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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약1:17-27
강설날짜 2017-01-01

제가 가끔 물어보는 질문인데, 오늘도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만일 오늘 밤에, 아니 지금 이 자리에 핵폭탄이 떨어져서 죽는다면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어떻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는 다니는데, 행동은 제 멋대로 하며 죄를 짓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전에 어느 큰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이 한 집사와 남편이 집에 없는 낮에 불륜을 저지르다가 예정에 없던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려서 숨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손에 힘이 풀려 떨어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천국에 갔을까요, 못 갔을까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만, 행동은 제 멋대로 사는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럼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요? 행동도 천국 가는데 필요한 것인가요? 글쎄, 이후에 그 분을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 야고보서를 본문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혹시 야고보서를 누가 썼는지 아시나요? 예, 야고보가 썼습니다. 그럼, 어떤 야고보가 썼을까요? 예수님의 12 제자 중의 하나이며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세 명의 수제자 중의 하나이며,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저 순교당한 그 야고보일까요? 아닙니다. 그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이후 회심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결국은 예루살렘에서 순교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첫 번째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쓴 유일한 편지가 바로 야고보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66권 중에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책 중의 하나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야박한 편이었습니다. 심지어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야고보서는 무시를 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야고보서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오히려 야고보서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의 신부 겸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34살의 젊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 10월의 마지막 주일에 비텐베르크 대학교회의 정문 게시판에 당시 부패한 천주교에 대해 95개조의 문제점을 게시한 것을 기점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당시 루터는 천주교를 떠날 생각이 없었지만, 그러나 천주교회가 잘못된 점을 고치고 개혁하는 대신 개혁의 목소리를 탄압하면서 그 결과로 오늘날의 개신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혹 천주교회는 큰 집이고 개신교회는 큰 집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개신교회는 천주교회가 원래 성경의 가르침에서 떠나 타락하였기 때문에 원래대로의 성경의 가르침,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한 바른 교회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원래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법학을 공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좋은 직업이라고 추천한 것입니다. 그는 20대 초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서 천둥 벼락이 치는 가운데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음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그 곳에서 죽음의 문제를 대면하며 큰 충격을 받은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학공부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으면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가지게 된 원죄를 사해 주시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도 세상에 살면서 자신이 지은 자범죄(스스로 지은 죄)는 선행으로만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금식도 많이 하고 고행하면서 수도하고, 또한 선행을 많이 베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루터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선행을 충분히 했다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공부를 마치고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지만 그의 고민은 계속되었습니다.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러한 불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자신의 공로가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던 중 루터는 로마를 방문하게 됩니다.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 가면 계단성당이라는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에게는 믿음이 좋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가 자기 아들 황제에게 부탁해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계단을 로마로 옮겨서 그 계단을 가운데 두고 성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계단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루터도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무릎은 아팠지만, 그래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계단, 한 계단 기어서 올라갔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로마서 1:17절의 말씀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결국 사람은 자기가 쌓은 어떤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진리를 통해서 당시 천주교회를 바라보니까, 천주교회가 행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너무 성경말씀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면죄부였습니다. 면죄부라는 것은 구원을 받을 만큼 많은 선행을 쌓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행을 사는 것입니다. 당시 천주교회는 축성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신앙이 좋고 기적을 베풀거나 순교 등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을 성자(saints)로 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자 같은 훌륭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많은 선행을 쌓았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고도 선행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 가기에 선행이 모자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필요한 만큼 그 선행을 사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천주교회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 성자들의 남은 선행을 팔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면죄부입니다.

또 천주교회는 천국과 지옥 외에 연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선행을 충분히 쌓지 못한 사람은 연옥에서 고통을 겪으며 충분한 공덕을 쌓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도 누군가 그들을 위해서 돈을 내면 금화소리가 헌금함에 딸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그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가르쳤습니다. 네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이 연옥에서 고통당하고 있으니 어서 돈을 내서 그들을 천국으로 보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면죄부는 겉으로 드러난 많은 문제들의 하나였을 뿐, 당시 천주교회에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직을 돈으로 사고팔았고, 온갖 부정과 부패, 성적인 타락이 판을 쳤습니다. 교회가 권력을 잡고 교회에 돈이 모이게 되자 신앙심이 아니라 출세를 위해 사제가 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교회가 커지고 부유하게 되면서 비슷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당시 로마 천주교회의 문제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위배되는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 그리고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입니다. 루터는 이런 잘못들을 95개 조항으로 요약해서, 1517년 10월의 마지막 주일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 게시판에 걸었습니다. 성경과 복음 진리에서 멀어져 있는 당시 교회를 향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공개적으로 토론해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에서 바른 진리, 바른 복음을 듣고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종교개혁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내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천주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누리는 것, 기뻐하는 것이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세 수도사로 유명한 성 버나드 같은 사람도 그래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눈을 질끈 감고 외면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몸을 괴롭힘으로 인해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괴롭히는 고행과 수행을 통해 의로워지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한 것입니다.

 

어느 날 비교종교학자들이 종교들 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있는 자리에 C. S. 루이스가 우연히 들어갔다고 합니다. 마침 잘 왔다며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C. S.루이스는 “은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은혜”입니다.

 

개신교회의 문제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개신교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구원관 때문에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다보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둔감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칭송을 듣는 대신 욕을 먹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늘 말씀을 통해 익히 들었다시피, 악한 세상을 지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구원의 화려한 투구만을 쓰고 있을 뿐, 나머지 모습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구원 받았고 너는 멸망의 자식들이라고 세상 사람들을 깔보며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사랑도 없고 정직하지도 못하게 사니까 세상의 비웃음을 사는 것입니다. 어쩌다 교회와 성도들이 이렇게 되었나요? 예, 교회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만 강조하고, 진실한 믿음에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값싼 은혜"만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그의 심령에 복음의 말씀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새롭게 명하신 율법의 말씀이 천국의 씨앗처럼 심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완성은 물론 주님의 재림과도 관련되지만, 무엇보다 그 구원의 말씀을 받은 사람 자신이 그의 마음에 심긴 그 말씀을 과연 온유함으로 받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말씀을 따른 행함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의 세속적 정욕의 지배를 받으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 말뿐인 믿음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신학의 길을 들어서서 공부를 하며 때론 고민하고 몸부림치던 일들이 진정 바른 삶을 위해 바른 길을 찾는 일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어쩌면 조금씩 희석되어가는 자신을 봅니다.

사람의 눈을 가졌기에 때론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또 다른 한 가지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신학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진정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사르는 그런 일이길 바라며 부딪히며 싸워왔던 그 길 또한 돌이켜보니 낯 뜨거운 모습들뿐입니다.

이제 곧 지천명을 바라보며 그저 바라는 것 있다면, 나의 삶, 그리고 나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설 그 날에 내 인생 한낱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일 뿐입니다.

믿음과 행함, 보이지 않는 그 연속성, 분명 말할 수 있는 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말씀은 단지 연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죽어버린 우리 자신과 세상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읽어 치유 받고, 살아나고, 회복되는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말씀을 이해한 것도 해석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특히 야고보서는 중요합니다. 야고보서는 값싼 은혜론에 빠진 사람들에게 믿음에 합당한 삶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로마서를 통해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깨달은 루터는 야고보가 바울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며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인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어떠한 행함도 필요 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한 바울에 반박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루터의 오해였습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고 자신의 독일어 번역 성경 초판에서 야고보서를 빼버리기까지 한 루터는 야고보서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가 명확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고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한편 칼뱅은 결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칼뱅은 그의 기독교강요 3권 2장 8항에서, 믿음은 아버지께서 제안하시고 칭의와 죄의 용서 및 평화를 위할 뿐 아니라 생수의 기반으로(요7:38), 성화를 위해(고전 1:30) 제안하신 분으로 그리스도를 수용하기 때문에(요6:29) 누구도 성령의 성화를 동시에 수용함이 없이 그분을 올바로 알지 못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구성하지만 그분은 성령의 성화를 동시에 수용함이 없이 그분을 올바로 알지 못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경건한 애정(affectu)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의 시편 주석에서 시119:43 을 통하여 이를 밝힙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다.”

 

결국 야고보서에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는 반드시 삶의 변화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세상의 권세를 잡은 마귀의 종으로 살아 왔다는 것, 내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죄를 회개하고 내가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반대 방향으로 가기로 결심하는 것이 회개이며, 그렇게 한 사람이 중생(born-again)한 것입니다. 곧 예전의 나는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그것을 중생, 즉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삶의 모습은 전혀 변화가 없다면, 삶의 목적이 여전히 예수 믿기 이전과 똑같다면 그것은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조하다 보니, 삶의 변화가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기가 너무 쉬워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너무 닮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주어진 율법만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미신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오늘날 우리도 그런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나와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만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부르는 것들 - 예배, 기도, 헌금, 교회봉사만 열심히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만약 그렇다면 오늘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예수 믿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분이 계신다면 이 세상이나 장차 오는 세상이나 모두 천국입니다. 그저 예수 믿고 건강의 복, 물질의 복, 자녀의 복을 받는 것을 복음이라고 말하면, 그런 복을 받지 못한 신자들은 예수님을 잘못 믿은 것이 됩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받은 복들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할 때, 그렇게 해서 받은 복들보다 예수님의 뜻을 더 좇아야 할 때, 그런 복들을 쉽게 놓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은 목적이 그런 복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받은 복들을 내어 놓아야할 때, 그런 신앙은 좌초하고 말게 됩니다. 목적과 결과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누워서 침뱉기'같은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 집안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차라리 남의 얘기하는 것보다 속은 편합니다. 저는 지금, 신학을 공부하더니 신앙을 잃어버린 목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글쎄, 왜냐하면 저는 아직 한 번도 이런 복을 누려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A. W. 토저 목사의 말씀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성경의 교훈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분명한 교훈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일에 실패했다는 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화되고 그리스도를 진정한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해야 한다. 입으로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것과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별개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지식은 쓸모없을 뿐 아니라, 때로 악합니다.

신앙은 일상입니다. 어쩌면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내가 먹고 쓸 것을 얻는 일뿐 아니라, 남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주는 문제들과 관련된 일입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합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경건하다고 생각하며"를 "considers himself religious"라고 번역했습니다.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종교는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종교생활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진정한 경건은 무엇이라고요? 세상을 향해서는 약자들을 돌보고, 자신을 행해서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는 21절에 나옵니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영어성경이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Therefore, get rid of all moral filth and the evil that is so prevalent and humbly accept the word planted in you, which can save you." 이 세상에 가득한, prevalent한 도덕적인 더러운 것들과 악한 일들을 get rid of, 제거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말씀을 받고 그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는, 행함이라는 열매입니다. 누가복음 6:43~4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구원은 단순히 말로 고백할 때가 아닌, 마음으로 이를 믿고 그 결과로 입이 그러한 믿음을 고백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마음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여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인(印)치심을 받고 새로운 본성을 갖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러한 새로운 본성은,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살아갈 때 열매를 맺게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열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모든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선하시며, 오래 참으시고, 온유하시고, 사랑하시며, 신실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우리가 아버지를 닮은 성품을 나타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롬 12:1~2).

가끔 자녀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지 않습니까? 심지어 걸어가는 뒷모습까지도 비슷합니다. 자녀이므로 우리를 닮고,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 안에 거하는 하나님을 닮고 반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므로, 하나님을 닮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것이며 그가 행하는 일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를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또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을 구원해주신 것입니다(엡 1:3 ~ 14).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함이 믿음과 구원의 선행 조건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러한 행함은 진정 믿음과 구원의 결과인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가 말하듯 진정 죽은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주 준엄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누가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외치는 자는 또한 이를 반드시 의미 있게 생각하여야 하며, 그 믿음을 열매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도 때로는 심각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의도적으로 그런 실수들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발견하고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는 것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고치려고 몸부림치며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지만, 아마도 그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닐 것입니다.

 

기초 돌이 되는 복음,'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라는 복음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종교라는 모래 위에 서있는 옛 성전을 허물고 영원한 반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지어져갈 때 적실한 복음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이제 다시 한 번 여쭤봅니다.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삶 가운데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놀랍고 커서, 내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있고, 그래서 내 삶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경건하게 살려는 마음이 내 안에 있습니까? 진정 성령의 열매들이 내 삶 가운데 맺혀지고 있습니까?

내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전보다 더 부드러워지고, 더 너그러워졌습니까? 더 충성스럽고 성실해졌습니까? 그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은혜 속에서 변화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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