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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5:9-12
강설날짜 2021-03-07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xBuUhtt0xrQ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의 복 그리고 결론(마5:9-12)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복됨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주님께서 강설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됨이 있기에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한계와 위험을 아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의 한계와 위험을 알기에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산상수훈을 통해 강설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잘 아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빌4:13절을 보시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대로 하고 싶은 대로 생활하면 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주기도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문 중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뜻대로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정작 삶을 보면 어떠합니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은 계시지만, 나의 삶을 보면 어떠합니까? 나의 삶을 보면 모든 것을 결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나의 뜻대로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뜻대로 생활하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심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생활하는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은 산상수훈 즉 팔복을 가지고 있는 백성입니다. 팔복은 이 세상에 잘 먹고 잘 생활하기 위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에 대한 참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강설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임을 산상수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분들은 자유함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알아가는 교회는 산상수훈의 팔복을 누리는 성도입니다.

 

 

지난주 강설은 “긍휼히 여기는 자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이란?”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자신의 영적 가난을 슬퍼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며 마음이 청결한 성도가 될 수 있도록 해바라기처럼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여 주심으로 하나님 뜻대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좋아했던 마음에서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좋아하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삶은 나를 위한 열심이었다면 하나님 나라의 삶은 주님의 삶을 따라가는 성도입니다. 성도의 삶은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산상수훈의 팔복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나의 명예와 욕심 그리고 물질 등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삭개오와 마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삭개오는 세금을 걷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자신의 재산을 빈민구제에 쓰고 세리로서 토색 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통행세를 받는 세리였습니다. 또한 레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생활하는 복된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오늘은 “화평하게 하는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의 복 그리고 결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위해 구원받은 성도는 사랑과 성결을 추구하며 생활하는 가운데 한 가지 어려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화평 즉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는 삶 가운데 어려운 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야기를 하는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화평하게 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합니다. 9절을 보시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기에 화평을 깨뜨리는 자의 삶이었습니다. 내가 언제 그런 삶을 생활했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살인자였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삶을 위해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늘 화평한 삶을 만들어가는 생활이었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온전한 의를 지닐 수 없습니다. 온전한 화평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인 불교도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무소유를 주장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나로부터의 출발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교회는 과거의 삶과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화평을 경험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화평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산상수훈의 삶입니다. 화평한 삶을 위해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긍휼한 삶을 생활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한마음이 되기보다는 두 마음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마음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주님의 공동체로서 한마음 한뜻으로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는 성도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불어 화목하게 하는 성도입니다. 교회에서만 거룩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같은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성도의 삶입니다. 세상의 군자 또는 의인만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이기에 군자보다 의인보다 더 거룩해야 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족은 그래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며 화평하게 하는 삶은 어떠하겠습니까? 나를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하는 원수를 사랑하며 화평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을 배우며 강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성격을 선언해 나가실 때 먼저 외부의 기구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사람의 내부에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내부에 하나님 나라의 성격 즉 먹는 것,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이런 삶을 생활하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도 잘 알고 있는 “살롬”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살롬은 “너희에게 평안 즉 화평이 있을 지어다”라는 의미입니다. 살롬은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면 “안녕하세요”처럼 인사와 같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의미는 다릅니다. 나라마다 인사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살롬은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목민의 생활과 어려운 생활이 많았기 때문에 평안을 묻는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생존을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들 살롬이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존립을 위해서 평안 즉 화평히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살롬은 그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화평을 조성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교회 즉 성도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가운데 비보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코로나로 월세가 밀려 보증금을 다 깍아 먹고 망연자실한 개척교회의 비보였습니다. 사모 27세와 31세가 자살한 것으로 파악되는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두 가족 모두 경기 북부에서 개척하던 분들이었다고 합니다. 한 가족은 동남아에 나가기로 하고 2주전에 목사님이 현지 답사간 동안에 사모님이 자살하셨고, 또 다른 한 가족은 4살 아기가 있는데 전 재산이 12만 원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평신도선교단체에서 알고 어느 장로님께서 수목원에 장례 하도록 허락하셔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계속 주님의 교회를 위해 개척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살롬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 안에서 한마음과 한뜻이라고 하지만, 개척교회를 하는 저로서는 두 교회 목회자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두 교회가 어느 교단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평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살롬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의 장애와 괴로움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함으로 성령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여 줄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까지 내가 모든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믿도록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의미는 아버지를 닮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살롬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롬 즉 화평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심을 받는 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행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됨을 받았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의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저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되겠습니까? ‘저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지 모르겠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흉악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한없는 긍휼로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심으로 당신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사랑받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채움을 받아 그 영혼이 배부르며 시원함을 경험한 성도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와 같이 세상 사람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이번에 생각활 것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0절을 보시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팔복 가운데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있다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는데 왜 복입니까? 믿음을 지키려고 불이익을 당하며 박해를 받는 자는 복되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같은 삶을 생활하고 있는 가운데 당하는 박해입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행하기 때문에 핍박을 당해서 고통 하는 사람은 행복스러운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결국 그 사람의 것입니다.” 의를 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의로운 상태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로 주어진 의가 아니라 값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의를 행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 즉 지옥의 길로 가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과 화평케 하고자 애쓰는 자를 사랑하고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자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워하고 이용해 먹으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은 거룩함과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시민권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세상은 손해 보면서 긍휼을 베풀어 사랑하고 더불어 화평을 이루며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는 사명을 다하며 푸른초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물질이 풍요하고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질은 좋아지는 것 같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이것이 마귀가 인도하는 유혹의 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자신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좋아합니다. 당시 초기 기독교도 세상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삶이 달랐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핍박받는 자들과 함께 나도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삶과 기독교의 삶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의와 하나님의 의는 다른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진정한 의 즉 선한 생활을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같은 신앙고백을 하겠다고 믿었습니다.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탕자가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하나님 나라의 종소리가 울립니다.

 

 

팔복 중에 마지막 복은 역설적인 것으로 산상수훈의 모든 요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등이 모두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복 즉 지금까지의 복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성격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고난의 길이기에 빌립보 교회와 디모데에게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신앙의 길을 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증거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감당하며 신앙의 길을 가는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박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이유로 박해를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 즉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이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특성을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박해를 당해도 행복하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알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은 후 새로운 사람으로 생활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 자신이 받는 박해의 깊이를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알기에 박해를 당해도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박해받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예수님을 인해 박해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참 성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상급 즉 구원으로 인해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마음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은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산상수훈의 첫 시작에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믿음의 선배님들은 인크루즈지오 구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양한 형태와 관점으로 예수님께서 팔복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산상수훈의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며 주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의를 위해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서 진행할 때에 당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게으른 자를 쓰지 않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거짓말을 하며 사악한 일을 하는 자들을 더 좋아하며 사용합니다. 일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살도록 그냥 둡니다. 그런데 마귀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고자 하는 분들을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라도 욥처럼 어려움을 당하도록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을 원망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의를 위해 생활하고자 하는 성도를 박해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이 믿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사람도 믿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사악한 모습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다면 박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자신들이 원하는 지옥으로 오는데 굳이 박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기에 11절과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입니다. 10절에서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11절에서는 ‘나로 말미암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박해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박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성결과 화평을 추구하는 것은 선하고 의로운 일이요 누구나 환영할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믿는 자들을 박해하고자 합니다. 우리만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선지자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도 선지자와 같은 부류에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많은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선지자와 같은 부류에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세상이 믿는 자를 핍박하고 비방하는 것은 이 일의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합니다. 죄에서 벗어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는 우리는 자유로움을 누리는 교회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행복한 사람의 공동체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화평하게 하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복이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성도입니다. 오늘 말씀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기 원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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