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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1-12
강설날짜 2020-12-27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z_9FrQ4Cwzk

성탄절 주인공은 예수님 그러나 현실은 ........이런 시대에 기독교의 정신(마2:1-12)

 

성탄절 전날 저는 차이나는 클래스를 시청했습니다. 저와 약간의 차이점은 있지만, 교수님의 강의를 시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차이나는 클래스를 시청하는 가운데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탄절과 산타클로스는 관계가 있는가?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론은 X입니다.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산타클로스와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산타는 기독교와 관계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산타는 오히려 기독교 즉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멀어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의 상징 산타클로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을 강설로 들었기 때문에 알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언제나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로마는 예수님만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세상에 복음이 심어지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지상명령을 생각하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와 이방인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수를 포기할 것”, “이웃의 짐을 질 것”, “재물을 가난한 자와 나눌 것”, “원수를 사랑할 것” 등 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세상에 감추어진 어둠이 아니라 빛입니다. 빛은 감출 수 없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빛처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교회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초기 기독교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당시에 혁명적인 가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들은 세상에 복음이 심어지도록 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300년 만에 로마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되리라 생각했겠습니까? 기독교가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처럼 타락한 시대에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로마 시대에 복음이 종교로 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삶이었습니다. 로마 시대는 “눈앞에 폭력이 난무하며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세상 사람과 달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복음의 증인 자요 교회요 성도입니다. 신분이 달라도 교회 안에서는 서로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하나의 교회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신분이 달라도 주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예가 승동교회입니다.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백정이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박성춘이라는 백정이었지만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선조 임금의 11대손 왕손인 이재형이 다니는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신분의 차별이 있는 시대에 장로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분을 넘어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처럼 로마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신분과 계급 사회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새로운 관계가 될 수 있도록 교회는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가운데 네로 황제는 기독교 신자들을 탄압했습니다. 경기장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이러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성장하였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며 지팡이 교회도 참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며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참된 복음을 전할 때 로마는 주후 313년 기독교를 종교로 공인했습니다. 그때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였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주후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승인했습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는 금과 같이 순결성과 변질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그럴 때 혁명과 같은 새로운 시대를 열도록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회사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로마 제국이 십자가를 사용해 죽였던 예수님을 국가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탄압을 넘어 기독교인들을 죽이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로마는 복음으로 무너졌습니다.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코로나 19의 시대처럼 로마에도 전염병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것처럼 그때도 같았습니다. 로마는 전염병으로 하루에 2천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전염병으로 오백만 명이 사망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가장 참혹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죽음의 공포만 남아 폐허가 된 로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병 앞에 사람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때 기독교는 예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가를 삶으로 생활하며 보여주었습니다. 병에 걸린 가족을 구덩이에 내다 버리기도 하던 시대에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위험을 무릅쓴 자”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얻은 별명이었습니다. 왜 이런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까? 여기에 초기 기독교의 모습 즉 예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환자들에게 물과 음식을 공급”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절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생각했습니다. 환자들의 병이 회복될 수 있도록 교회인 신자들은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같은 전염병에 걸릴 수 있었음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삼 분의 이로 급감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그것만이 아니라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고아와 과부 등을 섬기었습니다.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의 삶을 피부로 느끼며 결국 국교로 삼았던 것입니다. 나라가 하지 못한 일들을 기독교는 했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기독교는 참사랑을 상실해가며 타락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께서 보여주신 기독교의 정신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 그리고 특정한 절기만 중요시하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모든 날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절기에는 주일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종교개혁 시대에는 절기가 없었습니다. 또한, 헌금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거룩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즉 삶으로 이웃에게 참된 복음을 전하며 생활했습니다. 목회자는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삶에서 신앙 생활할 수 있도록 섬기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개혁의 신앙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개혁된 교회는 향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늘 리폼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은 진리 안에서 늘 개혁해 나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우리도 진리 안에서 세상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돌이킬 수 있도록 교회는 늘 리폼 해야 합니다.

 

김효남 목사님의 글을 잠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다시 교회의 예배당은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다. 온갖 장식과 문구가 교회를 가득 채운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조명과 꽃들이 교회를 꾸민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닫기에 도움이 된다며 얼마든지 허용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치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치우느냐 꾸미느냐가 아니다. 어느 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진리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참되게 가르치느냐에 어떤 것이 더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외적인 행위에는 반드시 신학적인 기반이 있어야 한다. 절기도 마찬가지다. 16,17세기 개혁파 선조들이 절기를 금지한 것은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모든 날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여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이다. 하지만 로마카톨릭은 거룩한 날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성속을 구분하였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절기는 특별한 주님의 날이지만, 그 외의 날은 우리의 날, 인간의 날이 된다. 그러므로 이 구분을 없애는 것은 당시 성도들의 신앙적인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절기를 없애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날의 주인이시며,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기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팡이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로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인데도 불구하고 예배당 안에 산타와 트리로 장식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성장을 위해 교회 밖의 것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볼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산타는 상업하는 분들이 장사를 위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산타클로스의 복장은 1931년 코카콜라 광고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결국 교회당에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교회당 안에 형상과 성화 등이 없도록 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며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이상한 것들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으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 성도님 성탄절이 되면 대체로 동방 박사들 이야기, 목자들 등을 선택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강설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거룩한 밤 고요한 밤 등을 찬양하며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마구간으로 갔습니까? 어떤 교회에서 저는 동방 박사들이 마구간에서 세 가지 예물을 가지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형상을 보았습니다. 과연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 것입니까? 알고 있으면서도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자는 교사로서 성경을 최대한 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잘못 전했다는 것을 알았으며 수정하여 전 해야 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지만, 성경은 마구간이라고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구간도 가능한 추리가 아닙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차분하게 읽으면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마2:11절을 보시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여기서 아기란 갓난아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난 아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구간이 아닌 사람이 생활하는 하우스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께서 탄생한 나이를 추측하여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죽였습니다. 갓난아이라면 한 살 아래 아이를 죽였을 것입니다. 헤롯은 동방 박사들에게 질문한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그 별이 나타난 때가 언제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며 살해한 것입니다. 자신의 보좌를 위해 두 살 아래를 잔인하게 살해한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을 하지 않도록 목회자는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자신의 분야에서 성경 강해와 주석을 집필하며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생명도 십자가에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성공신학, 번영신학, 맘몬주의 등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마치 알라딘의 램프를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의 종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 기독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 가장 정점이 되는 것 즉 가장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뉩니다. 그리고 서방교회는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르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이 가장 타락했을 때 개신교는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대로 교회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교회를 회복한다는 것은 참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복을 받고 산다든지 마치 부처처럼 깨닫고 삶과 죽음을 초월함으로써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후에 좋은 곳으로 갈 거야 하며 믿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극락의 세계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되게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로 생각하며 생활하는 성도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삶의 예배를 하고 있는가?입니다. 중요한 문제를 질문한 것입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서 삶의 예배를 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이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성도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을 통해 강설로 들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더 쉽게 이해되리라 믿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면 본문과 강설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동방 박사들은 왕이신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탄절이면 세상 사람도 이렇게 아는 분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였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이었습니다. 때가 차매 약속하신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누가 예수님께 경배하러 와야 합니까? 종교지도자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자신의 목숨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먼 지역으로 왔습니다. 먼 지역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처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 많은 서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를 이해했기 때문에 별을 따라 경배하러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동방 박사들은 확고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문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을 연구해 오던 중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 박사들이 지식의 한계성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지식의 한계성 안에서 발견한 별은 신비한 별이었습니다. 하여튼, 별에 인도를 받으며 간 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지금까지 여행해 왔던 모든 것의 희로애락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기쁨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이 한 것은 경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상 가운데서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과 하나님 간의 특수한 언약 관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별을 보며 경배하러 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바르게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경배하러 왔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고 운영하시며 통치와 보호하시는 메시야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에 산타가 예배당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산타와 함께 성탄절을 보낸다고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오심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 나라 등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탄절을 보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열매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만 믿으면 행복 시작입니까?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육신으로 오셨을 때부터 마구간이었습니다. 마구간 이후부터는 고난과 죽음의 삶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감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악과 또한 인간의 암매와 죄의 오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형벌 때문에 발생한 여러 가지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죄지은 인생이 가지고 있는 사람의 취약성과 허약성을 그대로 취하시고 오셔서 당신님의 몸으로 친히 고난과 죽음 등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삶이 더 중요했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전하신 예수님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잘못도 있지만, 기독교 타락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왜 중요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거룩한 메시야 왕국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메시야 왕국을 믿는 지팡이 교회는 삶에서도 예수님과 같은 길과 진리요 생명을 따라야 합니다. 메시야 왕국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나라였습니다. 메시야 왕국은 예로부터 있어 온 하나님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속죄라는 역사상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여러 가지 신비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교회인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생활을 삶의 예배로 감당해야 합니다. 성탄절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기독교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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