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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9:32-41
강설날짜 2019-10-27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의 결과(행19:32-41)

 

지팡이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신앙 생활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 즉 성경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분들의 세계관은 우리와 다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세상의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두 개의 세계관이 공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지적인 혼란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성경과 다른 것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우상을 만들어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위한 복을 가져다주는 우상으로 생각합니다. 그와 반대로 기독교 세계관으로 사회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우상은 무엇입니까?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은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이 보는 관점과 그리스도인이 보는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어느 세계관으로 생활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배운 것과 교회에서 배운 것이 서로 충돌하면 삶은 더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생각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며 살아가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세상의 세계관을 내려놓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생활하고자 노력합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참된 신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세계관을 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분이 있다면 성경을 차분하게 읽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중심 즉 결국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 세계관은 결국 복음의 증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역하는 사도 바울은 복음의 증인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다메섹에서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헌신하며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헌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된 주의 길을 걷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지난 주일 강설을 되돌아보겠습니다. 에베소에서 사역한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큰 영광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에서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사역을 감당해도 늘 고난은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디모데와 에라스도고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낸 후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데미 우상을 통해 돈벌이하는 자들이 자신들을 위한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작은 소동이 아니라 적지 않은 소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믿음으로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상을 통해 생활하는 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메드리오라 하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 소동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는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돈벌이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자신의 직업과 연관된 직공들과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의 강론을 즉 강설을 듣고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어 생업을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돈벌이를 위한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같은 생업을 하는 자들에게는 마음에 쏙 들어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도 세상의 세계관 즉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에 우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더메드리오의 연설을 들은 자들은 “분노가 가득”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하며 바울과 함께 다니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연극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울은 그들 가운데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때 바울의 제자들은 말리었습니다. 그들만 아니라 바울의 친구가 된 아시아 관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면 우상으로부터 돌이키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세계관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지난주 강설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이었습니다. 오늘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의 결과를 통해 참된 주의 길을 걷는 지팡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은 대부분이 그렇듯이 무리 중에 분란이 가득했고 많은 사람이 왜 모였는지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여기서 먼저 ‘모인 무리’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인 무리’라는 단어로 쓰인 “에클레시아”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 때문에 모였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말이 제각각 다르게 외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소동이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불법적인 집회와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더메드리오의 연설은 아데미에 대해 불경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켰지만, 소동의 자초지종을 알지 못해 혼선을 빚고 있었습니다.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불러내어 군중 앞에 나서서 변명할 것을 권고합니다. 33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이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소동을 일으킨 자들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군중 앞에 설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그 당시에 흔했기 때문에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로서는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배척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그 양자는 모두 우상숭배를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대가 자신들에게까지 파급될 것을 두려워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알렉산더를 불러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에베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아데미 우상을 섬기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강론과 사역의 결과는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어려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알렉산더를 통해 소동을 잠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유대인인 줄 알고 더 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34절을 보시면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알렉산더를 통해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 일사불란하게 ‘한 소리로 외쳐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하며 ‘두 시간’ 동안 외치는 것입니다. 연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소동에 휩싸여 이제는 더메드리오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그 순간 유대인들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위치는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가운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뜻밖의 이름 없는 영웅을 소개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35절을 보시면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그는 서기장이었습니다. 서기장은 에베소 도시의 최고 행정관으로 로마 관리 사이의 연락 담당자였습니다. 서기장은 유대인들의 산회드린 공회와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에서 최고의 지방 관리 중 하나였습니다. 큰 소동이 일어났어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즉각적인 개입을 한 것입니다. 서기장은 에베소 출신이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요 사태를 책임을 졌습니다. 그래서 먼저 무리를 진정시킨 것입니다. 무리를 안정시킨 서기장은 에베소 사람들의 자부심을 부추깁니다. 이러한 서기장의 행동은 아데미 신상을 섬기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었습니다. 소동이 일어나든, 바울이 전한 메시지라도 에베소의 명성은 변함없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 즉 에베소가 된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신전지기’라는 의미는 “신전과 신을 섬기는 의식을 담당하는 수호자”였습니다. 서기장은 더메드리오처럼 연설의 대가처럽 보입니다. 그 이유는 에베소는 아데미의 수호 도시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며 반문하기 때문입니다. 서기장의 이야기를 잘 생각하면 무엇입니까? 아데미는 사람이 만든 우상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신이라는 것입니다.

 

서기장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36절을 보시면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근거 없는 경솔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당신들은 조용히 하라는 것입니다. 서기장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의미를 모르면서 자신과 에베소의 번영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로마법을 지키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소동이 폭동으로 일어나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서기장은 더메드리오와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위해 말하기도 합니다. 37절을 보시면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당신들은 생각해 보라. 어떻게 복음 전도자들이 거대한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것을 위협할 수 있는가? 몇 사람이 신전에 오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물건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위대한 여신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그러므로 아무 잘못이 없는 그들을 붙잡아 온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서기장은 말은 올바른 것입니다. 소동과 소송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증거가 있다면 더메드리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법정을 통해 소송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협의가 없으니 너희들이 경솔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38절을 보시면 서기장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더메드리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날’이 있으니 그 날에 하라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에베소를 담당하는 총독들도 있으니 법정에서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사적인 분쟁이 있다면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정인 소송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39절에서 말합니다.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너희들이 고소 이외에 다른 문제가 있으면 정규적으로 열리는 민회를 통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민회는 매달 연극장에서 열리는 시민의 회의를 말합니다. 그곳에서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기장은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제 서기장은 결론을 내립니다. 40절을 보시면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소동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차를 무시한 너희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서기장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서기장은 그리스도인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에베소를 다스리는 행정관의 일을 참되게 한 것입니다. 서기장은 자기 일을 한 것입니다. 에베소의 안정을 위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폭동과 소동이 계속 발생하면 로마로부터 심한 질책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서기장은 에베소 출신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서기장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41절에서 어떻게 합니까?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까? 불법 소동으로 인하여 로마로부터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번 소동은 아데미 신상을 통해 돈벌이하는 자들로부터 시작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서기장의 말에 귀담아들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기장의 말은 들은 사람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기장의 논리적이고 합당한 연설은 에베소 사람들을 자진 해산하게 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야 합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나서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행19장은 놀라운 장이지 않습니까? 누가는 우리를 성령이 오신 것을 듣지도 못한 제자들에서부터 바울이 만진 손수건을 통한 치유와 상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친 스게와의 일곱 아들 그리고 아데미 여신을 통한 연극장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바울의 전도 여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교회를 세워가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한 기간은 3년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전도 여행을 하며 사역한 지역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일꾼이요 복음의 사명 자였습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잘 결합 된 복음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의 섭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것을 이용하여 돈벌이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종교를 이용하여 돈벌이하는 자였기 때문에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데미 여신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위해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더메드리오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릴 것입니다. 하여튼, 더메드리오는 소동을 일으킴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서기장의 연설은 오히려 소동을 잠재웠습니다. 서기장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기 일에 충실한 행정관이었습니다. 서기장은 에베소의 질서와 회복을 위해 한 것입니다. 서기장의 연설은 소동을 잠재웠으며, 군중을 해산하도록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라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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