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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8:13-17
강설날짜 2021-08-29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마8:14-17)

 

오늘날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어야 하지만 세상의 모습으로 변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본질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이익을 따라가다 보니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기보다 위안을 받고자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런 분들에 의해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상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도록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 즉 진실한 성도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며 보호하십니다. 남은 자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지상명령을 감당하기 위해 지팡이 교회는 마태복음을 강설로 듣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알기에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며 섭리 가운데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에게 적대적인 것을 제거하시며 완성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시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귀는 완악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은 사람을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런 가운데 고난에 참여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교회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파생되는 결과입니다.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는 교회의 이미지를 지키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지팡이 교회는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에 승리하기 위해 강설을 들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두 주에 걸쳐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것을 강설로 들었습니다. 마태는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마태복음에 두 사건을 기록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왕이든 하인이든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려고 마태는 두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나병환자와 백부장은 예수님의 긍휼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마음이 청결한 자요, 애통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 안에 들어가는 긍휼의 은혜를 입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를 입은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을 생각하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나병환자와 백부장의 하인처럼 고치기 힘든 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은 특별히 거룩할 만한 이유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태가 왜 기록을 했을까 우리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장모는 나병환자 그리고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신분과 권세를 알고 치유함을 받고자 고쳐달라고 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의미가 없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강건하여지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1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벳새다 출신이지만, 결혼 후 가버나움에 정착하여 생활해 왔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와 같이 생활했다고 기록했습니다.(막1:29) 유대인들은 대가족이 함께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와 차이점은 장모님도 함께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실 때 자주 이용한 집이기도 합니다. 가버나움에서 사역하던 중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마도 최근에 얻는 제자인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이야기하실 것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몸져누워있었습니다. 열병으로 인해 몸이 무력하고 무능하여 쓸모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우연히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안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의 간청이 있었는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마태의 관심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게서는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에게 손을 대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열병에 걸린 사람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적인 권위가 있기 때문에 손을 대시며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심으로 당신님의 친근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치유함을 받은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났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을 수종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수종드는 섬김으로 자신이 치유함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서 생활할 때 계속해서 수종 들었을 것이라 추측되기도 합니다. 하여튼 베드로의 장모는 여인 중 최초로 예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구원받은 장모는 자신을 구원한 예수님께 자발적인 마음으로 헌신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구원받은 자는 그에 대한 대가로 종이나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장모는 노예나 종의 신분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를 섬기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소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 16절입니다. 16절을 보시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휴식할 시간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만 사역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작은 섬김으로 사역했을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의 장모도 수종을 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여튼 사람들은 병을 고치기를 소원하며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나병환자와 같은 육체적인 질병이 아닌 자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가버나움에는 귀신 들린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왜 마태는 “말씀으로”를 강조한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가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자들을 축출하시고 정신이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정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예수님께서 영육을 주관하시는 권위가 있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병행본문이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1:3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은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눅4:41절을 보시면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고칠 수 없는 질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라는 생각하며 오늘 말씀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을 은연중에 고백하며 기록했을 것입니다. 마태는 마가와 누가보다 부수적인 일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태는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능과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습니다.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을 향해 기록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관점으로 누가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이기에 관점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서로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마태는 오늘 사건을 통해 단지 병을 고친 것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17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치료자로서의 예수님의 메시야적 역할에 초점을 맞춘 이사야의 “종의 예언”에 대한 언급입니다. “종의 예언”은 사53장입니다. 부활절이면 찬양으로 많이 부르기도 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단지 병고침에 있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죄의 병이 들어 저주받은 우리 영혼을 고쳐 살리시는 진정한 메시야로서의 행하신 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의 짐을 지고 가는 어린양 즉 메시야였습니다.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 초대교회는 이 사건을 통해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가 누구신가를 더 자세히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를 향산 사랑과 긍휼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며 장성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마태는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연약함과 질병을 친히 담당하시고 짊어지시는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거룩한 도리와 천국 복음을 믿는 데까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점점 더 큰 사역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거룩한 도리로 이끌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오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치시는 사건과 귀신들린 자들을 말씀으로 치유하신 일들은 마태가 기록한 것처럼 이사야가 말한 예언이 정말 그런가에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받고 죽으심으로써 당신님의 백성 중에 있는 모든 질병을 지고 가시고 메시야였습니다. 메시야만 하실 수 있는 사역을 예수님께서 하시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베드로의 장모 집에 찾아 왔습니다. 당대의 의학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 바로 귀신 들린 자입니다. 손과 말씀을 사용하시어 고쳐주셨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와 그릇된 선입관과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벗어나도록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함으로 은혜와 가르침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군림하시고 통치하는 그 나라로 옮겨 오게 하시기 위한 중요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신약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는 믿음으로 주의 사역에 동참하면 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나음으로 예수님을 수종 든 것처럼 지팡이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교회로 성장하며 장성한 신앙으로 성숙해 가기 원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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