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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8-11
강설날짜 2020-08-16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D8kI4ZxyZF0

 

 

고난 중에 승리한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계2:8-11)

 

 

과거에 교회 그리고 목사라고 하면 신뢰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술과 담배를 끊고 새사람으로 즉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그리고 목사라고 하면 마치 공공의 적이 된 것 같은 시대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시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어디 가서 목사라고 하면 상대방의 시선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목사라고 하면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은 마치 학교의 선생님 또는 의사와 같은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허물어지고 지금은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외적으로 이런 일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 비자를 위해 서류를 신청할 때 목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 기독교인입니다.

 

 

이런 현실인데도 일부 목사는 비리와 범죄 그리고 세상의 권력 등을 잡고자 합니다. 스타 목사가 되기 위해 하나님 나라는 관계없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이런 분들로 인해 대부분 목사는 억울하게도 그들과 같은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는 오늘 말씀은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 중에 승리한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서머나 교회하면 책망이 없는 교회 즉 칭찬만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 중에 “죽도록 충성하라”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이면 무조건 믿는 것 같습니다. 그 예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와 같습니다. 이 말씀은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친구들이 와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와서 욥에게 한 말입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회개해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를 안다면 개업하는 장소에 성구로 걸린다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강설을 들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복음의 증인 자로 충성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을 했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서 사랑받는 말씀 중의 하나가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뭉클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에게 은혜와 감동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신자들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적용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적용하지 아니함으로 한국 교회를 멍들게 하였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십시오. 목회자는 강설을 통해 신자들에게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하도록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일만 귀한 사역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하는 것 같지만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신학교에서는 기복주의와 번영신학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공할 수 있다면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저도 타 교회 성도를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다 보니 일부분을 그만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휴식을 통해 새로운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 년 정도 휴식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도에게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알게 해 주시리라 저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저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자매님도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도록 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옳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무거운 짐을 계속해서 지도록 하는 것은 과연 성경적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오늘 말씀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21fc580d.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58pixel, 세로 466pixel 서머나 교회는 에베소 교회로부터 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아시아에서 오는 도로가 끝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와 다르게 서머나 교회는 과거나 지금이나 번창한 도시입니다. 당시 인구는 20~30만 정도로 호평동, 평내동, 금곡동, 다산동을 합친(20만) 인구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서머나 지역은 큰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아마도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추측됩니다. 오늘날은 서머나라는 지역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즈미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터키에서 이스탄불 다음으로 가는 대도시입니다. 서머나는 항구로도 유명하지만, 황료가 유명하여 수출을 많이 했습니다. 또한, 학문과 과학 그리고 의술이 발달 된 지역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칭찬받은 충성이라는 단어처럼 충성심이 뛰어난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기 전부터 서머나는 그들과 동맹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머나는 자신들의 부를 누리기 위해 로마를 지원했고 주전 195년에는 로마의 여신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습니다. 서머나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 같습니다.

 

 

 

대략적인 것을 안 우리는 오늘 본문 8절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감독하는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에 대한 것을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서머나 교회에 대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박해와 순교를 당할지라도 주님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확신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극심한 환난을 통해서 몇몇 순교자들 배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적절하게 당신님을 통해 서머나 교회를 표현했습니다. 왜 이렇게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사랑하신 것입니까? 서머나는 황제 숭배로도 아주 유명했습니다. 황제 숭배로 인해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는 박해가 있었습니다. 황제 숭배하면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특권이 누렸기 때문입니다. 특권을 누림으로 서머나는 자신들의 도시를 더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동전에는 “아름다움과 크기에 있어서 아시아에서 제일”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황제 숭배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일제 강점기처럼 로마 황제에게 분향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자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하여 주었습니다. 증명서가 없다면 고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순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서머나의 순교자 폴리갑 교부입니다. 서머나에서 폴리갑만 유명한 순교자가 아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 신자들은 각오하며 실제로 순교에 동참했습니다. 86세로 화형을 당하는 폴리갑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종교를 배반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스도를 비난하라”라고 재촉했습니다. 이런 정도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만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폴리갑은 “내가 그분을 86년간 섬겨 왔는데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배반하신 적이 없다.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시고 나의 구세주이신 분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라질 불로 나를 협박하지만, 당신은 악인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에 무지한 자이다. 어찌하여 당신은 주저하고 있는가? 당신이 원하는 바를 속히 실행할지어다”라고 하며 순교했습니다. 이런 교부가 있었기에 서머나는 하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았던 것이고, 푯대를 향해 군인과 같은 전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 속에서 서머나 교회는 죽음과 같은 삶을 생활했고 순교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계속해서 환난과 고난 속에서 주님께서 통치하고 있는 것을 믿으며 생활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통치하고 보호하시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서머나는 풍요로운 도시였으면 교회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어려움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나 오늘이나 미래에도 역사의 주관자로 통치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이든 아니든 하나의 공교회인 신자들을 보호하시며 진리를 붙들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서머나 교회는 순교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욥의 고난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은 무능할 수 있지만, 가정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처럼 “고난에는 뜻이 있다”는 말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고난이 있다면 처음이시오 나중이신 주님께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이 원초적인 답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죽음은 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주님처럼 부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정복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의 서머나 신자들을 지팡이 교회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서머 교회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유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9절만 잘 읽어도 서머나 교회 즉 죽도록 충성하라에 대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9절에서 배경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0절은 구체적인 환난과 고난 등에 대한 상황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상황은 사탄이 신자들을 환난과 고통 등을 통해 순교 당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주님께서는 인내하도록 그리고 권면과 칭찬을 통해 이기도록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당면한 문제는 순교 아니었습니까? 실제로 외부적인 박해와 물질적으로 신앙생활 하기 힘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인해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신앙인으로는 부유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는다는 것은 부유한 믿음을 가진 성도입니다. 서마나 교회는 라오디아 교회와 달랐습니다. 그 교회는 영적으로 궁핍했지만 서마나는 영적으로 부유한 성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다른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자들에게는 시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9b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악한 자들 즉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서마나에서 유력한 위치에 오른 자들이 많아서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 왕의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실상은 자신들을 위한 영광이었습니다. 참되게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영광을 얻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도 마치 사탄의 회당과 같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오늘 말씀을 받았을 때 앞으로 있을 즉 신앙인으로 박게 될 받해의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이지 교회 안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무조건적인 충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이 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측은지심으로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책망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순교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 빨리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머나 교회는 순교를 통해 순교를 낳은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유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칭찬받는 교회 부럽기도 합니다. 야고보의 강설을 들어보십시오. 약2:5절을 보시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유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서머나 교회의 현실을 잘 아시는 주님꼐서는 10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주십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입니다. 유대인 회당은 부유한 생활을 하기 위해 로마와 결합하여 그리스도인 즉 서마나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비기독교인이 기독교 즉 신자들을 순교 당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탄의 회당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위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칭찬의 권면을 하시는 것입니다. 순교와 같은 박해를 받는다면 배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머나는 든든한 교회였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면서 권면하십니다.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해도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이든 지팡이 교회이든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핍박은 사탄이 주는 것이기 떄문에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게 하려고 고소와 유혹하는 타락한 천사입니다. 그런데 주님꼐서는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실제로 십 일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십 일은 극단적이면서도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고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인지 모르지만, 주님을 위해 영육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하여튼 서머나 교회는 힘을 다해 신앙을 지켜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들만 그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넘어 오늘날의 성도도 같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의 신뢰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순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마치 초기 올림픽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승리의 관’과 같습니다. 운동선수가 승리의 관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이런 것처럼 서머나 교회와 오늘날 교회는 생명의 면류관을 위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들처럼 들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금을 단련하면 정금이 됩니다. 신앙인에게 환난은 오히려 정금과 같이 순수한 성도가 됩니다. 환난은 순수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도록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성공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가짜입니다. 오히려 교회를 타락하도록 하는 힘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와 지금의 교회를 보면 어떠합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상의 면류관은 썩어져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은 섞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요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면류관은 구원의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개털 모자, 황금 모자 이런 것처럼 보이는 면류관이 아니라 구원의 면류관 즉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생활하게 되는 영광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으로 표현하신 것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인간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성도에게 말씀으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도 요한이 생명의 면류관 약속을 소개하면서 서머나 교인들에게 기억시키고자 한 것은 육체의 죽임을 당할지라도 그들에게 영생의 면류관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지팡이 교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11절을 보았으면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에베소 교회에 하시는 말씀처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을 한 번 믿으면 영원한 삶이지만, 반대로 믿지 아니하면 영원한 죽음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하시는 말씀은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진 약속입니다. 에베소 교회와 다르게 서머나 교회는 한결같이 권면의 칭찬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메시지의 종결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귀가 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와 듣지 아니하는 귀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어느 귀입니까? 좋은 귀를 가진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좋은 귀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 면류관은 구원이라는 것을 명심하며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 죽도록 충성하라는 죽어서 비로소 끝나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서머나 교회는 충성스럽게 순교를 당할지라도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죽게 되더라도 신앙을 지키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의미를 알았다면 죽도록 충성하라를 잘 기억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장을 위해 자기가 맡은 일을 죽도록 충성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힘이 들 때도 휴식도 필요합니다. 무조건적인 충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가운데 교회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일도 세상의 일도 다 중요합니다. 둘 다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만 중요하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복음을 전했겠습니까? 세상의 일은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도 하나님의 사역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일도 신성한 일입니다. 교회에서만 하는 일이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은 옥에 가더라도 순교를 당하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사용된 충성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충성과 믿음은 서로 같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충성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실신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도 서머나 교회처럼 주음에 이르는 상황이라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며 참된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 즉 세상의 일과 교회 일을 잘 구분하여 충성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세상으로부터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그럴 때 신앙을 입증할 기회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힘들더라도 주님만 바라보시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다면 우리는 서마나 교회처럼 신앙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었습니다. 그럴 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선물로 받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성도님에게 감사드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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