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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7:22-27
강설날짜 2017-03-05

두 번째 고난 예고와 성전세를 내시다(마17:22-27)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하심으로 그들로부터 “주는(원문은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고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당신님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저번 주 강설인 “귀신 들린 아이의 고치심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과 나”를 통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변화산에서 당신님의 신적인 영광을 드러내시고, 남은 제자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근 실망을 하면서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오시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고 하시면서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합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감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귀신이 들렸던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은 아주 작은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하나님 나라의 증시를 위해서 나는 할 수 없으나, 당신님은 할 수 있다는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제자로 성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도 같은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두 번째 고난의 예고와 성전세를 내시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도 제자들이 믿음이 연약한 가운데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두 번째로 예고하심으로 “인자”라는 호징을 사용하십니다. 인자라는 표현을 하심으로 메시야이신 당신님께서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당신님의 호칭을 인자라고 하심으로 겸손한 인성과 영광스러운 신성을 적절하게 연결시킵니다. 마태는 오늘 말씀을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비밀이 숨어있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세세한 조각으로 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22.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당신님의 첫 번째 고난을 예고하신 것과 같이 오늘 말씀에서도 두 번째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고난 예고 중에서 오늘 말씀이 가장 짧은 구절이기도 합니다.(마지막 하나는 마20:17-19)

 

그러면 예수님은 두 번째 당신님의 고난을 알리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다시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의도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막9:30절 말씀으로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사망을 한 후 부활의 영광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눅9:44절의 말씀을 보면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마태는 세 번에 걸쳐 기록을 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과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믿으면서 귀에 담아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라는 표현을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군인 그리고 가룟 유다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마26:25절에서는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라고 하심으로 당신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으신다는 의미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단지 사람의 손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23절을 다시 보시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무엇입니까?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제삼일’에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운명이 절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영광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담아 들어야’하는데도 성경적인 흐름을 보면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을 하면서 기대하고 있던 중에, 예수님의 두 번째 고난의 예고를 듣자마자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하여 제자인 자신들에게 고난과 죽음이 미치게 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부활에 대한 소중한 말씀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을 기억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바른 신앙을 고백 한 것과 귀신 들린 아이의 고치심에 드러난 믿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막9:32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오늘 말씀의 강설 제목인 ‘두 번째 고난 예고’의 풍성한 말씀의 은혜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제자들처럼 두려워하시겠습니까? 자신의 십자가를 감당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의 믿음이 연약한 가운데 예수님은 ‘성전세’를 통해서 제자들과 당신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시고자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한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적인 교회를 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전세’를 통하여 18장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성전세를 통해서 공동체적인 신앙 생활하는 교회는 겸손과 순결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장의 첫 시작에서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누군가 하면서 제자들이 다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가 큰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겸손과 순결 그리고 사랑이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당신님이 가셔야 하는 길을 가르치면서 가버나움에 도착을 했습니다. 가버나움하면 무엇이 떠 오르십니까? 베드로의 집이 있던 장소였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곳이였고, 베드로의 장모도 고치시기도 한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성전세를 거두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질문을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20세 이상이 되면 성전세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자부심을 잘 드러내는 것이 성전세를 내는 것이고, 그것으로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유지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성전세를 내는 근거는 출30:11-16절로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속받은 것에 대한 예물이었습니다. 구약으로부터 계속해 오던 것을 예수님 당시에도 말씀에 근거하여 ‘반 세겔’로 일반 노동자의 이틀의 월급을 내었습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의 질문에 베드로는 25a절에서 “이르되 내신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면 될 것을 베드로에게 하는 이유는 당시에는 유명한 선생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왔을 때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십니다. 25b절입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관세는 시장세와 물품세 그리고 통관세를 말하는 것이고, 국세는 토지세와 인두세를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 질문을 받으면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 선택은 우리들도 같은 마음으로 ‘타인’이라고 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임금이 자신의 아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니 관세와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타인은 내 아들이 아니니 거둘 필요는 없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역시 베드로도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26a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은 들은 후 26b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왕의 아들이 세를 내지 아니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아들들’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단수인 ‘아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에게만 적용될 것입니다. 복수를 사용하는 것은 특수한 뜻을 전달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보내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가리키고자 아들들이라고 사용한 것 같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해석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게 넘기어져 죽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당신님에게 속한 백성들의 죄와 사망을 같이 대신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성전세를 내면서 자신의 죄와 사망을 감당해야 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으로 바칠 의무에서 자유하게 된 것으로 선언되어진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통하여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으로 구원하여 주실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백성을 위해서 죄와 사망의 값을 치르심으로 우리는 자유함을 얻게 된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국가적인 면에서는 율법을 준수하여 성전세를 내시지만, 그것을 통하여 당신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더 이상 혼돈하지 아니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27절을 보시면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시기 위해서 아주 특이한 방법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바다에 가서 낚시로 낚은 물고기의 입에서 얻은 ‘한 세겔’로 나와 너를 위해서 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큰 표징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마12:6절의 말씀도 보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성전보다 더 크신 이가 바로 나라는 것을 성전세를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신적인 능력과 권능으로 세금을 내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시는 것도 있지만, 겸손한 인성과 영광스러운 신성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아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아직도 이해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통하여 가르치시고자 하는 의도는 먼 훗날 부활과 성령강림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오”라는 말씀을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하는 제자들과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들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참된 신앙의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삶이 뒤따르지 않는 것이 비단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바로 나에게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어 주신 말씀으로 당신님의 정체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참 구원자로 진실 되게 믿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실족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이루신 교회를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당신님을 ’인자‘로 표현하신 것과 같이 겸손과 순결 그리고 사랑을 다시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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