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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4:1-10
강설날짜 2020-06-28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SQSU2fjPn0M&t=586s

사도 바울이 구조된 멜리데 섬(행28:1-10)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딤후 3:1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진실하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목회자로서 자질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왜? 성경이 중요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딤후3:15절에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는 오늘날과 같은 목회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지상명령으로 전해야 하는 일꾼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목회자로서 성경을 가지고 구원에 이르도록 전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을 통해 지혜를 알기 원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함으로 삶의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오늘날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여러 가지의 학문을 배우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졸업을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구약 66권을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졸업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성경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신자들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도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성경을 아는 것이 힘이 아닌가 생각해 보십시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을 참되게 믿기에 성경을 아는 지식이 힘입니다. 여기서 힘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성경을 아는 믿음이 있으면 벼가 고개를 숙이듯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한 분들만 시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로 섬기고자 하는 분과 학습과 세례를 받고자 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이런 시험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험의 의미를 모르면 시험을 준비하면서 시험에 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시험에 들지 않고 통과만 하고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성경을 참되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암기하고 시험을 통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분들이 학습과 세례를 받고 직분 자가 된다면 교회는 쉽게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목회자는 성경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시험을 통해 신자는 하나님 앞에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성경입니다. 사람의 눈과 마음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험에 임하는 성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 시험에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의존하여 신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단을 믿는 자들은 거짓 목사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설교는 사라지는 연기와 같습니다. 사라지는 연기는 결국 영원한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참된 성경의 말씀보다 이단이 믿는 가짜신앙의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지팡이 교회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앙의 삶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도 바울과 같은 중요한 성도입니다.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든 경쟁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성도는 경쟁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믿는 신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서로 하나님을 믿으며 신뢰의 교제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신뢰의 교제를 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며 참된 복음을 전했던 사도요 신자였습니다. 지난주 강설은 “바울 한 사람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말씀을 알 수 있도록 지난주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던 선주와 선장 그리고 백부장은 로마로 가기도 전에 죽을 수 있다는 위험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바울의 영향력은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도력은 사도 바울과 같아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며 순종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는 광풍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선원은 육지가 가까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명보트를 타고 가고자 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살려야 하는 선원이었지만,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을 알고 있는 바울은 백부장에게 사실대로 말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사도 바울의 말을 믿고 선원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군사를 동원하여 구명보트를 바다에 버렸습니다. 도망칠 수 없는 선원들은 이제 알렉산드리아 배와 함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동안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서로 운명 공동체로서 마치 교회와 같은 것입니다. 어두움이 지나고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점점 더 힘을 얻어 지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유대인이 하는 방식으로 기도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에 있는 사람들은 먹을 힘조차 없을 정도였지만, 바울의 말을 믿고 먹었습니다. 음식을 먹은 사람은 알렉산드아 배 안의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276명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의미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선원들이 도망하려는 것을 막으니 이제는 로마 군사들이 죄수들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당연했습니다. 죄수가 도망하면 군인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죄수를 죽이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군사들의 행동을 알고 있는 백부장은 사도 바울을 지키기 위해 부하들의 행동을 막았습니다. 그런 다음 백부장은 사람들이 육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수영을 할 수 있는 자부터 보냈습니다. 그 후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은 널조각 또는 배의 물건을 의지하여 육지로 가도록 했습니다. 백부장의 결단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이 생명을 구원받았습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중요성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서로 바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지상명령을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구조된 멜리데 섬”을 통해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는 파선을 당해서 수영할 수 있는 사람은 수영으로,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물건에 의지하여 구출되었습니다. 구출된 섬은 1절에서 어디라고 합니까?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구조되어보니 섬은 멜리데였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은 광풍으로 인하여 두려운 바다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광풍에 의해 고생하던 사람들이 구출된 섬은 이탈리아에서 멀지 않은 멜리데 즉 몰타라는 섬이었습니다.(학자들은 이렇게 대체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가는 지명을 분명하게 기록하면서 더 중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된 것입니다. 과거 태풍을 만난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다에서 죽는다는 것은 신으로부터 진노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배가 좌초된 장소는 바울의 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출된 사람들은 멜리데 섬의 원주민으로부터 특별한 호의를 받았습니다. 2절을 보시면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멜리데 섬에서 생활하고 있던 원주민으로부터 영접받았습니다. 원주민이라고 하면 어떤 분들은 야만인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원주민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들은 원주민으로 이해합니다. 원주민들은 겨울이라 불을 피워 놓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276명의 사람을 영접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동정하여 추위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주민이 볼 때 276명이 이방인이었습니다. 낯선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푼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행27:24-2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는 성경을 믿는 사람이기에 성경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원주민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가운데 바울은 무엇을 했습니까? 3절을 보시면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바울은 나뭇가지 덤불을 묶어 불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덤불 속에 숨어 있던 뱀이 뜨거운 열기에 밖으로 나와 바울의 한 손을 문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뱀에 물리는 것은 생명이 위태롭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원주민드은 4절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죽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승에 의하면 배에서 탈출한 사람은 독사에 물려 죽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주민들이 생각하는 공의의 여신이 바울을 살려두지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된 것입니다.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출 받았지만, 바울은 인과응보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의의 여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원주민들이 섬기던 토속 신앙으로 생각됩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멜리데 섬의 원주민에게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모든 사람이 놀라고 있는 가운데 바울은 태연하게 손으로 뱀을 붙잡아 불에 던졌습니다. 바울을 지키고 보호하여 주시기로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울을 정죄하던 자들이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고 상하지도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던 공의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공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 바울을 보면서 원주민들은 6절에서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바울을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이 사람의 형태로 온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죽을 것으로 믿고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신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한 행동을 보며 신이 우리에게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1차 전도 여행를 할 때 이와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행14:11-19) 바울 일행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들이 제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바울을 신이라고 하는 가운데 제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여기까지 믿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것을 연구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놀라운 모습을 눈으로 본 원주민 중에 보블리오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7절을 보시면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보블리오는 바울을 영접하여 3일 동안 자신의 토지 안에서 머물도록 했습니다. 보블리오는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신분으로 추측됩니다. 사실 보블리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여 사흘간 친절한 대접을 하였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소작인들을 거느릴 만큼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블리오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는 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병에 걸려 있던 자에게 어떻게 합니까? 8절을 보시면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기도와 안수하여 고친 것입니다. 보블리오는 아버지는 열병과 이질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열병은 평균적으로 4개월 지속합니다. 2-3년 계속되는 예도 있습니다. 사람을 아주 힘들게 하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심하면 죽을 수 있는 병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고쳤습니다. 바울이 안수하여 고친 사건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바울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당연히 참 신이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기 위해 관심을 끌기 위한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바울이 한 형태를 보고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9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섬의 모든 병든 자들이 바울에게 온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면 바울만 병을 고치고 있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로마로 가고 있는 바울과 동행한 의사 누가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고침을 받고 있다는 단어에서 의학적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못 고치는 병자만 온 것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고칠 수 있는 자들이 같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인 누가도 함께 병을 고쳤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누가는 “데라퓨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친 경우에는 “이아오마이”를 사용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바울과 누가가 함께 사람들의 병을 고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서로 섬길 수 있는 것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보낸 후 로마로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안전하게 멜리데 섬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죽음의 길이될 수 있는 로마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섬에 있는 사람들은 10절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멜리데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먹을 수 있는 것과 필요한 경비를 주었습니다. 바울로부터 은혜받은 것을 생각하며 섬기었습니다. 그런데 의문점이 들기도 합니다. 왜 바울은 그 섬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문구도 없습니다. 누가는 필요한 것만 적었기 때문에 그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중에 누가를 만나면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일행은 바다에서 14일 동안 광풍에 의해 표류하다가 배가 파선되어 도착한 섬은 멜리데였습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기록함으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사명자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사람과 자연이 막을 수 없습니다.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안전하게 지키시는 분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바울은 목숨이 위태로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이셨습니다. 바울과 함께 구원을 얻는 자는 275명이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섬은 이탈리아 근처 멜리데 섬이었습니다. 섬에서 생활하고 있던 원주민들이 바울 일행을 영접했습니다. 불을 피워서 몸이 춥지 않도록 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불을 쬐고 있던 바울은 나무 한 묶음을 불에 올려놓는 순간 독사가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뱀이 바울의 손을 물어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공의가 바울을 죽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뱀을 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위기에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치명적인 독사라도 바울이 로마로 가지 못하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전해질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명자가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바울의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은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가 자신의 토지에 머물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보블리오 아버지는 열병과 이질로 인하여 누워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바울은 기도와 안수를 통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빠르게 섬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병자가 바울에게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온전하게 다 알지 못하지만 멜리데 섬에서 바울을 통해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은 바울이 떠날 때 로마로 갈 수 있는 음식과 필요한 경비를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모든 위험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길을 가야 하는 이유를 알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셨으며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그 어떤 길도 가야 하는 신자요 일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고통의 길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생각할 때 그 길은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사명자의 길은 비록 고난의 길이긴 하지만, 그 앞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보호하여 주신 것처럼, 지팡이 교회도 똑같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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