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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5:33-37
강설날짜 2021-04-18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마5:33-37)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경의 인물로 나뉘어 있었지만, 오늘날 일부 교회를 생각하면 목사파, 장로파,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은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한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신앙고백을 하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파든 목사파든 이런 모습은 비성경적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섬기며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알고 사도 바울은 늘 십자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과 십자가는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을 강조할 때 교회는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강조하다 보면 이상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교회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교회다움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도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행복이요 구원의 기쁨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중요성을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중요성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백으로 믿고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 신자들을 생각할 때 거짓으로 복음을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업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결국 인맥을 늘리기 위해 믿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바울파, 목사파 등으로 교회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열심히 있었지만, 그들의 열심히 과연 성경적이었습니까? 누구를 위한 열심입니까? 그럴 때 바울은 십자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십자가의 중요성을 사귐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오늘날도 그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박창수 목사님의 글 중의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과거 대형 참사가 있을 때 인터뷰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000님은 “독실한 신앙과 자비로운 삶을 겸비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이 그 참사의 현장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내가 그 인터뷰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땅과 집주인들로 이루어진 재개발조합의 조합장이 당시 많은 세입자 철거민들이 다닌 같은 교회의 장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철거민 교우들을 배려하기는커녕 배척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다. 대형 참사는 뉴타운 개발로 땅값이 무려 6배나 폭등한 지주들의 재물(맘몬) 숭배가 어떻게 땅 없는 가난한 성도들의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지 비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참으로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입자들이 저희는 하나님 앞에 먼저 예배를 드리겠다고 그랬어요. 그랬는데 (재개발조합장인) 000 장로가 하는 말이 이집사님 예배 보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왜 예수님을 믿는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 백성은 교회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통해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지난주 강설은 “예수님께서는 왜 이미 간음했다고 하는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면서 율법이 가지고 있는 참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역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충실하게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잘 믿으며 가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의 수준을 그들은 행동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행동으로 살인하지 아니한 것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행동으로 타인과 관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세상 사람도 동의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가지고 있는 참뜻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셨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자체도 살인하는 것이고,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행동의 죄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살인과 간음을 생각만 한 것도 죄이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마음으로 지은 죄는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나오는 폭력보다 사실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에 있는 생각이 폭력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마음에 있는 것을 타인에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속이며 말하는 것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을 어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게 하거든 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손이 실족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간음과 연결된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지 않게 하려고 주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니 하나님만 믿고 삶을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과 연결된 이혼증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혼증서는 어쩔 수 없이 모세가 써 준 것이었습니다. 이혼을 함부로 하지 말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쉽게 이혼하였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이혼한 것입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신 것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죄로 인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부패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아내와 이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종교지도자들은 이혼증서를 통해 합법화시키며 성적 방종과 문란을 조장하였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하는 것은 결국 간음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소유물로 만들어버림으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이용하여 죄악을 합법화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주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말씀을 왜곡한 다른 예를 통해 참뜻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깊은 차원의 잘못을 드러내어 참뜻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기 전 먼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맹세하지 말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 즉 공회에서 맹세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회에서 침묵하고 있을 때 가야바는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맹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마26:63-64) 그러면 우리도 맹세해야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맹세는 이런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적이고 진실하지 못하며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맹세를 좋아했습니다. 맹세라는 제도를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영리한 거짓과 속임수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으면 덜 중요하게 생각하며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을 이용해 사람을 힘들게 하는 맹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촉진하기 위해 마련된 맹세라는 제도를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실하지 못한 맹세를 폐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맹세의 올바른 방향인 근본적으로 순전하고 일관성 있으며 진실성이 내포된 맹세를 강조하셨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맹세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오늘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입니다. 구약에서 맹세는 어떠한 일이 있어야 꼭 지켜야 했습니다. 시15:4절에서 맹세는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사기에서 사사 입다는 경솔한 맹세로 인해 자신의 딸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삿11:29-40) 한 번 한 맹세는 해로울지라도 구약의 백성은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하도록 하셨습니까? 맹세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맹세하도록 하신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오해하고 있다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신23:22절을 보시면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다면 꼭 지켜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맹세한 사람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헛맹세하지 말고 진실한 맹세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즉 하나님께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잘 아시기에 34절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입니다. 구약에서 맹세는 중요했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헛맹세든 진실한 맹세든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으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사회질서를 흔들리게 하는 것이며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34절 말씀을 통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즉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마음을 속이며 맹세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이 아닌 창조물의 이름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한 것은 곧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헛맹세를 통해 자신을 모면하기 위해 맹세를 이용했습니다. 이처럼 위선적이고 헛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입니다. 이런 맹세를 하지 않도록 우리는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편 말씀처럼 해로울지라도 서원한 것을 지켜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전5:4-5절 말씀처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헛맹세를 했어도 지켜야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신중하지 못하고 경솔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헛맹세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의 진실성 그리고 능력의 한계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입 밖으로 낸 말을 다 지킬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 바라도록 하심으로 바른길을 가도록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입니다. 땅의 이름으로도 맹세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당신님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처럼 땅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하면 맹세는 가능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맹세할 수 없습니다. 만약 맹세했다면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과 발등상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시면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머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체입니다. 머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하면서도 머리는 하나님과 관련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머리로도 맹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머리털을 희고 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지막 37절 말씀을 통해 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신자들의 언어생활 지침입니다. 간단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 많은 말을 하면서 핑계를 대고 그러다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도록 하시기 위해 정직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함으로 거짓말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남을 속이기 위하여 어떤 거짓말이든 하지말고 맹세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말과 헛맹세는 사탄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탄이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헛맹세를 통해 자신을 위한 도구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맹세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만약 맹세했다면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지키지 못할 때 사실 그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좋은 방향이라 믿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오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물의 주인이시면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신중해야 하며 경솔하게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위장하고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발등상과 예루살렘 그리고 머리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무력한 자임을 깊이 알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서원할 일이 있다면 신중하게 생각하며 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맹세하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맹세는 꼭 지켜야 하는 약속입니다. 약속을 어기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성품과 무능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일깨워주심으로 사람의 부패성과 무능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맹세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온전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존재이기에 거짓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이야기가 사실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 탐지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면 사람은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맹세를 합니다.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게 하려고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마치 자신의 말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유창한 말과 사실일 것 같은 맹세에 사람들은 의심이 가도 믿어 주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맹세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하늘과 땅과 자신의 머리 등으로 맹세를 한 것은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세상의 질서를 무너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도록 합니다. 맹세를 통해 사람이 거짓말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고 그 반대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맹세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맹세를 이용하여 합법적인 거짓말을 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도록 하심으로 바른길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사람이니 거짓말하지 말고 성실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맹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세하지 않고도 성실하며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라는 강설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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