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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2021.09.06 20:19

너는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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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8:18-22
강설날짜 2021-09-05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XP4ewEY9KFQ

너는 나를 따르라(마8:18-22)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의 선배님들은 신앙고백서와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있는 선배님들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1번은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시대의 아픔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고백자들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였습니다. 더 긴 글이지만 앞부분의 문답만 읽어 드렸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또는 네델란드 신앙고백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여튼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첫 시작을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계심”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으로 시작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죽음도 하나님으로 시작하며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 신과 국가의 왕이요 신이라는 것에도 굴복하지 아니하며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주의 길을 따라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믿음의 선배님들처럼 견고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하나님을 믿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세상 속에서 믿음의 선배님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믿음의 선배님과 같은 믿음보다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과 관용”은 좋은 말입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가짜 신자들은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랑과 관용”을 이용합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이 남기어주신 유산과 성경을 무너지도록 합니다. 성경이 죄라고 하는 것도 죄라고 하지 않는 시대에 있습니다. 세상과 같은 마음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관용”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관용”은 다릅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관용은 하나님 안에서입니다. 세상은 사람 안에서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반석과 같은 믿음을 유지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반석과 같은 믿음을 소요한 백성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안다는 것은 행복합니다. 행복하기에 믿음으로 예배당에 모이는 교회로 예배합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삶의 생활에서도 흩어지는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며 예배합니다. 오늘 말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난주 말씀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시 정리하고 오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하신 후 베드로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장모의 열병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손으로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을 안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수종을 들었습니다. 수종을 들었다는 것은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발적인 헌신으로 주의 길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일이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이 저물었을 때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저라도 이렇게 할 것입니다. 한 줄기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구원도 한 줄기 희망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많은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피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만 사역에 동참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도 수종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면서 당신님이 메시야의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17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친히 담당하시고 짊어지시는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예언하신 것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후부터 아마도 밤새도록 귀신들린 병자를 계속 치유하셨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18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시면서 이제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때임을 아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문이 확장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당신님을 애워싸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건너편은 어디를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지역이 아닌 이방인의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거라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태는 이방인 지역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치유하심으로 인해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육신은 힘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지역에서만 복음을 전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여러 지역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역은 갈릴리 지역에서 많이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자들은 배를 준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 이방인 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 누가 찾아 왔습니까? 서기관이었습니다. 그 서기관은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19절을 보아야 합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만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학자이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오늘 여기서 서기관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2:4절과 5:20절 그리고 7:29절에 등장했습니다. 지금까지 등장한 서기관은 유대인 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식하는 즉 부정적인 시각으로 마태는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서기관은 예수님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은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선생님이라는 호칭함으로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예수님께 승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기관의 굳은 결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당장 예수님과 함께 건너편으로 이방인 지역으로 가고자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종교지도자 중 하나인 서기관이 이방인 지역으로 가고자 한다는 것은 큰 사건입니다. 서기관으로서는 큰 결정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서기관은 율법의 강력한 수호자입니다. 성경을 잘 알기에 큰 영향력이 있는 서기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과 가버나움에서 사역한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은 더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해석하는 분들고 계십니다. 서기관의 깊은 속내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얻게 되는 명예와 지위에 관심이 많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율법을 더욱 깊이 배움으로 자신을 위한 것으로 사용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 좋은 해석인지 어렵습니다. 하지만 서기관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처음으로 입장으로 따라고자 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쉽지는 않습니다. 아쉬운 점은 마태는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서기관의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20절에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마음을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동물에 비유하여 가르친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너무 여우와 새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의 길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고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제로 삶에서 예수님의 길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에게 나를 따르기는 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궁핍과 가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안식처가 있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보금자리가 되는 집에서 생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보면서 안식처를 찾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의탁하여 편안함으로 찾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셨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버나움에서 하셨던 일들을 보면서 더 자세히 알고자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를 따른다는 것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사용하신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자”입니다.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중요합니다. 인자란 단어는 단7:13절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다니엘서를 보시면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칭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신적인 정체와 메시야적 사역을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차매 예수님을 성육신으로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존재이시며 동시에 사람으로 낮아지신 당신님을 드러내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라는 의미에는 하늘의 신분과 사람으로 낮아지신 메시야의 모습이 동시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인자는 29번 사용됩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존재가 누구신가를 드러내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인자는 흔한 죄인들을 용서하시러 오신 겸손한 종으로(마9:6) 속죄의 죽음과 부활로 당신님의 백성을 구속하실 고난의 종으로(마16:3, 27-28)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돌아오실 영광스러운 왕이자 재판장으로(마25:31, 26:64)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인자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신 특수한 관계로서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되신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심으로 나를 따르는 것은 고난의 길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서기관이 그 뒤로 인자 되신 예수님을 따랐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핍박을 당하며 죽을 수 있는 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를 더 중요시했었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예수님께 질문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후 계명에 대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답을 들은 부자 청년은 눅17:21절에서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온갖 희생을 감당하며 생활해 왔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서기관의 입장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영생을 위해 예수님과 같은 희생의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섬김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서기관과 예수님의 대화를 들은 제자 중의 한 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1절을 보시면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제자가 누군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불 특정한 무리 중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했는데 제자 중의 한 명은 “주여”라고 했습니다. 서기관보다 좀더 예수님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시대 관습은 장자가 부친의 마지막을 보살펴드릴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질문은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로 소명 받은 제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주를 따르겠다는 욕망과 자식의 도리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두 욕망이 갈등했을 것입니다. 결국, 제자 중 한 명은 자신의 아버지를 선택했습니다. 효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22절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은 유대인들의 문화와 전통을 고려할 때 이해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육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십계명 즉 “언약의 열 가지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자 중 한 명의 아버지가 사망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망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장사를 지내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22절을 다시 읽어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긴말을 줄여서 함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반복한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상이 다릅니다. 참으로 난해하고 어려운 해석입니다. 늘 우리는 최선을 다해 연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학자의 연구로 우리는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죽은 자들”은 제자의 죽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사망한 아버지를 장사해야 할 사람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죽은 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은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즉 사망한 사람이나 숨이 있는 사람이나 예수님께서는 모두 “죽은 자”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알기 쉽게 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로서는 아쉽지만 “계시의존 사색”을 하며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구원받으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때를 기대하며 말씀을 들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빌려와서 다른 차원의 죽음을 말씀하고자 하셨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자들입니다. 특별한 의미에서는 죽은 자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육신이 살아 있어도 특별한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의미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망한 자나 살아 숨 쉬는 자라도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특별한 생명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가 되어야 영적인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삶을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 백성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죄로 물든 사람은 살아 숨 쉬는 생명조차 죽음에 불과합니다. 살아 숨 쉬지만 죽은 것과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특별한 생명을 소유한 숨 쉬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죽은 자처럼 생활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믿으면 영생의 길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참 생명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으로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제자의 삶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질을 많이 가진 후 믿겠다는 것은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상함과 이상을 따라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천하에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외롭고 고달픈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의 부모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로 약속한 제자이며 헌신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절대적인 요구에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 등으로 나를 유혹해도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향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서는 머리 곶조차 없으시면서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은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팡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늘 기억하며 주의 길을 가기를 소망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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