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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1:17-25
강설날짜 2020-01-05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그러나...(행21:17-25)

 

바울은 사도요 말씀 봉사자(강설자, 목사)입니다. 또한, 교회의 교사로서 그의 글들을 보면 수신자들을 위한 고유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복음을 듣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았느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므로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자라며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사역한 일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늘 한결같이 “주 안에서”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늘 주님을 높이는 진정한 사역자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기쁨을 얻은 신자들이 굳건한 반석인 교회로 성장하도록 바울은 말씀 봉사자요 교사로서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세속화된 신학적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바른 신학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바른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세상의 인본주의로 물든 교회이기도 합니다. 인본주의만 물든 것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물든 맘몬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참된 교회의 표상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죽이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을 전함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신학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신자들은 말씀 봉사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몸 된 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결국 주 안에서 성전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순교도 각오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지난주 강설을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바울2”였습니다. 빌립과 딸들이 정착하여 생활하던 가이사랴에서 휴식을 하고 있던 바울에게 찾아온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유대로부터 내려온 사람은 아가보 선지자였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준다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행동했습니다. 이렇게 보여주는 것은 바울의 마음을 더 굳건하게 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일반 사람이라면 아마도 예루살렘과 거리가 먼 지역으로 도망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신실한 일꾼이었기 때문에 순교를 각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가보의 행동은 바울이 더 성령을 의지하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가보가 예언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을 본 바울의 일행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하고 권하였습니다.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힘을 쏟았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는 바울의 막고자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성령이 함께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알면서도 바울은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가는 길을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미지가 떠 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이 지팡이 교회에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마음을 알고 있던 일행들은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끄심을 받을 수 있도록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도리이기도 합니다. 가이사랴에서에서 여러 날을 보낸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예루살렘은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으로 더 굳건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갈 때 누구를 데리고 갔습니까?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구브로 사람 나손이었습니다. 나손을 데리고 갔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나손의 집에 머물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가고자 했던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고린도에서부터 출발해서 마게도냐로 오는 동안에 여러 성에서 주님의 계시와 교통 가운데 있을 때 성령께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면 어떠한 고난을 겪을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일행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구브로 사람 나손이 자기 집에 먼저 기별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예루살렘 교우들이 기쁨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환영을 받았지만, 예루살렘 전제의 공동체가 아니라 일부 교우들이었습니다. 하여튼,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다섯 번입니다. 그중에 오늘 마지막 방문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이 어떠한 고난을 겪을 것을 알기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고 함으로 예고된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야 말았다는 긴장감을 주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언어로는 느낌이 잘 반영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교우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바울은 어디를 방문했습니까? 18절을 보시면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야고보가 감독하고 있던 예루살렘입니다. 야고보만 아니라 모든 장로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이것을 통해 교회가 장로 중심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할 것을 들은 장로들이 함께 모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 아니라 사도 야고보 즉 알패오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베드로, 요한 그 밖의 사도들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지역으로 출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바울은 사전에 기별한 후 찾아뵌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야고보는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의인 야고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신 사역을 보고합니다. 19절을 보시면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입니다. 바울은 회심한 후 이방인 사역을 한 내용을 보고한 것입니다. 바울의 보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 사람들에 대한 섬김의 봉사자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처럼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달되도록 했습니다. 참고로 이때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의 헌상을 전달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잠시 환영을 받았지만, 20절을 보시면 어떠한 방향으로 전환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중요한 것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수만 명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문을 생각해 읽으면 수만 명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즉 아주 많이 구름과 같이 많다고 할 때 사용됩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도 큰 세력으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포함하면 많은 인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야고보가 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아직은 유대인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기쁨을 나누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에 있어서 할례와 율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확인되었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은 의구심이 들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살아온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것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의 매임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신앙의 길을 가야 합니다.

 

누가는 이방인 전도에 대한 바울의 보고를 들은 교회의 반응을 소개합니다. 먼저 21절을 보시면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0절에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할례가 특별하게 거론되는 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언약의 표지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소문만 듣고 추측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행16:3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사랑하는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구약의 의식법을 따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울이 할례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만이 아니라 모세와 다른 유대교 관습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는 소문으로 듣고 바울의 비난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몸보다 중요시했습니다. 바울의 입장은 관용과 각 집단이 그 나름의 견해를 따라 행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관습과 전통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바울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복음만을 전하고자 하는 말씀 봉사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온다는 것을 사전에 어느 정도 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미리 준비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야고보와 장로들은 22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소문의 내용을 알고 있는 그들은 바울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어찌할꼬’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아는 그들은 고민에 휩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바울에 대한 잘못된 소문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어려움이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문제의 해결점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다녀간 것을 알면 당신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들은 이런 말을 23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입니다. 그들은 묘안을 낸 것이 바울로 몇 사람이 준비하고 있는 유대교의 정결 예식의 비용을 부담하게 하고 그 예식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유대인의 법에 따라 정결 예식 하는 것을 보면, 소문에 대한 것들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때마침 그들 가운데는 나실인 서원을 한 네 명이 있었습니다. 나실인의 결례 비용도 대신 내줌으로 유대교에 대한 관습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보여 줄 기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 수 있도록 24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입니다. 결례를 행하라는 것은 서원한 자들처럼 정결하고 서원 기간 지켜야 할 것을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자를 위해 대신 비용을 부담해 주는 것을 경건한 행동으로 생각했습니다.

 

서원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은 서둘러 바울에 대한 이 특이한 요구가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덧붙였습니다. 좀 더 말하면 바울에게 요청한 일은 그가 사역했던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이방인들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25절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입니다. 이렇게 했던 것은 유대인 중에 불신자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는 것을 피하기를 원한다는 점을 이해시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정이 이방인 선교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바울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내려진 것이라고 볼 때 이번에는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 신자들을 위하여 바울이 양보해 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하기 위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은 구원과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술과 담배는 중요시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문화적인 차이로 생각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바울은 조금도 항의하지 않고 그 계획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나실인 서약을 한 네 사람과 기꺼이 합류하려 한 것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이 말씀은 바울 일행이 서원의 절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받친 후 머리를 깎아 제단 불에 던져 태운 다음 제사장에게 서원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장면이라 생각됩니다. 유대인 신자들의 시시비비를 가릴 때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이 정작 바울의 복음 사역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 같은 행위는 단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타협주의적인 발상이라기보다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한 대승적 차원의 판단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이사랴를 떠난 바울 일행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의 영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 지도자의 권면으로 결례를 합니다. 바울이 보고한 선교 상황과 구제금은 이방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충분히 입증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유대인 개종자들 사이에는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서 가르칠 때 그들의 조상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베풀지 말며 규례를 지키지 말도록 했다는 헛소문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예수님도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파기하는 자로 오해받으셨고 그로 인해 결국 수난의 길을 가셔야만 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은 선민의식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선민의식으로 가득해도 복음을 들으므로 구원받습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 하였습니다. 이런 예식이 가리키는 본질적인 진리와 현실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어 주심으로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런것처럼 구약의 도덕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불의를 생각나게 하고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도덕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죄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절망에 빠져 파멸에 이르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도덕법의 요점은, 인간이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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