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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5:65-6
강설날짜 2021-02-21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RML2UaGxwCk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5:5-6)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늘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맨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르치시고 강설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40일 동안 함께 하시면서도 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로 시작하여 하나님 나라로 마무리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은 받은 대로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시면 어떠한 생각이 드십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눅4:43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지상명령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교회의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는 기업과 같이 이익을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적과 기적 그리고 교훈과 강설 등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이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문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두 가지만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해 세워지고 성취되는 나라이지 사람이 설계하고 쟁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주권을 확립시켜 사람이 그 주권의 영역에 들어와 그 주권의 복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에 의해 쟁취되고 세워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왜나하면, 사람이 스스로 선행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에 의해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의해 세워지는 나라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오직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망한 후에만 가는 나라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강설하신 것입니다. 오직 미래에만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지상적으로 실현되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이기도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게서 오지만 이 세상을 위하여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사람에 의해 통제되고 통치되는 나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임할 수 있고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과업으로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가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고 해서 사람은 무책임한 존재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사람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변화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님에 의해 주어지고 지상에 임하는 초월적인 선물인 동시에 지금 이 세상에 성취되어야 하는 윤리적인 과제가 있기도 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산상수훈을 바르게 이해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지난 주일에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의 뜻을 아는가?”를 강설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치시기 위해서 “천국”이라는 단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복된 나라인지를 확인하고 강조하시기 위해 서론에서 9번 반복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없다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원하는 복 즉 물질, 권력, 행복한 삶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복이란 하나님 나라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 백성은 우리 안에서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이란 하나님 나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을 통해 소유한 우리는 복된 교회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축복의 내용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의 뜻을 알도록 강설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다른 강설이었습니다. 상식 밖의 강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상한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아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복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죄 많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영적 가난 때문에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이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천국은 우리의 것이며 위로를 받습니다.

 

 

오늘은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과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격이 급할 수 있고, 차분한 사람도 있습니다. 저마다 개성이 있습니다. 개성은 그 사람의 성격을 잘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온유한 자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사람이 타고난 성격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는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후천적으로 변화되어 온유한 자가 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인 성도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장하는 온유한 자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시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온유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며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도하여 기업을 차지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거듭난 성도는 허세를 부리지 아니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삶을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듭난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며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연약함이 아닐까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온유란 하나님 안에서 사람은 통제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백성은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온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시편 37편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 중에 11절을 보시면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37편에서 온유한 자란 억압과 박해 가운데서 인내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그들은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할 때 사람이 방법으로 대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갚아주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시면 대체로 탄원 시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강력한 힘이 있으나 자신을 통제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시편 37편에서 땅을 차지할 온유한 자들은 주님 앞에 잠잠하고 참고, 주님을 기다리는 자이며, 의인입니다. 스바냐 2장 3절에서는 겸손한 자들을 주님의 규례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하고, 그들에게 주님을 찾을 것과 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다윗과 같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다윗을 닮기보다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당신님을 닮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까? 먼저 다윗과 같은 마음이 되도록 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선대하시고, 심지어 당신님을 죽이려는 자들도 용서하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처럼 될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며 온유한 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될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심령이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될 때 온유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참되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성도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백성입니다. 우리는 영적 가난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기업을 주시는 이유는 사람이 그 땅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새롭게 “새 땅과 새 하늘”로 만드신 후 에덴 동산처럼 다시 성도를 통해 다스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한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땅이라는 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땅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여 주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받으며 에덴 동산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입니다. 그 나라를 생각하며 지팡이 교회는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6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예수님께서는 강설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입니까? 주리고 목마름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가장 강력한 욕구 아니겠습니까? 배고프면 먹으면 됩니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자와 배부른 것에 대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배고픔과 목마른 것은 단순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닙니다. 죽기 직전의 강력한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으로 간구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처음 시작을 ‘의에 주리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영적 가난이 무엇인지, 그들이 애통하는 원인지 무엇인지 하나님의 백성이 받은 위로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기업으로 받은 천국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것이 6절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가지지 못한 것이 바로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성도가 되면 의는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서 내어놓을 의가 없어서 가난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울 수가 없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탱할 수 없었고 살길이 막막하였던 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성도 즉 우리입니다. 의가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늘 애통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는 성도 아니겠습니까? 애통하며 슬퍼하며 우리는 항상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옳다고 여기시는 것을 너무나 사모하고 갈망하는 우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고픈 것이고 목마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입니다. 사람의 의로 주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주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의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아는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의를 향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며 애통하는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기초로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결과 죄인들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만 바라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복음으로 증거 하는 삶을 생활하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님을 사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듣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해 애통하며 의에 주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보며 성화 되어가는 것을 위해 목마른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측면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 주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배부르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시107:9절을 보시면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메시야가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메시야를 통해 우리는 채우심을 받은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누1:53절을 보시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공급하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으로 채워주심으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고 있습니까? 세상의 것을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도록 교회는 간구해야 합니다. 성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대한 죽을 듯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니겠습니까?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의의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 거룩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바라보며 의지해야 합니다. 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하여 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의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함이 있으며,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영혼이 가난한 성도는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의를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의로운 삶을 위해 우리는 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으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데가 있어서 그 부르신 소망대로 부르신 거룩한 경영대로 살아가는 교회이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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