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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8:21-35
강설날짜 2017-04-02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1-35)

 

 

지팡이교회는 마18장을 3주간 동안 강설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들 중에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큰 교회 목사입니까? 작은 교회 목사입니까? 이런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장로입니까? 아니면 직분 없는 지체입니까?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큰 사람이냐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큰 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큰 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큰 자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 의도를 생각하면 너희(제자)는 자격 없는 것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겸손의 특성을 이야기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그리고 사랑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겸손으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작은 자를 실족하지 않도록 섬기라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 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여 죽음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형제를 자매를 그리고 어른이 아이를 사랑하는 지팡이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실족하여 넘어진 형제가 있거든 길 잃은 양처럼 생각을 하면서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은혜와 긍휼 그리고 사랑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일대 일로 그 다음에서 두세 증인으로 한 후 그것도 듣지 아니하면 교회에 말해야 합니다.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취급하라 하십니다. 교회는 사람의 모임을 넘어선 하나님 나라의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는 무조건 출교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잃은 양을 찾아서 기뻐하는 것처럼 한 영혼을 회개하도록 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지팡이교회는 앞으로도 권징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도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 하면서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형제를 실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큰 자가 작을 자를 섬기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18장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질문을 합니다. 21절을 보시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권징의 말씀을 들으면서 용서에 대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고 그런 형제를 용서하는 이런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합니까?”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취급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몇 번까지 용서하냐는 질문을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권징을 한 사람도 용서를 몇 번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은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 세 번까지 용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죄를 범하면 용서해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전승을 알고 있다면 베드로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용서를 측량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21b절에서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하면서 좀 넉넉하게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수학적인 계산을 하면서 490번 용서를 하면 됩니까? 두 개의 완전수인 7 곱하기 70번 하면 됩니까? 두 개의 완전수를 사용함으로 끊임없는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숫자는 단지 끊임없는 용서를 위해서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죄를 범한 형제를 490번만 용서를 한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비참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490번가지고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은 오직 사랑의 은혜입니다. 누가는 아마도 베드로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요약하여 정리를 합니다. 눅17:3-4절을 보시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교회의 형제가 하루에도 계속하여 죄를 짓고 일곱 번이나 회개를 하면서 용서를 구할 때 한없는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용하여 회개하지 않고 용서를 구할 때는 권징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인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한없는 용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출교를 시킴으로 이방인과 세리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없는 용서를 하라고 하시고 있기 때문에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죄를 범한 형제를 더 이상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형제의 죄를 묵인하면 계속하여 공동체는 더 힘들어지고 같은 죄를 다른 분들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징은 다시 그 형제와 같은 마음으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단지 권징은 세상적인 사법부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한없는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님의 말을 어려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왜 끝없는 용서를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용서를 하여 주신 것처럼 구원을 받은 백성은 서로가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3-34절에서 세 개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23-27절은 임금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예수님은 “천국은~~~와 같으니”로 시작을 합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크냐라는 질문을 계속하여 이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을 묘사하기 위해서 “천국은 ~~~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계산법(결산, 회계)이 있다고 하십니다. 천국에 속한 성도는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를 용서해 줄 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십니다. 말씀을 다시 생각하면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여기서 종들이라고 해서 노예적인 의미가 아니라 임금과 상대하는 신하로서의 종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죄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죄에 대한 태도는 어떠하며 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결산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결산을 위하여 종들이 한 명씩 임금인 하나님에게 소환됩니다. 24-25절을 보시면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하심으로 모든 일에는 결산 즉 책임이 있습니다. 죄를 범하고도 또 죄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천국 생활의 책임과 권징을 부인하거나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당신님의 나라에서도 죄에 대한 책임 물음이 있을 것이고, 그 책임 추궁이 엄중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비유를 생각하면 “일만 달란트 빚지 자”라고 하는 것은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자의 품삯입니다. 노동자가 육천 데나리온을 벌려면 육천일 동안 일해야 합니다. 대략 20년 동안 벌어야 할 막대한 돈입니다. 더구나 일만 달란트를 벌라고 하면 대략 20만 년의 노동자 임금입니다. 이것을 무게로 하면 한 달란트는 대체적으로 30킬로그램으로 생각합니다. 한 달란트의 무게를 계산하여 일만 달란트를 생각하면 30만 킬로그램으로 화물로 하면 300대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종이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하심으로 유대 전통대로 가족을 종으로 팔아 갚게 하라는 것입니다. 종과 왕의 관계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종은 자신의 재산으로 갚을 수 없는 것이고, 자녀와 부인을 종으로 팔아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종은 절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규를 하는 가운데 종은 26절에서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간청합니다. 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겸손과 절망으로 오직 임금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는 표시로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이든 오늘날이든 일만 달란트는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이 어떻게 이런 빚을 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임금의 재산을 착복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종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면 임금은 참아야 합니까? 임금은 애절하고 절망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종을 불쌍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임금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종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임금이 종이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여 준 것은 종이라 할지라도 한없는 용서를 한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27절을 분명하게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종에게는 자신이 용서 받을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임금은 종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도 큰 선물을 준 것입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바로 종 되었던 나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는데 예배를 하면서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단지 감사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예수님은 세 개의 장면 중에서 두 번째로 28-30절에서 종이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것을 말씀 하십니다. 일만 달란트의 한없는 빚을 탕감을 받은 종은 자유함을 얻습니다. 구원함을 얻은 그에게는 오직 감사만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용서하는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사랑 그리고 빚을 탕감을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연히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게 됩니다. 28절을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임금으로부터 한없는 용서를 받았는데 그에게 빚진 자에게는 한없는 용서를 안한 것입니다. 사실 백 데나리온도 적은 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만 달란트와 비교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그런데도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는 것은 우리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들도 임금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본래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귀중한 것들 중 어느 하나 바르게 사용하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방법으로 사용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사람에게 주었지만 어떻게 만들어 버렸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반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여 주셨습니까? 일만 달란트 그리고 백 데나리온 빚 진 자보다 더 한 사랑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나를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은혜인데 은혜도 모르고 생활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가운데 그도 동일하게 29절에서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2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와 대조됩니다. 임금과 종의 관계에서 전혀 다르게 반응을 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동료의 진정한 마음을 거절하고 어떻게 했습니까? 30절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감옥게 가둔 것입니다. 자신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을 받고 같은 동료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백 데나리온은 대략 3개월 월급으로 갚을 수 있는 금액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와 긍휼보다 잔인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개의 비유에서 마지막으로 31-34절에서 임금이 종을 잡아 가두는 것을 말씀 하십니다.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불쌍히 여겨 임금에게 알린 것입니다. 31절을 보시면 “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그냥 알리는 것이 아니라 원문으로 보면 상세하게 설명하여 알리는 것입니다. 동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자들이 참다못하여 고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32-34절에서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악산 종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불쌍히 여기고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같은 동료를 같은 형제를 같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는 것은 회개한 자들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동료에게 백 데나리온을 받지 말고 탕감하여 주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백 데나리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동료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로 돌려보내면서 최선을 다해서 갚으라고 하면 됩니다. 같은 동료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것은 임금이 보여준 사랑과 긍휼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35절에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너희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처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백성은 동료들을 늘 탕감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함을 얻은 백성의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잠시 잃은 양의 비유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잃은 양을 그냥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양을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찾아 돌아오는 것입니다. 용서와 긍휼 그리고 사랑이 없다면 그냥 두면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죄를 묵인하고 버려두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함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인 형제들에게 오순절 강설를 할 때 은혜를 받은 그들은 행2:37절에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울부짖는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베드로는 38-40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진정한 사랑은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도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구원함을 얻은 백성은 용서를 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받은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신 의미를 생각하십시오. 빚을 탕감 받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동료를 용서하지 아니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죄입니다. 용서하는 삶의 백성으로 구원의 의미를 늘 전하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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