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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5:27-32
강설날짜 2021-04-11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iLVdQ1-PBs

예수님께서는 왜 이미 간음했다고 하는 이유?(마5:27-32)

 

 

 

종교개혁의 정신은 “성경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과거보다 오늘날은 성경의 말씀대로 사람을 구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대보다 더 타락한 시대라고 합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친 지 500년이 지났지만, 교회는 급속도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국내 신학교 교수가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교단을 넘어 한자리에 모여 종교개혁을 생각하는 강연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스텝으로 섬기었습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가자고 모였지만, 현실은 참으로 어떠합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외쳤습니다. 왜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 것입니까?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신자들은 부인하거나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부인하거나 논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말을 부인하거나 논쟁을 하지 않지만, 행동을 부정하는 시대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현실입니다. 이런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성경을 알아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성경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씩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안전하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성경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순종했습니다. 종교개혁도 당연히 믿음의 선배님들처럼 성경의 말씀에 충실히 하고자 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타협과 양보하며 개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과 행동도 일치하며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은 개신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가장 타락한 시대에 개신교는 성경 말씀에 충실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충실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교회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의미를 오해하도록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바르게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르게 알려 주신 것을 종교개혁가들은 다시 회복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는 신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설교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 같지만 좋은 말이 아닙니다. 성장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여 돈벌이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용하여 돈벌이하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심으로 회심하도록 하십니다.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믿음의 선배님들처럼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늘 개혁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런 정신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두 주전에 강설했던 것을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활에 대한 강설을 들었기 때문에 두 주전에 했던 강설을 기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기억해 봄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믿습니다. 강설의 제목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이해하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며 선생의 역할을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 중에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율법 외에 장로들의 전통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 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종교지도자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도록 성경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은혜 주심으로 바르게 믿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잘 알기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해석해 주셨습니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일점일획도 다 이루시며 완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도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른 말씀을 전해도 사모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율법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을 바르게 이해할 수있도록 하며 성경 외의 것을 믿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무지와 오해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과 그 처벌에 관한 율법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살인은 극형 즉 사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본래 의도가 모든 형태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적 폭력도 불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해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만 잘 믿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형제로부터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소한 죄라 할지라도 해결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크고 작은 것도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없도록 거룩한 공동체 모습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살인죄에 이어 간음 죄에 관한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출20:14절과 신5:18절 등에 언급된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 중 7계명에 대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권위 있는 해석으로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과 같이 오늘 말씀에서도 결과보다 더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에 폭력의 죄만 아니라 같이 언급되는 것이 음행의 죄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대표적인 죄가 음행과 폭력 즉 살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대표적인 죄를 사용하여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27절을 보시면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입니다. 간음이란 결혼 관계 외의 모든 육체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간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비탄으로 만들어 버리는 죄입니다. 그러면 사람과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간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간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관계를 깨뜨리는 주요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간음은 심지어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길 때 영적인 간음으로 묘사하여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과 당신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반영하는 결혼 언약을 깨뜨리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말2:14) 하여튼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 잘 이해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음욕을 품고’라고 했지만, 원어에 가까운 번역은 “여인을 보고 탐하는 마음을 품으면”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인을 보고 마음으로도 탐하는 사람은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간음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마음의 잘 아신다고 하면서 연약한 사람의 성품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살인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육체적인 관계도 아닌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패한 성품을 잠시 접어두고 법적 이치 만을 따진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적으로 올바른 것이라 믿습니다. 세상의 법은 죄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과 육체적인 관계를 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품어도 좋은 것입니까? 마음의 악을 무시한다면 이 또한 무서운 것입니다. 행동보다 마음의 생각이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과 행동은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같은 것입니다. 세 모녀의 살인 사건에서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원초적인 것까지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의 행위를 넘어 탐욕스러운 시선과 생각까지 차단하신 것입니다.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법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원리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도 음욕을 품은 것도 죄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적인 부정을 저질러야 간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즉 여인을 보고 탐하는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갈망하는 것이며 욕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결혼한 백성의 마음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결혼한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욕의 마음을 품다 보면 결국 가정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도 마음의 죄를 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도 마음의 순결을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기 때문에 29절에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만 아니라 세상 사람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죄를 범하면 없애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할 말씀입니다. 마음은 눈을 통해서 자극받기 때문에 눈을 빼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나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말미암아 다른 사람도 죄를 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음행은 결국 혼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멸망 즉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어 함께 지옥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을 빼 버리라는 것입니다. 너의 눈이 너를 죄로 이끌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유혹의 대상에 너무 오래 있으면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눈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늦은 오후 다윗이 왕국 지붕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눈에 의해 마음조차 죄를 범하였습니다. 다윗 왕만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도 죄를 범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눈을 빼고 하나의 눈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근본적으로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너희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진짜로 눈을 빼야 합니까? 기독교의 교부인 “오리겐”처럼 스스로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오리겐은 학자이자 순교자였습니다. 부모의 신앙 유산을 잘 이어받은 순교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스승은 클레멘트이기도 하였습니다. 위대한 스승에 제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황제의 박해가 있을 때 오리겐은 아버지께 편지를 썼습니다. “장차 천국에서 만날 것을 고대하며, 아버지와 함께 순교의 면류관을 쓰기를 사양하지 않겠다”라는 것입니다. 오리겐만 순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처럼 순교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선배님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교회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리겐은 성경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오리겐처럼 고자가 되든지 눈을 빼든지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리겐처럼 한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죄를 근절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으로는 힘드니 하나님께 순종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믿으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성욕은 불과 같습니다. 성욕이 커지면 커질수록 꺼지는 성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성욕을 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과 보는 것을 정결한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신 후 30절에서는 오른손을 사용하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30절을 보시면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입니다. 그러면 오른쪽 눈과 오른손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장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른손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늘 불편함을 느끼며 하나님만 바라보고자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귀중한 것이라도 죄로 인도한다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과장법을 사용하여 너희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있는가를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행하라는 핵심을 전달하기 위한 의도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보는 것 만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으로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이혼증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31절을 보시면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간음에 대한 교훈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혼을 쉽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이혼증서를 주는 것은 이혼을 쉽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주는 이유는 합당한 사유로 이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혼증서를 이용하여 이혼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이혼증서를 이용하여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자신이 음행하고도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증서만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이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준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19:8절에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였습니다. 버림을 받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세는 이혼증서를 준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줌으로 함부로 이혼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계속해서 32절을 보시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2절 말씀을 통해 명확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신적 권위를 강조하시기 위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예도 있는데 이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영원한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서로 의논하여 이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종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음행 외에도 다른 이유로도 이혼증서를 써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이제 당신과 나는 부부가 아니라, 우리는 이제는(더 이상) 서로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는 이혼증서를 통해 아내를 버리었습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해 바른 해석을 하심으로 지옥을 두려워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율법을 왜곡하여 성적 탐욕을 채우는 자들은 이혼증서를 통해 간음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성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혼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대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이혼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간음 즉 음행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간음은 남을 실족게 하여 멸망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 사회를 혼란스럽고 타락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무서운 죄에서 멀어질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수족을 끊고 눈을 빼 버리므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부부는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백성이며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성도는 사소한 죄는 물론이요.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참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에 교회는 성경의 말씀대로 따르고자 애쓰는 생활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이미 간음했다고 하는 이유를 알았을 것입니다. 마음의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로서 더욱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 안에 성장하는 정결한 신부로서 천국 혼인잔치를 기다리며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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