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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9:8-19
강설날짜 2019-10-06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바울2(행19:8-19)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과 참되고 완전한 교제”를 향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성도입니다. 주 안에서 사귐의 공동체로 신앙 생활하며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하나님을 참되게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 된 성도로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참되게 믿지 아니하는 분들은 삼위 하나님을 ‘신념’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신념’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면 “세상의 포로 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2001년도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한 “세상의 포로 된 교회”를 읽으시면 더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기복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번영신학에 물든 현시대의 교회를 냉철하게 판단하리라 믿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기독교와 사회” 부문 골드 메달리어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이 책의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의 포로 된 교회의 저자인 마이클 호튼은 “기독교 아메리카를 침식하는 존재로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것도 아니요. 세속주의에 사로잡힌 잘못된 사명 이해라고 질책”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성경과 복음이 교회에서 무시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특별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성례(성찬과 세례)와 기도(권징)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 포로 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주 강설에 이어 오늘은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바울” 두 번째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기억력은 아시겠지만, 오래가는 것과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각의 존재”라고 합니다. 망각의 존재인 우리는 지난주 강설을 다시 들음으로 주님의 길을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어디에 도착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에 있는 것처럼 에베소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했던 장소입니다. 에베소 사람들과 작별할 때 그들은 바울이 더 있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바울은 다시 에베소에 온 것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어떤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진실한 신자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질문한 것을 들은 제자들은 “성령의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들의 답변을 들은 바울은 계속해서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입니다.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라고 했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추측하면 이렇습니다. 실제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던가 아니면 소문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한 것입니까?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세례 요한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회개하도록 함으로 오실 메시야를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상명령을 감당함으로 재림의 주로 오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교회 즉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참되게 믿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바로 그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세례 요한이 예언한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시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주님께서는 당신님의 교회를 이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바울”을 강설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역시 바울입니다. 전도 여행을 하며 늘 해 왔던 일을 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석 달 동안 무엇을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한 것처럼 바울에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대함으로 석 달 동안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 즉 강설한 것입니다. 강론만 한 것이 아니라 권면도 하였습니다. 3개월 동안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변론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해야 할 주제였습니다. 신자들이 전한 복음의 실제적인 핵심 내용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가장 궁극적이고 역동적인 전도의 핵심 주제입니다.

 

3개월이면 오랜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중에 사도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비방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9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사도 바울을 비방하는 제자들은 다른 지역보다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난과 핍박 그리고 몰매질 등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란노 서원 오늘날로 말하면 학교 같은 곳에서 사도 바울의 강론을 듣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서원에서 따로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의 마음은 ‘단단히 굳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두란도 서원에서 따로 가르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단단히 굳은 마음이라고 교회가 해야할 일은 말씀을 온전하게 강론 즉 강설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열정과 헌신은 결국 에베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10절을 보시면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에베소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3개월을 넘어 2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에서 큰 결실을 이루어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는 그 도시 자체보다 훨씬 더 널리 아시아로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경을 하는 동안 주변 지역에 복음의 증인 자들을 보내 교회를 세우게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기간에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스에 교회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서머나,버가모,두아디라,사데, 빌라텔비아 교회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할 때 아시아로 가고자 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3차 전도 여행을 보시면 아시아에 복음이 열리도록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소아시아 일대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에베소를 거점으로 활발한 전도 사역을 전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개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 한 까닭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의 수종자이며, 전달자였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인간의 지혜로는 당장 알 수 없지만, 먼 훗날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수종자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도록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11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행하게 하다’라는 미완료시제는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사역 동안 늘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통해 놀라운 능력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임마누엘”로 함께 하심으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들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나라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연히 발생하는 기적이 아니라 특별하면서도 초자연적인 능력이 개입된 기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기적은 사람의 능력이나 수완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과 의지로부터 유래하고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바울과 함께하시고 있다는 것을 누가는 12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마술용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당신님의 강력한 임재를 아주 강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생물 매개체를 사용하여 즉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치유의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11절에 언급된 직접적인 능력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손수건과 앞치마만 가져다 얹기만 해도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마술의 힘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하셨던 능력이 강했습니다. 에베소는 고대로부터 주술과 마법의 대명사로 유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하게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하게 마술사와 다른 것임을 13-16절에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술하는 자들은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도 예수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지팡이 교회는 이미 사도행전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시몬 마구스와 바예수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마술을 사용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에베소에서 생활하는 자들은 자신들도 바울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하는가를 자세히 살펴본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바울처럼 똑같이 행동했지만, 결과는 능력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마술사들이 악령을 쫓아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마술적 주문과 정확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바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아마도 아주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처럼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의 명성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누가는 많은 마술사 중에 유대인의 한 제사장의 아들을 기록함으로 사실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14절을 보시면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제사장 누구의 아들이었습니까? 스게와의 아들 일곱 명입니다. 자신들도 제사장의 명문이니 바울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전해야 하는 제사장의 아들들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악한 행동을 관두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들이 지금까지 행하던 사악한 일들을 계속하고자 했습니다. 성경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제사장의 아들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15절을 보시면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넌 누구냐’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악귀가 제사장의 아들에게 한 말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악귀를 몰아내고자 했지만, 오히려 악귀가 ‘너희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악귀는 ‘예수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나는 너희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모르기 때문에 악귀로부터 이런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인정했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귀로부터 반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악귀 즉 귀신으로부터 제사장의 아들들은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사장의 아들들은 악을 행하는데 오히려 악귀로부터 징벌을 당합니다.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사용하는 자들에게 징벌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시면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용해 악귀를 몰아내고자 했던 자들과 변론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귀가 일곱 협잡꾼 모두를 제압했습니다. 그런 후 악귀는 그들에게 주권을 행사하여 저항도 못 하게 했습니다. 또한, 벗은 몸으로 겨우 도망쳐 가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름을 이용해 악귀를 제압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제압을 당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사람은 참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 유쾌, 상쾌, 통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믿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님의 권위와 이름을 함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성경 말씀의 일부분을 주문이나 마술로 사용하면 불쌍한 것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은 모멸과 수치를 당했지만, 최후의 심판대에서는 오직 영원한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제사장의 사건은 에베소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어떻게 했습니까? 17절을 보시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에베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망신을 당한 자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사람들의 입으로 놀림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 사건을 통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초점은 사건의 내용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처럼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신비의 섭리로 인하여 어떻게 됩니까? 18절을 보시면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신에 대한 것을 자복합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 왔는가를 스스로 고백한 것입니다. 과거에 해 왔던 일들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복은 에베소 사람들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복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숨기지 않고 낱낱이 고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복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부패와 죄성에 대해 각성하게 되며 더 나아가 주님만이 자신의 모든 죄를 해결하여 주시는 것을 깨닫고서 그 죄를 주님께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신뢰함으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이 이렇게 자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마술하던 자들입니다. 19절을 보시면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후 모든 사람 앞에서 불에 태웠습니다. 마술사가 자신들을 위해 주술과 비법 등이 기록된 책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어쩌면 자신들만의 소중한 정보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죄를 알고 있는 그들은 책을 불에 태웠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책값이 ‘은 오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시간당 만오천으로 계산하면 60억 정도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사건입니다. 제사장의 일곱 아들의 사건은 놀랍게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마술사들은 자신들이 해오던 일은 쓸데없는 일이며, 우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하나님 나라를 안 후 자신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의 자복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지역을 가든지 회당에 들어가 강론을 하였습니다. 에베소에 와서도 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해 왔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에베소에 와서도 같았습니다.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해도 잘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비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두란도 서원에서 그들에게 복음을 강론했습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꾸준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에베소는 물론 그 주변의 성읍에까지 복음이 확장되어 나가는 풍성한 결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 지역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사 사건을 통해 자복하는 회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술사에게 있어서 돈벌이가 중요했고, 자신들의 명예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과 바울의 이름을 이용하여 악귀를 몰아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참뜻과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결과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섭리로 사도 바울을 통해 증거 하도록 했습니다. 마술사들이 행한 결과는 복음이 뿌리내리도록 했습니다. 자신들이 바울과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했다가 자신들은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악귀로부터 큰 봉변을 당한 사건은 오히려 에베소 사람들에게 교회가 세워지도록 했습니다. 신약성경도 구약성경도 마술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어떤 문구를 반복하여 외우는 것은 마치 중언부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술사는 왜 주문을 외우듯 반복하는 것입니까? 마술사들의 이런 반복적인 행동은 효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효력은 오히려 예수님의 복음이 전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술과 같은 신비주의와 재물에 관심이 많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과 문명이 발달 된 시대에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신자들은 바른 말씀, 바른 신학, 바른 교회로 갈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합니다. 마술사처럼 예수님을 영접한 그들은 자신들의 책을 태워 버리고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을 걷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뜻을 알고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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