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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6:13-15
강설날짜 2021-06-13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inXVacGxKzs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리고...(마6:13-15)

 

 

 

사람에게 있어서 좋은 습관은 평생 함께하면 즐겁고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습관과 평생 동반자로 함께한다는 것은 좋습니다. 좋은 습관과 반대로 나쁜 습관은 나를 힘들게 하면서도 이웃을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좋은 습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주위 사람에게도 영향력을 주기도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좋은 습관을 지니고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좋은 습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습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좋은 습관을 지니고 있는 교회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좋은 습관은 지상명령을 감당할 때 큰 힘이 되지만, 나쁜 습관은 신앙생활을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질이 떨어지도록 하며 지상명령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은 서로 다른 영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좋은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하며 기도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지닌 성도는 예배할 때도 좋습니다. 예배할 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은혜를 간구합니다. 예배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은 습관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유일한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지금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 바라보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마태복음을 강설로 듣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안에 있는 산상수훈 중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듣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기도가 아니라 연약한 백성을 위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그 어떤 종교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의 아버지처럼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자 됨을 입은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신뢰와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심으로 나를 위한 기도의 토대와 출발점으로 주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절실히 믿으며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증거로 인해 나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행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기에 주기도문 중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알도록 매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죄도 매일 구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양식을 위해 일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을 믿으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요 성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의 죄만 사하여 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나의 죄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오! 주님이라는 소리가 나올 것 같습니다. 나의 죄는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정작 주위 사람들의 죄는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여 주셨는데 장작 나는 어떠합니까? 이것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위해 용서할 힘과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나를 발견하며 우리 주위의 모습을 보기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지팡이 교회는 거룩한 성도의 모습으로 성화 되어 가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지난주 강설을 기억한 우리는 오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리고....”를 통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알기 원합니다. 왜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언제나 인생역전이요 늘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에서는 인생역전이요 늘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간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아시기 때문에 삶에 시험이 닥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성도의 삶은 늘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함을 받은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활하기 전까지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시험에 들도록 합니다. 죄악에 빠질 수 있도록 유혹하며 올가미를 놓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이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위험한 노출에 있는 우리를 위해 영적인 현실을 알도록 하심으로 지상명령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절대 혼자만 지옥에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을 유혹하여 넘어지도록 함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시험과 유혹으로 죄를 짓도록 부추깁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도록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실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다만”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만이라는 뜻은 “그러나”라는 뜻입니다. 다만 즉 그러나를 통해 소극적이고 수동성이 강한 기도에서 이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을 알려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성도는 결국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유혹과 시험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삶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와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도록 기도하라고 하심으로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서 즉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시험과 유혹은 우리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험과 유혹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 강건하며 장성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합니다. 시련과 역경은 나를 기도하도록 하는 힘이 됩니다. 정말 힘들 때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자세요 믿음입니다. 시험과 유혹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합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하심으로 군인과 같은 신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로부터 시험에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심으로 마귀로부터 모든 것을 이기도록 인도하십니다. 내가 이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영광 하나님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도 어떤 신자는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인도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마귀만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하십니다. 그러나 시험은 서로 다릅니다. 마귀의 시험은 유혹하여 지옥으로 인도하지만, 하나님의 시험은 정금과 같이 연단하도록 하심으로 온전한 신앙인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심으로 지상명령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군인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약1:2-4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시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지만 그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의 길입니다. 참으로 힘든 길을 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오직 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세상의 물질과 잘 사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생활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화살과 같은 세월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영원한 안식처를 인도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를 안 우리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은 마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종말의 시대를 생활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보호하여 주시면서 시험과 유혹 즉 마귀에게서 이기도록 하십니다. 마귀는 자신에게 속한 악한 자들을 이용하여 교회인 성도를 무너지도록 합니다. 성도가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시험과 유혹을 하는 마귀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로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면서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유혹과 시험하여 악에 빠뜨리려는 마귀와 악한 자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우리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성도를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합니다. 시험하고 유혹함으로 믿음이 무너지도록 합니다.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주님께서는 기도하게 하심으로 늘 인도하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동행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정결과 순종으로 주의 길을 기쁨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는 고전10:13절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마귀가 시험하지만,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으로 피할 길로 인도하시며 감당하도록 하시며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안전을 도모하여 주시며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를 멈추면 안 됩니다. 그 즉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도록 성령께서 마음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늘 인식하고 깨닫고 마귀의 능력과 간계에서 구해 달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알기에 마지막 기도를 간구로 마무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기도는 절실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황금만능주의로 생활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복은 하나님만 믿는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송영으로 주기도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책을 보시면 괄호 안에 글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문구에 대해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문구는 후대 성경에서 나옵니다. 고대의 유력한 사본과 눅11:2-4절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후기 사본에서는 나옵니다. 그리고 2세기 전반에 기록된 “디다케”난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에 신학적으로 틀린 내용은 없으며 공적인 기도에서 이 말을 포함하는 것도 부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문구를 원본 일부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있었지만, 후대에 일부 사본들에서 누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알 수 없지만,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를 번역에서 뺀 것입니다. 과거 주기도문에서는 있습니다. 대개는 음식으로 먹는 대개가 아닙니다. 대개는 “왜 그런고 하니”입니다. 주기도문을 송영으로 마무리하며 “왜 그런고 하니” 권세와 영광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고백함으로 마무리합니다. 이처럼 송영은 전통 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기도와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히 경배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응답만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14절과 15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와 연결된 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모법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면서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 중에서 특별히 명심해야 할 내용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지상명령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처럼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해야 할 등대와 같은 빛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과 연결하여 부연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여 줌으로 하나님과 더욱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성도는 이웃의 관계에서도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마귀의 시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서 이기도록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시험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구원받으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입니다. 그것을 아는 마귀는 가만히 보고 있지 않습니다. 마귀가 유혹하여 시험하는 목적은 교회가 죄를 짓도록 함으로 무너지도록 합니다. 죄를 계속해서 짓는 자들은 그대로 두면서 죄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본심입니다. 신자들이 죄를 범하게 하여 신앙생활에서 멀어지도록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도록 합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늘 생각하며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며 주의 길을 가며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도 시험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만 바라본 베드로는 주의 길을 바르게 가는 제자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주님의 참사랑을 알았습니다. 참사랑을 안 베드로는 주님과 동행하며 매일 기도했습니다. 나와 베드로를 비교할 수 없지만 다 같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같은 공통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기억하며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결국 영적 죽음을 초래합니다. 그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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