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30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5:7-8
강설날짜 2021-02-28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sh7JN5KQdG4

긍휼히 여기는 자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이란?(마5:7-8)

 

“똥 먹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아십니까? 뉴스에 나온 사실이 이기에 더 기억하기 쉬울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똥을 교회 신자에게 먹인 사건입니다. 자신이 배설한 것도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똥을 먹이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끔찍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찾아보아도 이런 사건은 없습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똥을 먹인 사건은 듣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똥을 먹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똥을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추리를 해보면 지도자의 훈련 과정에 잘 길든 것 같습니다. 마치 “그루밍”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루밍은 호감을 얻은 후에 더 신뢰를 얻은 다음 자신의 속내를 채우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목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충성 경쟁을 하다 보니 결국 똥을 먹기도 한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서로 충성 경쟁을 하다 보니 마치 그루밍처럼 된 것 같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일부 교회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런 사건을 생각하면 이단과 무엇이 다를까 할 정도입니다. 144,000명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들은 교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믿고 따르는 자, 시키는 대로 하는 자”를 첨가하여 성경을 왜곡했습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삽입하여 자신들의 말을 잘 듣도록 했습니다. 자신들의 말을 잘 들어야 그리고 충성해야만 구원받는 숫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삼위일체만 아시는 구원의 무리를 어떻게 사람이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가는 신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제발 성경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알기 위해서 목사는 교사로서 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목사도 신자도 모두 주님의 종입니다. 서로 성도로서 주님의 종입니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자는 결코 구원과 멀어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 생활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기 위해 지팡이 교회는 지난주 강설을 다시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상수훈 중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를 강설로 배웠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설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때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이신 지상명령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알기에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거듭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아는 교회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회심합니다. 자신의 영적 가난을 생각하며 애통하며 의를 구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 가난에 영원히 있지 않도록 하시며 의를 얻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까?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선한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진정한 의는 나를 살리는 것이며 평온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선물을 사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늘 애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을 누리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동안 산상수훈 중 네 가지를 배웠습니다. 산상수훈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팔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인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잘 드러낸 것이 산상수훈 즉 팔복입니다. 지난주까지 배운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인 성도의 특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신자들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모습을 비추어 본 결과 생겨나는 자기 이해나 행동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들의 관계에 대한 것을 배운 것입니다. 오늘부터는 나머지 네 가지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배울 네 가지의 특성은 세상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신자들의 성품입니다. 어떠한 삶인지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산상수훈을 통해 알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긍휼히 여기는 자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이란” 강설을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신자들의 성품을 알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적 가난을 슬퍼하던 자가 그처럼 목마르게 바라던 의로 채움 받은 이후에 겪게 되는 변화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아무런 생각없이 생각하면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웃에게 선한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가를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선한 일을 했으니 하나님께서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 같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오해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강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참여한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엇을 바라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한 영향력으로 즉 공덕을 쌓았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원어에서 말하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참되게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또한, 나도 저들과 같이 과거에 같은 삶을 생활했던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만 중요하고 행동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지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공덕을 쌓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의 삶을 잘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외면하는 자들이었습니까?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씻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습니다. 성전의 일을 잘 감당하는 레위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르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레위인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마음과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의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가 사랑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의를 행할 때 즉 복음을 증거 하는 삶 속에서 주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긍휼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긍휼히 여기는 자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일관되게 증거 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잠25:21절을 보시면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애통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다른 것이 사랑입니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주님처럼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울분과 애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으로부터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성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복을 받은 자에게서 나오는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공덕을 쌓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구원으로 신자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긍휼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왜 이런 특권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진실한 신뢰의 마음으로 긍휼함을 받을 수 있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히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며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동정심으로 사랑의 긍휼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같은 과거의 모습을 보며 그 사람도 참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사랑입니다. 세상의 종교와 다른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고기를 먹어본 자만이 고기 맛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이는 신비입니다. 긍휼히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인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번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시24:1-6절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성가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24편을 들어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3절을 중요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입니다.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바다와 강의 기초 위에 땅을 세우사 땅과 그 안에 충만한 것, 곧 세계와 그 거민이 다 그의 소유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크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산에 누가 올라가며 그의 거룩한 임재의 장소에 누가 설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며 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청결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찾으며 그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마음과 행위를 깨끗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산과 성소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이기에 청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은 마음의 청결보다 외적인 의식을 통한 청결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한 이유도 이런 이유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외적으로 청결하면 하나님 앞에 청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외적인 것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데 깨끗할 수 있습니까? 외식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아는 자만이 오늘 본문을 이해할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지 않고 외식하는 자들은 회칠한 무덤 같은 자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마음이 청결한 성도이기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이 청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네가 청결해지고 싶어서 청결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해하도록 하심으로 나는 회개하고 회심함으로 청결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거듭난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을 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신자들의 최고 행복히며 최고의 소망입니다. 죄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으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는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시편24편 말씀처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십니다. 성전은 지상에 있는 집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잘 나타내는 장소가 성전입니다. 구약에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약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 즉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있도록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본다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내신 중요한 목적을 종합적으로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으로서 우리의 인식이 좀 더 명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복입니다.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만, 결국에는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날이 있습니다. 그날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만, 내세의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완전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감사며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들은 세상 사람도 인정합니다. 저 사람은 진실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신자들은 “저 사람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그랬고 서서평이 이런 평가를 받은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과 같은 삶을 생활한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에 많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 채움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청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이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부와 같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교회는 때때로 우리의 정절을 시험합니다. 조그마한 문제에서 어떤 성도는 돈을 의지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 외의 것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타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통곡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을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자신과 세상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265 안식일의 주인이 병자를 고치시다 전은덕 마12:9-14 2022-02-27 326
264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전은덕 마12:1-8 2022-02-20 427
263 예수님의 감사와 초청 전은덕 마11:25-30 2022-02-13 320
262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꼬 전은덕 마11:16-24 2022-02-06 376
261 성경이 말하는 성찬 전은덕 고전11:17-34 352
260 교회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전은덕 요4:1-26 333
259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전은덕 마5:1-10 294
258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와 교회 전은덕 마1:1, 16:13-20 315
257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전은덕 마11:7-15 2021-12-19 496
256 예수님과 세례 요한 그리고 제자 전은덕 마11:1-6 2021-12-12 344
255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전은덕 마10:34-42절 2021-12-05 339
254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라 전은덕 마10:24-33 2021-11-28 289
253 일꾼들은 미움을 받을 것이나... 전은덕 마10:16-23 2021-11-21 261
252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 자세 전은덕 마10:9-15 2021-11-14 337
251 열두 제자를 부르사 전은덕 마10:1-8 2021-11-07 342
250 목자 없는 양을 위해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전은덕 마9:32-38 2021-10-31 337
249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전은덕 마9:27-31 2021-10-24 337
248 예수님께서 관리의 딸과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 전은덕 마9:18-26) 2021-10-17 347
247 금식 논쟁보다 신랑이 함께 있을 동안에 전은덕 마9:14-17 2021-10-10 401
246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전은덕 마9:9-13 2021-10-03 33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