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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계3:1-6
강설날짜 2020-09-06

자기 만족주의 사데 교회에 보내는 말씀(계3:1-6)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진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주일 예배만 아닌 일주일 동안의 삶에서도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나라 성도님께서 좋아하는 성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빌4: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이 성구는 저도 좋아합니다. 1990년 신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산 NIV 성경책에 빌4:13절 말씀을 적어 두었습니다. 그때에는 나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하든 성취 가능성의 유무를 나 자신의 능력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빌4:13절의 바울의 말씀은 비천과 풍부의 삶의 생활에서 터득한 것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주님만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오해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에너지만 주시면 내가 무엇을 하든지 이룬다는 성공 주의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전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기복주의가 아닙니다. 기도하면 마치 알라딘의 램프처럼 소원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에너지만 주시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빈부와 풍부에 처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울이 배운 비결은 삶에 생활에서 터득한 고백을 함으로써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에너지만 주기를 바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삶에서 충실한 신앙생활 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 성도는 삶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마음이 편할지라도 주님의 재림 후에는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만을 위해 생활하는 것은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현실만 좋아하면 사데 교회처럼 자기만족을 위해 생활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자기만족만을 위해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인 것처럼 서로 협력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소아시아 교회를 강설로 듣고 있는 가운데 오늘 우리는 다섯 번째 편지인 사데 교회를 알고자 합니다. 사데 교회의 중요한 문제는 ‘살았다 하는 이름으로 있으나 죽은자로다’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땅에 있다는 것과 땅에 있다가 없어졌다는 것을 살았다는 것과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의미를 이용하여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 비유를 사용하여 표상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에 상대하여 그것을 상기시키거나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사데 교회의 현실을 강설로 듣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심으로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들으십시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로부터 남동쪽 약 50km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상업적으로 번창한 도시이면서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푸스 등과 황제숭배를 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부와 자유와 사치가 심했으며 종교가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부와 사치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도록 한 배경이 있습니다. 염직 공업과 양털 염색과 금모래가 유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역의 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성채가 남쪽 면만을 제외하고 모두 암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성채는 난공불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일한 생각으로 인해 주전 133년에 로마에 정복당하여 속국이 되었습니다. 주후 17년에 대지진으로 사데는 큰 피해를 보았지만, 로마 황제가 거액을 보내어 도시를 재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데인들은 티베리우스 신전을 짓고 더욱 황제를 숭배했습니다. 사데는 외부적인 환란이나 내부적인 유대인의 박해와 갈등이 없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물질적 부유함과 평화로운 삶은 사데 교회에 침투하여 자기 만족주의에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단의 가르침과 핍박 그리고 니골라 당과 같은 세력도 없었고 황제로부터 숭배를 강요받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럽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는 누가 전도하여 세운 교회인지 아십니까? 교회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사도 요한의 전도로 세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데 교회는 평화로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편지를 사용하여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사데 교회에 성도는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도 같은 존재입니다. 사데 교회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돌이킬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고, 일곱 별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를 종합하면 주님께서는 생명을 부여하고 살리시는 성령과 교회를 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데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된 것입니다. 영적인 상태의 사데 교회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죽은 교회 즉 성도가 회개하면 주님께서는 참된 신앙인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보다 사데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영적인 죽음에 직면한 사데 교회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님을 일곱 영을 가지신 분으로 소개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교회를 즉 성도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아마도 사데 교회는 오늘 우리의 상황과 가장 유사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핍박이 한국 교회에 있습니까? 주변의 환경은 성도가 신앙 생활하기에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까? 사데 교회처럼 편안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현실에 만족하며 생명력을 상실해가는 사데 교회와 같지 않습니까? 나를 점검해 보십시오. 죽은 교회입니까? 살아 있는 교회입니까?

 

영적인 교회는 미래를 향해 신앙생활 하는 성도입니다. 미래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사데 교회처럼 자신의 삶을 만족하면 안주하는 신자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역경과 환란이 찾아올 때 우리는 기도하는 힘이 더 있습니다. 힘든 생활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깨어 있으라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힘들 때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아시고 기도할 때 힘을 주십니다.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아뢸 때 나의 마음속이 후련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습니다. 이것이 기도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데 교회와 같은 현실입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처럼 겉으로 보기에 번영하고 아름다운 도시지만, 실상은 죽은 도시요 교회였습니다. 주변으로부터는 부러운 소리를 듣고 인정을 받았지만, 주님으로부터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 보기기에는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라 죽은 신자들로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는 남은 자를 즉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경고의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한다면 경고의 메시지를 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기에 돌이킬 기회를 준 것입니다.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열매를 찾으셨지만 사데 교회는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사데 교회와 한국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장로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한국 교회이지만 과연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의 행위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데 교회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교회 행위를 아시고 있습니다. 행위를 알고 있다는 것은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2절에서 권면의 말씀을 통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보시면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깨어나라, 깨어서 지키라고 하시는 메시지입니다. 사데 교회는 존재의 가치가 없어지지 않고 겨우 호흡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주님께서는 살아 호흡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깨운다’는 것은 깨어나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교회가 죽음 직전에 있으나 완전한 생명력을 상실한 교회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각성은 즉 회개는 호흡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영적인 각성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호흡을 하는 신자입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도 사데 교회와 같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일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사데 교회에서 주님께서는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온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한 것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온전함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양심입니다. 사람의 양심은 행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데 교회 신자들의 온전한 행위를 찾고 싶었지만, 자기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만족주의는 결국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무기력으로 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영적인 무기력은 예배와 기도, 구제, 각종 소모임이 있어도 그 속에 온전한 행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무기력은 형식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 등이 있어도 겉모양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영적인 무기력은 잎은 무성할 수 있을지라도 열매를 맺지 못했던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재림하는 날입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현실은 짧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그와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멀지 않고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에 권면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귀중한 은혜입니다. 사데 교회의 현실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3절에서 신자들에게 3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세 가지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첫째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주의에 빠져있는 상태를 되돌아보라는 것이고, 둘째는 지키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들은 복음을 굳게 잡아 믿음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회개하라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라입니다. 우리가 사데 교회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죄로부터 회개함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실에 만족하며 풍요로운 생활을 하겠습니까? 선택은 자유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님에 대한 처음 사랑과 헌신으로 되돌아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사데 교회는 이 말씀을 듣고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사데 교회만 아니라 자기 만족주의에 있는 교회라면 같은 메시지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한다는 것은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참된 기쁨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생각하지 못하고, 지키라는 의미도 모르며 회개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엄중한 경고에도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암8:11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영원한 사망을 누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주일에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이 말씀의 기갈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거짓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먹어야 신앙인으로 생활하는 힘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도적같이 재림의 때가 있습니다. 그날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그날을 알 수 없지만,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교회는 마지막 날이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것을 믿고 참된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4절을 보시면 사데 교회 즉 모든 신자가 믿음이 없는 상태 즉 자기 만족주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지 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아무리 타락한 교회라도 주님께서는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신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았지만, 영적으로 살아서 주님께 영광된 삶의 생활을 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자기 만족주의에 있는 현실에서 옷을 더럽히지 않고 흰옷을 입고 다니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구약의 에녹과 노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사데 교회는 풍요로운 생활과 외부의 핍박과 니골라 당과 같은 거짓 교훈 등을 가르치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안일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지 못하고 현실에 만족했습니다. 사회적인 생활에 흡수되어 물들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순결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순결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순교자가 많은 시대였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독교가 핍박을 당할 때 참된 신앙을 더 잘 지키는 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흰옷을 입어야 합니다. 흰옷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순수함과 승리와 축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흰옷을 입은 남은 자는 대가를 바라는 신앙이 아니라 사도의 교훈과 성경의 말씀에 따라 신앙 생활하며 주님께 의지하는 성도였습니다. 이런 성도에게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시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함께 동고동락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부러운 말씀입니다. 현실에서는 풍요롭지 못해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는 신자들에게 5절에서 또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참된 믿음을 지킴으로 흰옷을 입으며 주님과 동행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이기고자 하는 힘보다 주님께서 이길 힘을 주십니다. 사데 교회 신자들 중 남은 자 즉 흰옷을 입고 다니는 성도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첫째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영광의 옷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입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승리의 옷과 같습니다. 사데 도시는 양모 산업이 잘 발달하였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알았습니다. 둘째는 생명책에서 절대 지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생명책에서 없앨 수 없습니다. 사도라도, 선지자라도 생명책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생명책의 권한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활은 영원한 삶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 길을 가는 성도는 행복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구원받은 성도의 이름을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들 앞에서 주님께서 시인한다는 것입니까? 한글 성경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의 천사들 앞에서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증명을 증언할 것을 의미합니다. 하여튼, 이것은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는 성도는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심판대에서 주님께서 시인하여 주시는 것을 볼 때 악한 자들은 어떠한 마음이겠습니까? 그때는 모든 끝났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법정에서 주님의 증언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지막 6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입니다. 귀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사데 교회는 한때 살았다는 이름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경고를 받을 때는 대부분 신자는 죽은 신앙인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모범적인 교회요 주위의 교회들이 부러워하는 교회였습니다. 풍요로운 생활과 황제숭배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요 교회였습니다. 주위 교회는 황제숭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운데 신앙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사데 교회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겉으로는 교회가 활발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삶과 생동력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유명한 교회라고 해서 좋은 교회는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즉 합당한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요 영적인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믿음이 없는 가운데 자기 만족주의에 빠져 신앙생활 했습니다. 은혜의 옷을 입은 것 같으나 순결한 삶의 생활은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풍요로운 생활로 인한 만족으로부터 오는 현실주의였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쾌락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조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늘 평안과 안일한 생각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치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초병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승리할 수 있도록 흰옷을 입으며 생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말씀을 기억하며 참된 길을 가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인생 행복 즉 사데 교회처럼 신앙생활 하는 것은 살아 있으나 죽은 교회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의 온전치 못한 행위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면에서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전반적으로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전반적으로 부패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리스도인으로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신앙의 생활을 하는 성도를 기억하십니다. 흰옷을 입은 참된 성도와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동행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만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함께 하심으로 법정에서 시인하여 주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순결함을 유지하며 믿음에 기초한 신앙생활 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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