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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3:1-12(4절부터 12절 중심으로)
강설날짜 2020-12-20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MlnU80t2M34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후 유대인의 반응(마3:1-12)

 

 

지팡이 교회는 마태복음을 강설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을 읽고자 하는 신자들이 대체로 가장 먼저 읽는 것이 마태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태복음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첫 시작은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를 잘 질문하고 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마태는 예수님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여 행하신 사역과 가르침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 겪으신 것도 기록했습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이셨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바로 우리 즉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향해 삶의 예배를 하는 지팡이 교회는 귀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면 누구나 경배와 찬양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헤롯과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과 자신의 부를 좋아했습니다. 동방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탄생한 지역이 종교지도자들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 아니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과 반대로 헤롯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권력이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최악의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동방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두 살 아래 남자아이를 모두 죽였습니다. 헤롯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주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안전하게 보호하였습니다. 헤롯은 사망한 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 지방에 정착하여 사시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고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준비하신 사역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사도 요한이 아닌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을 향해 외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회개하라”입니다. 그리고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요 외침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으니 회개하고 맞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을 위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세례 요한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약속이 이제 실현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들었던 음성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마태는 기록했습니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통해 준비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광야와 같이 황폐한 너의 심령에 찾아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음의 길을 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평탄한 대로를 마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으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은 엘리야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세례 요한의 이런 모습은 장차 엘리야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태가 기록한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 유대인 독자들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은 구약에서 외친 선지자들을 떠 올리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때가 왔으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이어서 오늘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후 유대인의 반응”이라는 강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주라면 오늘은 소개를 들은 이스라엘의 반응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면 그렇지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의 음성을 듣고 죄를 자복하며 요단강에서 무엇을 했다고 기록합니까? 5절과 6절을 보시면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새로운 생명으로 생활하기 위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메시지는 거주지로부터 광야와 요단강으로 불러내었습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역사가인 요세푸스도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많은 사람이 나아와 끊임없이 죄를 자복하며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와 그리고 그 이전에 물에 담그거나 씻는 의식이 없었는가?입니다. 물을 사용하는 의식은 여러 문화 가운데서 다양한 형태로 있었습니다. 물을 사용한 이유는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례 요한이 사용한 세례는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교도들이 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염색에 담긴 천이 그 색깔을 취하게 되는 것처럼 새 신자를 물에 담그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에 대한 응답이요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표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회개하는 가운데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회개가 진실하다는 것을 삶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였습니까? 회개는 진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겉모양으로 하는 회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준다는 이야기는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단강에 왔습니다. 그럴 때 세례 요한이 7절에서 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많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오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은 그 당시의 현실을 잘 반영하는 욕을 하였습니다. 그 음성은 “독사의 자식들아”였습니다. 그리고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은 이런 욕을 한 것입니까?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지 아니하며 지도자의 탈을 쓴 사악한 자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자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야먕과 권력을 좋아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에게 온 것입니까? 그것은 세례 요한의 정체를 알고자 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러 오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돌이킬 기회를 주고자 한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사들을 생각하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연상하며 너희들이 저주받은 백성과 같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독사의 자식들은 사탄의 후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 회개하고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임박한 진노에서 회개하고 참된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8절에서 세례 요한은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진정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회개는 일시적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기도하며 거룩한 척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형식적으로 기도하여 구원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모님에게 형식적으로 효도하면 좋은 것입니까? 마음에 진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큰 가르침이 되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9절에서 세례 요한은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하는 마음을 간파하며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종교지도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선천적으로 자신들은 거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자동적으로 보호하여 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위석입니다. 종교적 특권은 없습니다. 기독교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 구원받지 않습니다. 마치 종교지도자들과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도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종교지도자라고 한없이 외쳐도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한 후에 세례 요한은 10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심판을 나타내는 도구로 불을 사용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왜 세례 요한은 은유를 사용하여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한 것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의 위선 그리고 침되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향한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가지나 줄기를 다듬는 정도로 끝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뿌리째 파헤치고 줄기를 잘라버림으로써 나물을 완전히 제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참되게 믿었다면 어떻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성경을 가지고 많은 강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강설을 들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통해 회개하며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성장을 위한 위선적인 설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위선적이고 바르지 않는 설교는 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신분을 알려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메시야의 진노가 임박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손에 잡힐 듯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심판도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하나님 나라와 심판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 믿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변화는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신자입니다. 인생의 삶이 나로부터 예수님께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에게는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회개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도록 교회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추종하지 않게 하려고 누구를 소개하고 있습니까? 자신보다 더 높으시고 귀하신 누구를 소개하고 있습니까? 11절을 보시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강력한 메시야를 기대하며 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세례 요한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메시야를 비교했습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메시야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역보다 메시야는 높고 거룩하시며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진정한 선지자요 복음을 전하는 증인 자입니다.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비천한 노예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진정한 사역자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날 어떤 분들은 자신을 섬기도록 합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은 힘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전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사기꾼에 속아 자신의 재산까지 탕진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요. 이런 시대에 참된 복음이 증거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한 것입니까? 이것을 오해하는 분들은 성령 세례가 있고, 불 세례도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 마치 불과 같이 이중적인 역할을 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불이라고 하는 것은 더럽고 불순한 것을 태워 제거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정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결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죄와 더러움을 불사르듯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불사르듯 정결케 하여 주실 것을 성령과 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이라는 것은 종말론적인 예수님의 사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종말이 왔으니 어서 세례를 받고 구원받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주신 당신님의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외면하면 어떠한 결과가 있겠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은 인류의 종말이 있을 때를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여 알곡은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신다는 표현입니다. 쉽게 말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지옥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요 신자인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에 속한 삶을 생활한 자들은 영원한 지옥에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추수하는 모습을 통해 구원과 심판을 전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씀을 읽고 있는 그 당시 독자들은 생생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과 연결된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나무뿌리 위에 놓여 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력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쉽게 읽고 있지만, 마태가 전하고 있는 원 독자들은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다르게 정리하셔도 됩니다. 각자 의미 있는 말씀을 생각하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주님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메시야를 소개받은 유대인들은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일부는 진실한 마음으로 세례받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의 소리를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광야로 갔습니다. 광야로 간 이유는 요한의 정체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가까지 왔을 때 들었던 소리는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독사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가장 경건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며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도 기회입니다. 기회가 없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은 특히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를 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군원 받기를 원했습니다. 행위로만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그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만 중요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은 후 세상이 좋아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행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결코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회개와 죄 사함을 말하면서도 행위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를 믿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소개한 메시야를 믿어야 합니다. 이 길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요 생명입니다.

 

 

세례 요한은 임박한 종말을 전하였습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인류의 종말이면서도 새로운 시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으로 주어진 나라입니다. 이것은 교회론에서 강설로 들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기억하고 싶은 분들은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십시오. 지팡이 교회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임박한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속으로 아브라함으로 자손이라고 생각하며 구원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 자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종교지도자들처럼 거룩하게 보일 수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겸손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만 존재하도록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받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였습니다. 죄의 용서를 얻게 하는 길을 예비하는 사역자였습니다. 죄의 용서는 뒤에 오시는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성령의 사역이 불과 같이 이중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어졌습니다. 나는 알곡입니까? 쭉정이입니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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