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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6:6-10
강설날짜 2019-07-14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부제: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6-10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요 성도 즉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지체님을 위해 풍성한 은혜를(은혜의 방도인 강설) 주님께서 주실 줄 믿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활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복음의 증인자요 제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신앙 생활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신앙고백한 것처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쇼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이라도 주님의 일꾼으로 열매를 맺고자 합니다. 구원함을 받은 백성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가며 승리를 하고자 기도합니다. 자신의 공로가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함을 받은 백성은 믿음으로 달라진 모습을 드러내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생활하면서 존귀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라고 합니다. 그것에 대해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오직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에 대해 “인간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언제나 이런 마음을 품으로며 신앙생활을 하신 것을 믿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의가 끝난 후 사도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제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사역지로 다시 갔습니다. 그 지역은 더베와 루스드라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디모데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제자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1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전함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그들이 신앙인으로 잘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바르게 성장한 가운데 디모데를 제자기 때문입니다. 고전4:17절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신실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각별한 사이였으므로 짐작하 수 있습니다. 제자로 삼은 디모데에게 바울은 할례를 함으로 제2차 전도 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왜 할례를 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할례에 대한 의결 되었습니다. 마치 잉크가 마르기 전에 이방인 지역에서 생활하는 신자에게 할례를 했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디모데의 부모를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방인이고, 어머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이중 문화에 잘 적응된 디모데였습니다.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디모데는 훌륭하게 잘 자란 덕망도 있고, 인격을 갖춘 제자였습니다. 할례는 구원과 무관하지만, 회당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할례를 행한 자들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자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배교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해물을 제거하고자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데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 나의 외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주님만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교회와 늘 함께하시는 주님과 동행을 하며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신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참된 신앙인이 많을 때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디모데와 같은 마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손을 빌리어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 후부터 복음은 유대지역에서 주변 국가로 전하여졌습니다. 그 일을 이끌어가신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아시아에서 유럽 지역으로 복음이 확장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기본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늘 하나님만 의지하며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꾼이었습니다. 늘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가운데 성령은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통해 유럽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 역사의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 가운데, 복음이 유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복음이 아시아에서만 전하여졌다면 오늘날의 유럽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복음이 아시아에서만 전하여지도록 하지 않고, 바울을 통해 유럽으로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드디어 유럽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안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칼빈, 쯔빙글리, 낙스, 루터 등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인 신자들을 통해 일하시며 인류를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2818bb82.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71pixel, 세로 230pixel 인류 역사의 흐름을 성령께서 인도하신 6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성령의 인도하심은 바울이 지금까지 사역해 오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에도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전하여지는 것이지 감추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머무르거나 가라 하시는 것에 의지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에 의지한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누구나 하나님 나라를 증거함에 있어 쉽지 않음을 생각할 수 있기도 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성공적인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잘 전하고 있던 바울에게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돌아다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사역을 하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바울은 오늘날의 터키 지역 중 무시아라고 하는 서북쪽에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옆의 지도를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전하고 있던 지역이 아닌 무시아로 이동한 이유는 지금까지 전하지 아니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부르기아와 갈리디아 땅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또한 7절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비두니아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아시아 지역 중 가장 먼 곳이라고 하는 비두니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바울 일행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다시 2차 전도 여행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은 ‘예수의 영’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려울 수 있겠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천상의 왕이 되어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예수의 영’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라고 함으로 성령만 바울과 함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렇게 표현함으로 초대 교회의 원초적인 삼위일체 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어떻게 복음의 진로를 안내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비두니아로 가지 않도록 하니까 바울은 드로아로 이동한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위에서 본 지도를 보시면 어느 곳에 있었는지를 알 것입니다. 바울은 전하지 않고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비두니아로 갔다면 아마도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함으로 복음은 해가 지지 않는다는 영국으로 전해지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후대에 유럽인 즉 컬트족이 영국으로 이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성령은 준비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하는 일은 사람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께서 성도를 훈련하시며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2차 전도 여행은 아시아가 아닌 유럽이 중심이 돼가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유럽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처럼 오묘한 것입니다.

 

성령은 비두니아에 가지 않도록 하신 후 바울이 무시아에서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9절을 보시면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꿈에 마게도냐인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 즉 그리스 지역으로 목적지를 바꾸어 복음을 전하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드로아는 로마와 긴밀한 위치에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시아와 로마의 아주 가까운 연결 도시이며, 로마의 통신 체계의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드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군사적인 도시요 항구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 도착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선교지가 어디인지 알기 위한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밤에 환상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통해 그리스로 오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무엇을 하고 있느냐보다 더 관심을 두고 기록을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바울 일행을 인도하시고, 복음이 유럽으로 전하여질 수 있도록 성령이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인의 환상이 너무나 강렬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매우 강력한 의식으로 생각했습니다. 환상은 단순한 상상이나 추리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게도냐인의 환상은 ‘우리를 도우라’입니다. 성령은 바울에게 시각적인 것을 동반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여주시고, 새로운 역사의 흐름으로 인도하심으로 온누리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바울은 환상을 본 후 10절을 보시면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게도냐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그의 결정을 존중하면서 수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1차 전도 여행에서도,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바울 일행은 한 번도 ‘우리’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라고 한 것입니까? 그냥 마게도냐로 가자고 하면 됩니다.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여기서부터 바울 일행과 합류하여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일인칭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편지를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인 성도님,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에서 준비했습니다. 바울은 유럽으로 가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던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교회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심오한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해 왔던 지역에 다시 가서 그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차 전도 여행을 출발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원하던 발자취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기묘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령은 바울 일행이 비두니아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심으로 후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참으로 기묘합니다. 2차 전도 여행을 통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로마가 건설한 도시를 통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두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성령은 바울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하여질 수 있도록 유럽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아시아 복음 증거를 막으셨지만, 환상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안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사람이 계획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의 저자인 솔로몬 왕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고 하십니다. 바울의 복음 증거는 아시아와 전세계로의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성령의 계획안에 진행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복음 전파의 행로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고후16:16-22). 성령의 인도함은 바울의 증거가 후에 복음이 유럽만 머물도록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진 것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팡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대충 신앙생활하면 하나님 나라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바울과 같은 전도 여행이요, 좁은 길입니다. 오늘날 일부의 교회처럼 큰길을 가기 좋아하고, 세상의 보험처럼 생각합니다. 번영신학과 기복신앙으로 물든 이 시대에 바울의 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의 길은 오직 주님을 향한 것이었고, 오직 복음에만 즉 그리스도에게만 있었습니다. 세상에 물들어 버린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타락한 복음을 전했다면 온누리에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겜벨 모건은 마게도냐로 향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 내가 택한 곳이 아니라, 심지어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택한 곳도 아니라, 주님의 명령에 따라 보내어지는 곳으로 가는 것, 어려운 상황들은 믿음을 위한 기회들이며, 봉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가 겪는 혼란의 정도는 우리의 기회의 정도이다. 어둠이 우리를 감싸려고 위협할지라도, 우리는 한 줄기 빛을 따라가자. 우리는 내면의 충고자에게 진실하자. 하나님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 우리의 취향과 목적에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내 마음대로 하는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르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삶과 사역은 올바른 길로 인도를 합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성령의 사역과 인도하심에 대해 가르침은 교회에서 상당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물론 한국 교회는 성령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카리스마적인 능력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성령께서는 그 당시나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역을 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령께서는 카리스마적인 은사를 주시지만, 그 외에도 많은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성령의 카리스마적인 은사만 강조합니다. 물론 성령의 사역에 대해 조화롭게 가르치는 교회도 많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고, 기복신앙에 물들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 행복한 날만 있어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아시아로 향하고자 하는 바울의 전도 여행을 막으신 것입니다. 아시아에도 교회가 세워질 수 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미 아시아는 바울이 복음을 1차 전도 여행 때 전했고,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여진 신자들이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시아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물론 인도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때로는 예수님를 전하는 복음 사역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연약하고 무지하여서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과 다른 계힉을 세울수도 있습니다. 연약한 나의 마음을 인정하며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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