별된 날입니다. 구별하여 주일에 예배하는 공예배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에 따라 마땅히 드려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모든 성도가 주일에 예배당으로 모입니다. 신자들은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이기 때문에 모입니다. 풍성한 은혜를 누림으로 주의 길을 주님과 동행하며 가기를 소망합니다.

 

과연 야곱은 사생결단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이기었습니까? 나무 기둥 붙잡고 뿌리까지 뽑는 심정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기도를 들어주어야 합니까? 야곱이 열심히 기도했으니 나도 그렇게 기도하면 만사형통입니까? 이런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분들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닙니다.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분들은 타 종교와 무엇이 다릅니까? 지성이면 감천이 아닙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참된 교회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믿는 교회입니다. 창세기32장에서 야곱의 기도는 사람 중심의 열심에 대해서 증거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불안과 불신을 깨우치며 하나님을 참되게 믿으며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문맥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고집을 꺾으십니다.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언제나 성경을 볼 때 사람 중심으로 성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환도뼈를 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꺾으심으로 야곱은 평생 기억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생활하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야곱은 하나님을 이기어 보려고 해지만 결과는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야곱은 눈치가 빨라 에서가 품고 있는 마음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재물과 아내와 자식까지 에서에게 보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도 보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절을 보시면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계속해서 2절을 보시면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마하나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군대로 자신을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연약한 마음입니다. 연약한 야곱은 12절에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야곱은 22절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토록 라헬을 얻기 위해 노력한 야곱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은 죽어도 소용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비정한 야곱입니다.

 

홀로 남은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25절을 보시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다. 그때야 야곱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12: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울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안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내려놓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생긴 뒤에 비로소 야곱은 가족의 대표자로서 당당하게 형에게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치심으로 야곱에게 내면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질문해 보겠습니다. 야곱은 사생결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 이기었습니까?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야곱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인간의 고집이었습니다. 이 고집이 꺾인 후에 야곱은 비로소 기도했습니다. 호세아 12:4절을 보시면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울면서 간절하게 간구한 모습을 겨루어 이긴 것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씨름한 이후에 야곱은 진정한 기도를 했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기도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분들은 세상의 것을 이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일천번제를 하면 소원성취하여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천번제는 솔로몬이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수능 때가 되면 다니엘 기도회와 수능 기도회를 합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며 삶으로 영광을 올려 드릴 때 행복합니다.

 

야곱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본 지팡이 교회는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기를 소망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누림으로 주의 길을 주님과 동행하며 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통해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역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려면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면 3일이 걸리고 그렇지 않고 우회를 하면 6일 정도 걸리었습니다. 같은 민족인데도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습니다. 왜 경멸하게 된 것인지 아십니까?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자신들이 정복한 주위 나라의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강제 이주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후 세월이 지나면서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인들은 순수 혈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순수 혈통을 지키지 아니한 사마리아인들을 “개 같은 놈”이라고 부르며 멸시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포로기가 끝나고 포로로 있던 사람들이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치욕이겠습니까? 그로 인해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나가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어느 동네에 도착하셨습니까? 5절을 보시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사마리아 지역 중 수가라 하는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가성 여인 또는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수가라는 동네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갈릴리로 가기 위해 들러야 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과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마리아 특히 수가라는 동네는 중요한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던 중 피곤하여 잠시 쉼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6절을 보시면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입니다. 예수님께서 휴식하고자 하는 장소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시간은 “여섯시”였습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계산하면 6시간을 더하면 됩니다. 그러면 정오 12시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휴식하고 계셨을 때 누가 우물에 왔습니까? 7절을 보시면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야곱의 우물에 왔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과 대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릇을 사용하여 마시면 됩니다. 아니면 누구에게 부탁하시면 됩니까?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디에 가 있었습니까? 8절을 보시면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제자들은 먹을 것을 준비하러 동네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혼자 물을 마시면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황당했습니다. 자신들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유대인 남자가 물을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가성 여인은 어떻게 이야기했습니까? 9절을 보시면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호의를 구하는 것은 실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예수님의 요구를 들은 여인이 놀라움으로 반문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수가성 여인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하십니다. 1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입니다. 이 내용을 알기 위해 우리는 차분하게 11절부터 26절을 보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황당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여인은 11절에 ‘주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당시에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 부르던 칭호입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적인 이미지에서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주님이 아닙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물리적인 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선생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질문 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떻게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까?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주둥이에 세 개의 막대기로 벌려 놓은 가죽 두레박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염소 가죽으로 만든 밧줄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릇은 항상 우물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물에서 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마시면 되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사용하면 정결법에 걸리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하는 그릇을 유대인은 결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물길을 만한 그릇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여인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12절을 보시면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앗수르에 의해 비록 혼혈이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신앙을 지키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야곱이 우리에게 준 우물은 사람과 가축들까지 다 마실 수 있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생수는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13절과 14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여인은 물리적인 물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의미하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샘물이 있습니다. 그 샘물은 성령이십니다. 요7:37-39절을 보시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입니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영적으로 샘솟는 물을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순종하지 않으므로 갈급함을 느낍니다. 예수님께 순종함으로 갈급함을 느끼지 아니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은 15절에서 어떻게 답하였습니까?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리적인 물로 생각하며 더 이상 물을 길으러 오지 않도록 물을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에 대한 것을 모르는 여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려고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께서는 16절부터 18절에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이 죽음으로 여섯 번째 사람과 결혼하여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음행한 연고 없이 헤어졌으면 재혼은 불가능합니다. 추측하면 남편과 사별 또는 남편의 음행으로 재혼한 여인이었습니다. 하여튼 사마리아 여인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19절을 보시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선생님에서 이제는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0절을 보시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찾아 왔던 이유 즉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여인이 이 산이라고 한 것은 축복의 산으로 그리심 산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더 못한 취급을 당하다보니 그리심 산에서 제사를 해 왔습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해 왔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어느 장소에서 하는 것이 진짜 예배인지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 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에 있어서 구약 시대처럼 성전이 있는 지정된 장소에서 의식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장소와 의식의 관념을 떠나 새로운 형태로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확신하는 가운데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늘 감사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질문했던 것을 답하여 주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한 제사는 정통이지만, 그리심산에서 한 제사는 가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아는 것을 예배하는 자’로 지적한 것은 당시 그들이 참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보다 완전한 계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구세주는 유대인이셨으며,유대인은 복음의

첫 전달자였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즉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각기 주장하는 예배 처소와 관계없이 전적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예배해야 할 ‘때’ 가 도래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최선을 다해서 예배해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닙니다. 23절과 24절을 보시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영과 진리”는 무엇입니까? 먼저 영이 무엇인가?입니다. 사람의 의라도 다 떨어진 누더기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히 나아가 경배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에만 의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령 안에서 나의 영이 주께 경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으로” 경배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진리 안에서”입니다. 진리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요17: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성경 속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우리를 연결해 주심으로 성도는 예배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배하도록 하십니다.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감사함만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가 예배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하나님과 연결하여 주십니다. 예배자는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겸손히 자복하는 심령으로 또한 참되고 진실한 심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25절에서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인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믿으며 지금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감사함으로 타종교와 다른 예배를 하며 경배합니다. 또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심이 합당하심을 믿으며 예배합니다. 이것은 전적인 나의 공로가 아닌 것을 믿으며 예배합니다.

 

구속받은 참된 신자는 주위의 시선에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싶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본다는 것은 좋은 용어가 아닙니다. 예배를 보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배하러 모인 것이지 구경꾼으로 보기 위해 예배당에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지 사람 중심이 아닙니다. 마치 쇼 오락 프로그램처럼 하는 것은 성경을 모르는 자입니다. 지극정성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출세와 부귀영화를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가 0명일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소규모 교회도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종교 소모임 자제 및 생활 속 거리 두기 지침”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일 예배는 중요합니다. 공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는 한국인만의 전통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을 따라 예배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이는 교회라고 합니다. 모이는 교회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런 후 흩어지는 교회를 통해 삶의 방식으로 지상명령을 감당하며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공예배를 기억하며 지키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하다가 코로나 19에 감염되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고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자 열 체크를 해야 합니다. 또한, 손 소독과 마스크 착용을 해야 합니다. 생활 속 거리 두기를 하며 신자는 위생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해서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사이버 교회에만 관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이버 교회가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참된 일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회는 바른길을 가야 합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가운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예배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은혜와 위로 그리고 구원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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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교회란 전은덕 고전1:18-25 2023-04-23 77
287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오늘날 교회 전은덕 고전1:10-17 2023-04-16 82
286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 전은덕 고전15:12-19 2023-04-09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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