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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8:23-27
강설날짜 2021-09-12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cGSlEIhtfrQ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다(마8:23-27)

 

 

이번 주는 교단마다 총회로 모입니다. 우리 교단 즉 합신은 상동21세기 교회당에서 모입니다. 총대는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 방역 지침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각 노회 목회자 일부는 총회 장소에서 모이고, 그 외 목사님은 노회에서 지정한 예배당에서 모입니다. 총대는 지교회를 섬기기 위해 모이는 ‘섬김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총회는 정상적인 모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섬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임의 제약이 있음에도 총대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를 섬기고자 합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합신 교단은 개혁 교회를 이루어가는 건전한 교단이라 믿습니다.

 

 

왜 총회에 총대가 모여야 하는지 아십니까? 장로교는 목사와 장로가 회를 이루어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대행하는 정치체제입니다. 마18:20절을 보시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후 문맥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치리회로 모인 교회 속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는 치리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치리입니다. 교회라고 할 때 말씀의 강설과 성례 그리고 치리(기도)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당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를 통한 치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는 목사의 것 그리고 장로가 주인이라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로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입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장로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대행하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총회도 늘 한결같이 주님의 교회를 섬겨줄 것을 믿습니다. 총회는 지교회에서 헌의한 것을 접수하여 회의하여 결정합니다. 그리고 목사로서 청원한 사안들도 결정하는 것이 총회입니다. 자신들의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다스림이 있는 것을 생각하며 섬겨야 하는 청지기입니다. 총회는 교회의 순수성을 위해 교리에 대해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교회의 화평을 유지해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이번 총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총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은 예배 중에 말씀의 강설을 듣는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기 전 지난주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지난주 말씀은 “너는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이 말씀에은 예수님의 사역에 중요한 핵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의 강설을 한 후 본문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 말씀은 치유 사역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과 귀신을 치유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주변에 많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치유 사역 중심으로만 하시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과 치유 사역을 통해 당신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지난주 강설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가 되기 원하는 자들은 당신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관찰한 서기관은 제자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통해 영혼의 안식처를 발견했기에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서기관의 말은 들은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너희는 나의 길에 동참하며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안식처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머리 둘 곳이 없더라도 진정한 안식처는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필요하고 병들고 딱한 자들에게 필요한 안식처는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서기관과 예수님의 대화가 끝난 후 제자 중의 한 명이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황당한 말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지난주 말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처럼 숨을 쉬고 생활하지만, 영적 죽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가 되는 자들은 영적 죽음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함께 생활하지만, 신분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앙 고백하며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기억하실 줄 믿고 오늘 말씀을 믿음으로 듣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반대편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은 갈릴리 바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목사님은 호수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호수라는 개념은 못이나 늪보다 훨씬 크고 깊으며, 연안 식물이 침입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심이 깊은 것에 한정합니다. 바다는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면 갈릴리는 호수인데 왜 바다라고 한 것입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물이 많으면 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오늘날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아마도 유대인들도 호수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바다냐 호수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호수는 가장 넓은 폭의 길이가 13km입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볼 때 지역이 안 보인다고 합니다. 그만큼 넓다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예배당에서 출발하여 왕숙천 정도 거리로 생각됩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좁아지는 형태입니다. 가버나움의 사역을 잠시 멈추신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배에 오르셨습니다. 23절을 보시면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예수님만 배에 오르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함께 갔습니다. 여기서 제자는 처음의 제자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리고 그 외 사도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잘 가던 중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24절을 보시면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어떠한 일이었습니까? 그것은 갈릴리 바다 즉 호수에서 큰 놀이 일어난 것입니다. 큰 물결이 일어나 배를 덮어 삼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으로부터 불어오는 찬 공기로 인해 종종 변화가 있다고 합니다. 바다에 대한 경험이 많은 베드로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풍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급하게 예수님께 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고요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께 바다를 잔잔하게 해 달라고 조심스럽게 말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요합니다.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과 더불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절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욥38:8-11, 시29:3,6:5 등) 왜 제자들은 두려워한 것입니까? 제자들은 온전한 신앙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를 본 제자들은 삶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순종의 길 결국 순교의 길로 마무리하며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바다의 풍랑보다 더 참혹한 순교를 맞이하더라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초차 없었지만, 잠시동안 배 안에서 풍랑이 일어도 조용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긍휼과 권세로 사역하신 예수님께서는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신 분이 맞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사역해오신 것을 본 제자들은 황당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내가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인 나를 돌보지 않고 있는가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으로 인해 다급한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가 하며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님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생명이 다급한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을 보시면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사역을 했지만, 제자들은 풍랑 앞에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처럼 피곤했지만, 풍랑이 더 무서웠습니다. 풍랑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한 행동은 고요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잠에서 깨신 예수님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였습니다. 이 말을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역해오신 일들을 알기에 한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자들을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나고 있는 풍랑 앞에는 두려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공포를 극복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한 행동은 예수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런 후 제자들은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쉽게 읽고 있지만, 제자들로서는 긴박한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사역하신 것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으로 인해 예수님의 권세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루실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공포가 더 두려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자들은 편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자포자기하는 가운데 잠들어 계신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후 제자들이 믿음 없는 것을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먼저 책망을 하셨습니다. 풍랑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이 책망은 더 깊이 마음에 새길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는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인지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바다를 꾸짖으시며 자연 세계에 대한 주권적 통제력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 세계를 다스리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자연이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당신님은 메시야이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예수님이 너무하신 것 같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바다가 나를 삼키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누가 죽음 앞에 담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본문의 흐름을 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보다 교훈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사랑하시기에 긍휼한 마음으로 교훈하고자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제자들과 함께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부터는 이 세상에서 성육신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몸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훈련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산상수훈과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직접 경험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죽음에서 영생으로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읽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가 고문당할 때 그들은 도망쳤습니다. 도망만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안 후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상명령을 감당했습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잠재한 불신앙이 있습니다.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믿음이 불완전했기 때문입니다. 환경에 지배받고 있는 제자들은 미성숙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며 가르쳐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제자들과 같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데 풍랑과 같은 세상은 나를 시험하며 자포자기 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수록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인생은 험난한 골짜기를 걷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힘듭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순결성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를 주셨습니다. 세상의 기도와 다른 기도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복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신에게 기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여 주시며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을 믿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기에 이제는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자연이 예수님께 순종하듯이 우리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제자들만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27절을 보시면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입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배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를 아는 사람들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것으로 멈춰서는 안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은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만 그랬습니까?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자들 즉 종교지도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자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제자들처럼 될 수 있고, 종교지도자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랍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의 신분과 권세가 사람을 초월하는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잘 알고 있는 어부인 베드로는 이 사건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는 세계는 힘과 권세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야 나의 삶이 편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따라가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주일도 그렇습니다. 주일에 집에서 휴식하든가 아니면 놀러 가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보다 나의 삶을 내 방식대로 생활하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처럼 제자들과 같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는 소리를 우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를 긍휼히 여겼던 것처럼 우리도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은 요동치며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 세계를 통치하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계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요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처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사랑하기에 삶으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자연을 순종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의 길을 가는 지팡이 교회는 행복한 성도입니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순종의 길을 가기를 소망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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