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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6:24-32
강설날짜 2020-05-31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하다(행26:24-32)

 

지팡이 교회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거룩한 신자입니다. 거룩한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은혜를 주심으로 믿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신자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해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으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참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아실 것입니다. 제3장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뜻에 의해 나온 것이거나 전해진 것이 아니라 마치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벧후1:21) 쓰인 것으로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은총으로 인하여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을 명하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쓰여졌음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손으로 십계명을 기록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글들을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임무요 참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성경을 통해 거짓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단이고 사이비입니다. 그들로 인하여 참된 교회는 더 힘들고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성경을 가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자가 하나같이 거룩한 성경 말씀 그대로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순종해야 한다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으로 인도하기에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은혜받기를 소망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삶에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말을 듣고 싶어 기회를 주었습니다. 기회를 얻은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가를 전했습니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광채를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광채였습니다. 바로 그때 히브리 말로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했습니다. 로마인이 잘 알고 있는 속담 즉 가시채를 사용하여 신이 정해 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바울은 이야기했습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주님은 참된 구원자임을 믿었습니다. 바울 그것을 알기에 자신은 양심으로 속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이 알 수 있도록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후 바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라는 말씀에 따랐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청문회에 모인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진실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목적대로 충실하게 바울은 따라갔습니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신자들이 기업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첫처럼 당신님께서는 바울에게도 같은 사역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사망의 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전한 하나님에 대하여 거스르지 아니하며 충실했다고 전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받은 바울은 복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힌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전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이 바울을 성전에서 잡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나는 로마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나 전염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나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현명한 판단을 해 달라는 바울의 변론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죽음의 고통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의 변론을 이렇게 했습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안 아그립바 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아그립바 왕과 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변론이 끝나자마자 듣고 있던 자들은 놀랬습니다. 그중에 베스도 총독이었습니다. 24절에서 베스도는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미쳤다’입니다. 학문이 높아서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스도의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긍정적인 면은 베스도가 바울의 학문을 높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입니까? 아마도 구약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넓은 지식일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부정적인 면은 미쳤다는 말로 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는데, 부활하여 바울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지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스스로 종교적인 광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24절에서 미쳤다고 두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여러 번 복음을 들었지만, 바울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과의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라 로마법으로는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할 때도 미친 자라고 들었던 것처럼 바울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에게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미친 자라고 듣는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기 때문에 좋았을 것입니다. 베스도가 미쳤다고 하는 말에 바울은 더욱 힘차게 25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청문회에 모인 자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참된 말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베스도의 말에 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온전하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베스도와 다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바울은 26절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사건은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은 큰 사건이라 아그립바 왕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했던 이유는 자신의 변론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바울은 비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은 사실이라고 전하였습니다.

 

더욱 담대하게 바울은 27절에서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선지자들을 믿으며 논리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하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그립바 왕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참되고 진실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아그립바 왕은 선지자의 말을 지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지적으로만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였습니다. 세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서 참되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하십니까?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아그립바 왕은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문회와 같은 자리에서 선지자들의 말과 바울의 말을 믿는다고 하면 무슨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아그립바는 이방인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다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입지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선지자의 말을 믿습니까? 당신은 로마에서 생활했어도 유대인의 생활과 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선지자의 글을 믿지 않습니까?

 

바울의 말을 들은 아그립바 왕은 어떻게 답했습니까? 28절을 보시면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의 말을 듣자마자 아그립바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단시간의 변론으로 자신을 신자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원어를 볼 때 아그립바 왕의 대답은 상당히 애매하여 긍정인지 부정인지 판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말에 크게 동조도 않고 반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를 택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말을 들은 바울은 2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아그립바 왕에게 초점을 두어 바울은 말했지만, 청문회에 모인 모든 자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한다고 하며 변론을 마무리했습니다. 복음의 전도자인 바울의 마지막 소망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자들에게 소망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 저도 신자들이 언제나 주님만 믿기를 소망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말을 회피했지만, 바울은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변론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자 임무요 자부심입니다. 그러면서 애정 어린 소망을 품으며 간절하게 믿을 수 있도록 전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지팡이 교회는 바울의 마지막 말과 행동에 아멘이라고 해야 합니다. 최고의 권력가인 분봉 왕에게 바울은 초라하지 않고 담대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왕과 바울은 비교될 것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소망을 품고 있는 바울은 참되고 진실하고 온전하게 전한 메시지를 믿기를 소망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권력자들에게 진정한 영적 자유로 초대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평화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부활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받은 자로서 청문회에 모인 자들이 멸망하는 것을 볼 때 애처로웠습니다. 사슬에 매여 있는 바울이었지만, 구원받은 백성이었기 때문에 구원으로 초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자들은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 증거 자로서 진실함과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같은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영혼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진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변론과 강설이 끝나자 30절을 보시면 어떠한 행동을 합니까?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청문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바울이 사형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있었더라면 죄를 분명히 했을 것입니다. 베스도가 더욱 불안했을 것입니다. 로마로 보내기 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자들은 더는 바울을 비난하거나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 수 있도록 누가는 31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바울의 변론을 들은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생각할 때 바울은 무죄였습니다. 사형을 당할 이유도 없으며, 결박을 당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여러 번 재판을 당했지만, 늘 무죄였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권력이 중요했기 때문에 무죄라고 하지 않고 회피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것은 결국 영원한 지옥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기에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변론을 들었기 때문에 베스도 총독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32절을 보시면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은 이유 없이 잡힌 것이고,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청문회를 통해 석방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자신이 정식으로 재판을 했으면 무죄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들은 베스도는 뜨끔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바울은 로마로 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섭리였습니다. 로마로 가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석방되지 아니함으로 바울은 더 안전하게 로마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석방되었더라면 아마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암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온 누리의 심장이라고 하는 로마에 가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고난을 겪도록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의 변론에 가장 놀란 사람은 베스도였습니다. 청문회가 열리도록 한 것은 바울을 심문하여 죄목을 찾고자 했습니다. 황제에게 죄목도 없이 보내면 자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청문회가 열리도록 했지만,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제지하고 싶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미쳤다고 했습니다. 너의 학문으로 인하여 스스로 미쳤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바울은 더욱 담대함으로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기회로 생각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늘 생활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고난의 길은 아니더라도 기회는 있습니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바울은 더 담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바울의 변론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청문회의 재판장과 같은 아그립바 왕은 결론을 내립니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음해로 잡힌 것을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무죄라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황제에게 가도 무죄라면 자신의 체면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황제와 친밀한 아그립바 왕이 서신으로 간략하게 보고하면 자신의 권력은 어떻게 될지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베스도는 바울을 무죄로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베스도는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순종하였습니다. 죄수의 모습이었지만 한결같은 믿음으로 주의 길을 가는 나그네였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본향을 향한 나그네와 같습니다.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주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모습을 보면 나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는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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