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32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5:43-48
강설날짜 2021-05-02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마5:43-48)

 

 

오늘도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마스크는 성경보다 더 필수적인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성경이 필수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마스크가 필수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코로나는 사람에게 치명상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만 힘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섬기어 주셨을 것입니다. 교회도 어려운 현실이지만, 교회는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하는 본분이기에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팬데믹 시대가 되도록 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도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교회는 이웃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흑사병은 치료제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치료책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 코로나 19도 비슷합니다. 이럴 때 교회는 헌상 즉 헌금을 이웃 사랑을 위해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헌상은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날이라고 믿습니다. 당연히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이웃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팬데믹 시대입니다.

 

 

중세 시대에 흑사병으로 사람들은 수없이 사망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망하다 보니 죽음 자체도 일상화되었습니다. 일상화된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에 무감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교회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성을 다해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을 아는 교회입니다. 흑사병은 오히려 교회에 있어서 기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마음과 이웃을 섬겼던 사랑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진노하실 때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에서 돌이킬 방법은 성경의 말씀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는 마지막 날 즉 주님의 재림을 두려워하며 돌이키라는 경고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일 지팡이 교회는 “악한 자를 대적해야 하는가?”를 강설로 들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아실 것입니다. 당한 것이 있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보복법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보복법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의미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악을 대적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자에게 그대로 보복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사회에는 법정이 있고 교회에는 권징 즉 치리회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자신이 당한 것을 법정 또는 치리회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므로 사람을 심판할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에 의해 교회는 사람들이 돌이키게 하려고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홈페이지에 보시면 “교회에 대한 권징의 말씀”이 있습니다. 참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도 기억해 보십시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마음을 품고 신앙생활 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오직 선한 마음을 품고 옳고 바르고 선한 것을 행하는 주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계시의 말씀에 따라 신앙생활 하는 성도입니다. 이것을 잘 알기 위해 우리는 지난 주일과 연결된 말씀을 알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는가를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의 마무리를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종교지도자들의 오해를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이웃 사랑의 깊은 뜻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오늘 본문 43절부터 차분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서 원수를 미워하라’입니다. 서로 다른 말씀입니다. 우리는 차분하게 43절을 다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입니다.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구약에서(신7:2, 시139:21-22 등) 유사한 말씀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원수를 미워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은 거짓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43절 끝에서 하신 말씀은 ‘너희가 들었으나’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말씀을 정정하여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르게 하시기 위한 선언과 같습니다.

 

 

당한 대로 갚아주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보복이나 복수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하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보복법으로 갚으라고 했으며,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사랑의 대상에 제한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사람에게나 제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시5:4-5) 이것을 종교지도자들은 아마도 오해한 것 같습니다. 악한 일을 한 자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정의 의미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지만, 결코 사람을 원수로 미워하라고 명령하신 적은 없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롬12:21절 말씀처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원수를 물리치는 최선의 길은 그를 친구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말씀만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레19:33-34절을 보아야 합니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입니다.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인을 원수처럼 생각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과거에 어떤 자들인지 생각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44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제한된 사랑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든 이웃이든 원수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장로의 유전을 통해 사랑을 이분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율법을 잘 아는 자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한 율법사에게 오히려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할 의의 수준에 대해서는 율법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율법의 전문가인 너는 이러한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하였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였습니다. 율법사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이분법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사는 이분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답을 해야 하는 교회 즉 성도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원수와 이방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자신들만 선택된 민족이며 이방인은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은 자연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에 혁명가처럼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가시와 같은 예수님을 죽여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잘 알아야 했던 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는 아가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에 원수와 같이 생각하는 이방인이라도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산상수훈을 통해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원수와 같은 세리를 제자로 삼으시기도 하셨습니다.

 

 

레19:18절을 보시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웃 사랑하는 것 이전에 원수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악한 일을 한 원수에게 보복하지 말며 동포에게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희생을 감수하며 원수에게까지 미치는 풍성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율법을 주신 참뜻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사랑을 제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들과 같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마음으로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45절을 보시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니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영광을 누리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물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으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보복법으로 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겠습니까? 죄로 물든 우리에게 악으로 심판하신다면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죄를 감당하셨습니다. 원수인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자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웃과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신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율법의 참뜻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46절에서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질문은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입니다. 세리는 경멸의 대상이요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처럼 취급하는 세리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었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동포들에게 착복하는 자였습니다. 이방인과 접촉을 자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정결법을 어기는 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세리를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으로 취급하며 상종하지 말아야 할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리도 사랑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세리도 본능적인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를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상이 있습니다. 그 상은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한 나라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6절에 이어서 47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질문을 던지시고 스스로 답을 하셨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나 부정한 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부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방인을 원수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사랑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원수와 같은 마음을 품는 자는 이방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새로운 삶을 생활하는 성도로서 보복법을 거부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48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마무리하셨습니다. 이렇게 마무리하신 이유는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여지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없는 신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선하고 온전한 자가 아니라 삶에서도 온전해야 하는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 성도입니다. 온전하라는 말씀은 서로 사랑으로 승리하라는 마무리 결론입니다. 유대인들은 관습법과 같은 장로들의 전통을 버려야 합니다. 율법의 참 의미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웃과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의미요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 이해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한 사람은 늘 성숙하기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자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거룩하고 선한 사랑으로 승리해야 하는 백성입니다.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며 복음으로 구원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것을 기억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된 양심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보복법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친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이분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어느 사람이나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이기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람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만이 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사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성도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받았기 때문에 이웃과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중에 일부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지식을 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성경의 말씀을 알아가며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인 나를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도록 하심으로 진정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도록 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아들을 보내어 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과거의 불신자와 같은 삶에서 사랑의 삶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불신자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비범하고 신적인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불신자는 우리의 삶을 보며 하나님을 믿기 위해 교회로 한 발자국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284 고린도전서를 강설하며...... 전은덕 고전1:1-3 2023-03-26 71
283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교회의 삶 전은덕 빌2:12-18 2022-11-20 229
282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 전은덕 빌2:5-11 2022-11-13 158
281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생활 전은덕 빌2:1-4 2022-10-09 296
280 사도 바울이 택한 길과 우리의 길 전은덕 빌1:22-30 2022-10-02 288
279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주는 위로와 확신 전은덕 빌1:12-21 2022-09-25 379
278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 전은덕 빌1:3-11 2022-09-11 239
277 빌립보서를 시작하며..... 전은덕 빌1:1-2 2022-09-04 231
276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은덕 엡3:1-13 2022-08-21 298
275 교회는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를 알아야 한다. 전은덕 엡2:21-22 2022-08-14 276
274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는 바울... 전은덕 엡6:18-24 2022-08-07 274
273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전은덕 엡2:14-18 2022-05-01 451
272 예수님의 십자가 화목을 아십니까? 전은덕 엡2:11-13 2022-04-24 431
271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은덕 엡2:6-10 2022-04-17 449
270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즉 우리를 살리셨도다 전은덕 엡2:1-5 2022-04-10 709
269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전은덕 엡1:20:23 2022-04-03 497
268 죄 사함 받은 성도의 영광과 찬송 전은덕 엡1:7-14 2022-03-20 396
267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전은덕 엡1:3-6 2022-03-13 397
266 에베소서를 알자? 전은덕 엡1:1-2 2022-03-06 406
265 안식일의 주인이 병자를 고치시다 전은덕 마12:9-14 2022-02-27 32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