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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6:20-30
강설날짜 2019-08-04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Zkp6nquIHzA

감옥에서 일어난 구원의 은총(행16:20-30)

 

세계에서 유례없는 교회성장으로 주목을 받은 나라가 어디입니까?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지구촌에서 대형교회 10개 중에서 5개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나라입니다. 복음이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 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온 후 나라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일제 강점기입니다. 어둡고 소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과 위로를 준 것이 복음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를 주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는 백성을 위해 학교와 병원을 짓고 지상명령을 감당했습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섬기었습니다. 하지만, 급격하게 성장한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교회는 부패하였고, 세속화되었고, 도덕과 윤리가 많이 흔들림으로 소망 없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희망과 소망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감옥에서 일어난 구원의 은총”을 강설로 듣고자 합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의 몸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신자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만 전하고자 힘을 다한 것입니다. 지난주 강설은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친 후 실라와 함께 바울이 옥에 갇히다.”였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다면 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 이상의 것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전도하기 위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사탄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한 사람을 만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점을 잘 보기 때문에 주인들은 큰 유익을 얻는 즉 금광과 같았습니다. 그 여인은 점을 잘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 들린 여종에게 가서 자신에 대한 점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여인이 점을 보면 그 여인이 부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들린 여종에게는 주인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주인들”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주인들은 그 여인을 통해 착복하면서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일행을 따라와서 놀라운 말을 콘 소리로 말한 것입니다.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 말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울처럼 순수해야 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날 동안 귀신들린 여종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복음 증거 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을 생각했기에 귀신들린 여종을 고칩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 놓고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면 나 자신이 예수님을 진정한 구원자로 믿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주인들은 놀랐을 것이고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기보다 자신들의 삶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실과 주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중요했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 강설을 요약한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말씀을 통해 듣도록 하겠습니다. 주인들은 자신들이 생업으로 이용하고 있던 귀신들린 여종이 일반인처럼 되자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원들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9절을 보시면 장터로 간 것입니다. 일반적인 파출소나 법정이 아니었습니다. 장터는 로마 시대의 도시 형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장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장터는 일반적으로 광장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판장도 있었고, 관리들도 앉아서 쉬기도 하던 장소입니다. 그곳으로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20절을 보시면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주인들은 관리들 즉 상관들을 보자마자 바울과 실라를 고발한 것입니다. 상관들은 빌립보 성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담당했던 자들입니다. 주인들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면서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하고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사람들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일을 여기에 와서 요란하게 함으로 미풍양속을 어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21절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서 로마인의 정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들은 자신들을 로마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유대인처럼 로마로부터 점령을 당한 시민었습니다. 하지만, 점령을 당한 그들에게 로마는 조건없이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 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주인들은 자신들이 로마 사람이라고 하면서 바울과 실라를 고발한 것입니다. 미풍양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을 위한 고발이었습니다.

 

주인들만 고발에 동참한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 있던 무리들이 주인들의 말을 들으면서 함께 동요했습니다. 22절을 보시면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 오히려 주인들과 같은 마음으로 무리들을 두려워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전후 사정을 듣지 않고 재판장 역할을 하는 상관들은 곧바로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친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다신교를 제외하고 다른 것을 전하면 바울과 실라에게 행한 것처럼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여튼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가혹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가볍게 한 가혹행위가 아니라 큰 고통을 주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문점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주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도 로마 시민이므로 함부로 매질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말을 하였지만 듣기를 거부한 것 같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알 수 없지만, 23절을 보시면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맞은 것 같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선한 일을 하고도 정식 재판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칭찬은 받지 못할지언정 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즉 신자들이 감수해야 할 고통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를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힘든 것입니다. 여기서 감옥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가 아니라 땅굴을 이용하여 만든 장소입니다. 땅굴을 이용했기 때문에 축축하고 썰렁하고 빛도 보기 어려웠던 장소입니다. 병에 걸리기도 쉬운 감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 바울과 실라를 가두고 간수에게 한 말은 든든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바울과 실라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어떠한 마음이 듭니까?

 

상관의 명령을 받은 간수는 어떻게 합니까? 24절입니다.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죄수가 도망을 치면 자신들이 위험해지므로 바울과 실라의 발에 차꼬 즉 무거운 쇠사슬을 이용하여 도망 못 하도록 한 것입니다. 한 발에만 한 것이 아니라 두 발에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죄수가 도망 못 하도록 두 발의 간격을 많이 벌어지게 함으로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누가는 이런 기록을 하면서 바울과 실라는 자신의 힘으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고후11:23-25절에서 자신이 당한 것을 잊지 못하며 고린도 교회에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바울과 실라에게 하나님께서는 극적인 은총으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되게 믿는 신자라면 하나님은 역시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면서 기도할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도 없을 것입니다. 25절을 보시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실라는 기도와 찬송을 한 것입니다. 그 소리를 누가 듣습니까? 간수가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감옥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바울과 실라에게는 기도와 찬송이 울려 퍼지게 하는 예배당과 같은 장소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간수와 상관들에게 호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기도를 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 드린 것입니다. 간수는 그들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면서 미친놈이 따로 없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26절을 보시면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우리는 저절로 아멘이라고 해야 합니다.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당하는 것을 본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놀라운 섭리로 인도하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을 하던 중에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메인 차꼬가 풀어진 것입니다. 간수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지진이 난다고 해서 자물쇠로 된 것이 저절로 풀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비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찬송을 하는 것을 무시했습니다. 무시를 넘어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한 간수는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하고자 합니까? 27절을 보시면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해하고자 합니다. 자신들이 지키던 죄수들이 도망하면 간수는 그에 따르는 형벌을 당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옥문이 열린 것을 본 것입니다. 옥 안을 보기보다 자신들의 죽음을 더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과 간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위험 가운데서도 찬미할 줄 아는 바울과 실라, 그 반대로 간수는 재난 중에 자살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어떠한 생각을 하십니까?

 

간수의 모습을 보았던 바울은 28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놀라운 광경 아닙니까? 이런 드라마와 같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의 드라마는 막장과 같은 것이 많이 있지만, 성경은 늘 복음으로 사람을 살립니다. 자결하고자 하는 간수에게 자신들이 감옥 안에 있으니 해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간수는 자결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인가를 확인하고자 간수는 어떻게 합니까? 29절을 보시면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감정이 격앙되었을 것이고, 자신들도 믿지 못하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등불을 이용하여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본 간수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과 실라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복음의 증인 자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간수는 감옥에서 일어난 일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했습니까? 귀신들린 여종을 자신의 돈벌이로 이용한 주인들과 정반대이기도 합니다. 30절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간수는 자신이 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나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죽음보다 영생 즉 구원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서 한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기도와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주실 것을 바라보도록 기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총은 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바울이 전한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성경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자신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경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메시지를 듣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간수의 질문은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질문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니이이까”(눅18:18) 그리고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모두다 영생 즉 구원에 관한 질문입니다. 간수가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을 한 것을 들은 것을 가지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여종이 한 말을 기억한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한 말을 아실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였습니다. 실제로 감옥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보면서 때로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은 교회 깃발만 꽂아도 성장하는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맘몬주의와 세속주의로 변질되어가는 교회는 쇠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시련과 고통은 교회를 다시 회복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가 쇠퇴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통해 통치하시고 일하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신뢰한 것처럼 지팡이 교회도 같아야 합니다. 소망 없는 시대에 하나님 말씀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었고, 기도와 찬송이었습니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면서 떠나는 시대에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는 모든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전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희생을 통한 구원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당신님의 의를 드러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지금도 일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가 일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관리들보다 하나님의 구원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감옥을 복된 천국’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의 첫 열매인 루디아에서 이제는 로마 감옥을 지키는 간수에게 복음이 들어가게 하심으로 점점 더 로마로 향하여 복음이 가고 있습니다. 작은 힘이지만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로마를 무너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결국 세상을 심판하는 것도 복음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으며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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