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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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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6:5-8
강설날짜 2021-05-16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g3tik2ahbJQ

왜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는가?(마6:5-8)

 

 

오늘 지팡이 교회는 새로운 건물로 이전하여 첫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예배당이든 어느 장소에서 예배하든 중요한 것은 바른 마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시작을 이렇게 하고자 합니다. 성경적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국 교회는 개혁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예배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하며 많이 예배하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복을 받기 위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성도를 당신님의 백성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지팡이 교회는 예배당에 모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된 마음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영혼을 숙여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예배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구속의 은혜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구속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삶과 십자가의 구속에 의존해서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를 두고 예배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에 순종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하고자 하는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성도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우리는 지난주 강설을 다시 기억해 보겠습니다.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사람의 몸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몸인 나는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구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의를 드러내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구제하는 것도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존재인 우리를 잘 아시기에 의를 행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자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구제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해하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는 구제를 어떻게 종교지도자들처럼 나팔을 불며 할 수 있겠습니까? 목적과 동기를 하나님 앞에 두어야 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는 행동은 이 세상에서 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처럼 교회인 성도는 구제할 때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김이 있는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행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으며 신앙생활 하는 지팡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기억하는 우리는 오늘 기도를 왜 은밀하게 하라고 하는지 말씀을 통해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구제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기도를 은밀하게 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예를 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간구입니다. 사람이 들어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시선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현실을 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은혜의 방도” 즉 수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목적과 동기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기도도 구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오늘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다니엘이 하던 세 번의 기도를 이어받은 전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오전 9시 정도 12시 그리고 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구제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기도가 위선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늘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교제요 대화입니다. 말을 주고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람들과의 대화와 차원이 다른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영적 사귐과 교제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구원함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라 믿습니다. 구제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즉각적으로 교제할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기도에 대한 것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것처럼 회당과 큰 거리에서 기도했습니다.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를 내어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는 기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경건 생활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에서 일부러 기도한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정해진 시간을 이용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장소였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기도하는 쇼를 한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큰 거리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 것입니까? 자신들이 기도하는 것을 사람들이 듣고 역시 종교지도자들은 기도를 잘 한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교제라는 것을 종교지도자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진실한 기도를 하려거든 구제와 같은 마음으로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이나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것까지 기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적인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자신을 높이기 위해 종교지도자들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서 서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칭찬받기 위해 한 자들은 이미 상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지언정 하나님 나라에서 상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종교지도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구원의 상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구제처럼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6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종교지도자들처럼 외식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6절을 보시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골방은 창고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기도를 하지 않게 하려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당신님에게만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를 사람은 보지 못하나 감찰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며 사귐이 있는 교제를 하며 나를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들이 나의 기도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아시고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응답하여 주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기도는 무조건 나의 기도를 들어주세요가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처럼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대로 당당신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은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중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서서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나 자신의 개인적인 교제이므로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집중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숨김없이 기도하는 나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응답하여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7절을 보시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것은 이방인이 가짜 신에게 하는 기도입니다. 이방인들은 같은 기도를 반복해야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의 신의 이름을 반복하여 많이 부르면 더 좋은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삼하18:26절에서도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아침부터 계속하여 반복하여 바알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아실 것을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하며 반복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의를 다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감동시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유창한 언어가 아니더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아시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끌어 주시는 것을 믿고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은 내용으로 세 번이나 반복하여(마26:36-460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를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적인 기도와 어려움 등에서 반복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없이 자신을 위한 반복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방인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릴리 지역은 이방인 지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방인의 출입이 잦았고 그들과 함께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마도 이방인의 기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로 쓸데없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주문처럼 반복하여 많이 하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사귐이 있는 교제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처럼 장엄하고 길기만 한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반복적인 기도를 하더라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사귐이 있는 교제의 기도를 아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8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전5:2절과 유사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믿음의 조상인 솔로몬은 기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후손들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마음으로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구제하는 것처럼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방인과 같은 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칭찬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칭찬을 받는 것보다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반드시 응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단한 지극정성과 수고와 희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대단한 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계시는 하나님께 사귐이 있는 교제의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사정을 다 헤아리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아시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신뢰감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청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질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단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는 마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자녀인 우리와 신뢰감으로 인격적인 대화를 원하십니다.

 

 

죄는 자기 숭배, 자기 도취, 자기 관심 집중, 자기 칭찬, 자기 과시입니다. 이런 것은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를 위험하도록 하는 죄입니다. 기도도 자신이 칭찬받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죄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외식하는 자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을 더 바르게 인도하며 섬겨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외식하는 자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왜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는가”를 알았을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기도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처럼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위선적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한 자신의 삶을 생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으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는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누리는 가장 중요한 사귐의 교제입니다.

 

 

신앙의 깊은 맛은 이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깊은 맛은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이나 모자란 것 없이 모든 것을 얻은 자의 승리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깊은 맛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우러러 나오는 주님의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자랑하는 삶입니다. 자연스러운 생활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신앙의 깊은 맛입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로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은 신앙의 깊은 맛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영적 교통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으로 우리는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나라를 누리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대단한 지극정성과 수고와 희생에 있지 않습니다. 또한, 대단한 확신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모든 사정을 깊이 헤아리시고 네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간구하면 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 필요 없는 것까지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수준을 알기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거기까지 주시는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끈질기게 기도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을 오해하여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밤낮으로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소원성취하듯이 들어주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이요 기도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기도를 들어주었습니다. 왜 이런 재판의 결과가 일어난 것입니까? 이 비유의 내용을 자세히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비교가 되는 것은 불의한 재판관과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끊임없는 호소에 못 이겨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의 삶을 다 아시니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기에 응답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왜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는가”를 알았을 것을 믿고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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