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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2022.02.02 16:36

성경이 말하는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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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1:17-34

성경이 말하는 성찬(고전11:17-34)

교회의 표지 중 성찬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찬은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주셨습니다. 막14:22절을 보시면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리고 마26:26절에서도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라는 말씀에서 두 구절이 ‘그들이 먹을 때에’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송별의 “주의 만찬”의 시간을 통하여 제자들과 함께 하는 송별의 식사 자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만찬 중에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시고 떼어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심으로 제자들을 섬기고 세워 주시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워가는 제자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성도로 세워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만찬의 식탁을 준비하시고 봉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눅22:27절에서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교회는 하나요 서로가 섬기는 나라임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성찬 예식을 통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우리를 먹이시는 것을 생각하면 어떠한 신앙의 생활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찬에 어떠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성찬을 초대 교회는 매 주일에 해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영적인 은혜를 주심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우리도 동참하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삶의 의미는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그것을 성찬을 통해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로 생활하도록 하신 것을 감사하며 성찬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새로운 생명 가운데 생활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매 주일 성찬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로부터 영의 양식을 먹고 사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삶에서 교회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떡과 포도주에 참여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성찬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예배당에서 하나 된 공동체로 식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애찬이라고 합니다. 애찬은 그냥 식사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서로 연합하여 생활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성찬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강한 질책을 했습니다. 17절을 보시면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경솔히 생각하고 행함으로 죄를 범했다고 책망하십니다. 교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책망하십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고린도 교회는 나뉘어 있었습니다. 18-19절을 보시면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린도 교회의 현실은 분쟁과 파당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파당은 차별과 파벌입니다. 분쟁하는 자들은 차별과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22절을 보시면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업신 여겼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섬기심으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생각하지 못한 고린도 교회는 섬김보다 자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교회는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이 사라진 결과는 파당을 만들어 교회 내에서 차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책망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말씀을 읽으며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고린도 교회 성도라면 어떠한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왜 파당이 있었던 것입니까? 파당을 좋아하는 자들은 “옳다 인정함을 받기를 원하는 자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섬기러 오신 주님의 참뜻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을 알기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망은 성도를 바로 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할 때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설교와 성례 즉 세례와 성찬 그리고 기도 즉 귄징입니다.

 

파당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20-21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입니다. 초대 교회는 주일마다 주의 만찬을 했습니다. 주의 만찬이라는 의미는 각자 예배당에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식사했습니다. 식사하며 예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최후의 만찬 즉 성찬을 같이 했습니다. 주의 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과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며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신경을 사용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주의 만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교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파당을 만들었습니다. 파당이 생기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찬을 애찬 즉 식사와 함께했습니다. 식사 중에 성찬을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교회당에서 식사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는 각자 집에서 준비해 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나눔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린도 교회는 한 몸 공동체가 이상하게 변질하여 갔습니다. 누구는 일찍 오고, 누구는 늦게 온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자는 일찍 올 수 있었지만, 하인으로 생활하는 자들은 일을 마무리해야 하므로 늦게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늦게 온 신자들은 애찬의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는 것은 주의 만찬의 참뜻이 아니라고 책망했습니다.

 

파당을 만든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22절에서 어떻게 책망하십니까?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는 행동이 주님의 교회를 더럽히며 업신여기고 있으니 돌이키라입니다. 가난한 자들도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 된 교회를 지키라’입니다. 너희는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고 책망하며 고린도 교회가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책망하시며 권면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주 안에서 교회는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분열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서로 섬기며 열등감과 굴욕감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집사를 세웠습니다. 빈궁한 자가 없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분이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현실을 책망하시면서 성찬을 통해 주의 만찬이 무엇인지 설명하십니다. 23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성찬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제자들에게서 들은 것을 고린도 교회에 전합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의도에 맞게 전할 때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찬이 바르게 거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계십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전에도 전한 것 같습니다. 주의 만찬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성찬은 교회 생활의 기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1장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를 위해 순서를 정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시던 밤에 식사하시며 떡을 가지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24절을 보시면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번역본에는 ”찢긴 몸“이 없지만, 일부 사본에는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삽입하는 것이 문맥상 더 좋다고 봅니다. 문맥상 고려하여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찢긴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켜 기억해야 합니다. 왜 기억해야 합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25절에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입니다. 떡을 다 먹은 후에 잔에 담긴 포도주를 가지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여 주신 성찬은 ‘새 언약’으로 이제는 동물의 희생 피로 맺는 언약이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영원히 단번에 이루어진 새 언약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성찬에 참여할 때 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함으로 교회는 서로 섬김의 공동체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음을 기억해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죽음이 선포되며 주의 재림 때까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를 인도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이 성찬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27-29절에서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받는 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시하는 것이며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교제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하며 신앙을 점검해 보며 결단하라고 하십니다. 돌이키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30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하심으로 성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함이 영적 병약함과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연약함과 죽음까지도 초래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31절과 32절에서 고린도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3개의 동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살피다, 판단하다, 정죄하다“입니다. 고린도 교회 일부가 병약해지고 죽는 일까지 발생한 것은 그들이 다른 범죄와 더불어 성찬식을 훼손한 데 대한 주님의 심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이나 처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세상과 더불어 영원히 처벌받지 않도록 주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을 주님께서 징계하심으로 회개하도록 하시며 믿음에 충실케 하여 최후의 심판에서 처벌받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비참한 최후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33절과 34절 말씀을 사용해 고린도 교회의 올바른 성찬식이 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33-34절을 보시면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이라고 함으로 성찬에 대하여 결론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함으로 애정 어린 표현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찬에 대한 권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애정 어린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같이 식사하기 위해 서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가난한 분들이 예배당에 도착하기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자신의 집에서 미리 식사하고 와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성찬을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기 위해 모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바울은 마지막 말씀을 통해 성찬의 목적을 분명히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이 말한 성찬의 목적을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성찬은 믿음을 성장시키며 강화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와 나눔이 있는 것으로 주님과 우리는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자아 성찰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고해성사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살피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며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서로 한 몸 공동체라는 것을 인식하며 서로 섬길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심각한 죄를 범했다고 생각할 경우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며 성찬에 참여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은혜에 참여하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살피며 한 몸 공동체인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1장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위해 순서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축사를 한 후 떡을 가지고 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았기 때문에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다리도록 했습니다. 부자와 종이라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고자 하는 신자들은 서로 기다리며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찬에 어떻게 참여해야 합니까? 장례식장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셔야 합니다. 식사할 때 즐겁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찬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야 합니다. 물론 진정한 감사의 마음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할 수도 있지만, 그 눈물도 기쁨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기쁨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서 통치하시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영적인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주의 만찬입니다. 성찬은 하늘에서 내리는 새 양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가 43장을 찬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 내 맘을 편케 하니 즐겁고 기쁜 날, 이 날에 하늘에서 새 양식 내리네 성회로 모이라고 종소리 울리네, 이 주일 지킴으로 새 은혜 입어서 영원히 쉬는 곳에 다 올라갑시다”를 찬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성찬을 주신 목적을 친절하게도 정리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에서 복음의 모든 약속을 주신다는 증표요 보증이며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양분임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을 우리는 구원의 모든 은총을 확신하고 예수님 안에서 즐거워하면서 영적인 생활을 하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받아 먹으라”고 하심으로 성도라면 누구든지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6:35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심으로 영적 배부름과 다시는 목마름이 없는 생명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영적 양분을 충분히 공급받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몸 공동체라는 것을 믿으며 서로 섬김으로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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