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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4:1-9
강설날짜 2020-04-12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2QzyRWAStjY

바울을 고소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 그리고 더둘로(행24:1-9)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늘 강조했습니다. 교회론을 잘 배운 분 그리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시는 신자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동의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임에도 왜 다르게 모이는 것입니까? 하나의 예배당에 교회 즉 신자들이 다 함께 모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다 함께 모일 수 없기 때문에 각각 예배당에 모이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예배당에 모이는 교회를 지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큰 교회에서 여러 지역에 제2성전 또는 그들만의 지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교회론을 잘 못 오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에 매 주일 같은 시간에 삼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왜? 주일날 모이는 것입니까? 안식 후 첫날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며 초대 교회가 예배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신자들은 매 주일이 부활주일이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승구 교수님께서 강의하신 것이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습니다. 참고해 주십시오. 지팡이 교회는 감사함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예배당에서 모이지만, 성도의 교통 즉 신자들이 서로 교통하는 한 몸이며 지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을 사용하여 우리의 믿는 바를 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을 보시면 “거룩한 공교회” 또는 “거룩한 공회”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의 거룩한 교회 즉 신자들을(성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교회인 신자들은 주 안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부활을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신자들은 부활의 약속을 믿으며 이 세상에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지상명령을 감당합니다. 그러기 위해 모이는 교회로 예배와 흩어지는 교회로 예배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만 지상명령을 삶의 예배로 감당합니까? 아니면 이웃 교회만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까? 12 사도만 감당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는 누구나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의 역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명령으로 감당하며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신자들과 함께하심으로 교회가 온 누리에 세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행23장을 4주에 걸쳐 강설했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공회에 서다”이고, 공회에서 천부장의 개입으로 사도 바울을 죽이지 못한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을 죽이기로 공모한 무리가 금식하며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생질을 통해 음모를 알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생질은 공모가 무엇이라는 것을 천부장에게 진심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벨릭스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에 바울을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치 군사작전을 하는 것처럼 바울을 안전하게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바울이 어떻게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는가를 지팡이 교회는 저번 주에 강설로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예루살렘의 최고 기관이었지만, 참으로 무능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있고, 높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선배님들이 예언한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을 박은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왜 사도 바울이 저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신분과 통치가 더 중요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지식입니까? 맘몬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학벌 등 입니까?

 

오늘 말씀은 “바울을 고소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 그리고 더둘로”입니다. 그들이 왜 고소하게 되었는지 성경을 읽은 성도는 알 것입니다. 우리는 고소에 대한 강설을 듣기 전 저번 주 강설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천부장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바울은 총독 벨릭스에게 도착합니다. 그 여정은 어떠했습니까? 전투하는 군인처럼 강행군이었습니다. 바울만 총독에게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편지도 있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바울에 대해 상세한 보고였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에 대해 보고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보내는 자와 받는 자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총독은 황제로부터 위임받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낸 것입니다. 바울의 사건은 로마법으로는 이상한 것이 없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은 유대법과 관련된 것이라고 총독에게 보고했습니다. 천부장은 잘 알기에 로마법으로 죄를 발견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는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질문합니다. “어느 영지 사람이냐”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은 간단하지만 중요했습니다. 바울이 어느 지역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재판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받은 바울은 다소 출신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총독이 길리기아에 속한 다소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소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이며, 헬라의 자치 도시이고 군사적 중심지요 학문과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정치적으로 수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독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총독은 당신을(바울) 고발하는 자들이 오면 너의 말을 듣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잘 마무리될 때까지 바울을 헤롯 궁에 있도록 하며 군사들에게 지키라고 명하였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기억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바울을 고소하러 온 자들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왔습니다. 그들을 통해 믿음을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강설 제목을 보시면 그들이 어떠한 신분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1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바울을 고발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온 자들은 ‘대제사장 아나니아, 어떤 장로들, 변호사 더둘로’였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 관한 심문을 미리 마친 뒤 고발할 자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고발한 자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그들이 도착한 것입니다. 바울을 고발하는 자들은 대단한 분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우두머리로 어떤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호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더둘로가 이방인이며 전문적인 변호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유대법과 로마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뛰어난 언변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더둘로에 관한 기록은 오늘 본문에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방인 법률 전문가와 율법의 전문가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한다는 것은 최고의 고발이었을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고소인들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 닷새 만에 재판이 열린 것입니다. 법정의 재판장은 벨릭스 총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시면 재판에 대한 절차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로마는 피고인에 대한 고소인의 고발이 있고 난 뒤 법정에 배석한 상태에서 심문이 시작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판사는 벨릭스 총독이고, 고발자는 아나니아, 장로, 더둘로였습니다. 고발을 당하는 자는 바울이었습니다. 먼저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에게 찬사를 늘어놓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더둘로는 언변의 마술사처럼 벨릭스 통치로 인하여 ‘이 민족이’ 당신 때문에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크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둘로가 라틴어로 ‘선견’ 즉 “미리 알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총독 벨릭스가 “신의 예지”를 소유했다는 표현입니다.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부와 찬사를 통해 재판을 제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독립하고자 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온 누리를 통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해 좋은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좋은 이미지가 있겠습니까? 더둘로가 이렇게 찬사를 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재판은 총독의 결정에 따라 유제와 무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둘로는 총독에게 찬양하며 당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력자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당신의 영향력에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당신은 위대한 총독임을 지금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벨릭스 총독은 매우 흡족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은 그래 그렇지 하며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둘로의 찬사는 이런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사건에 개입하면 좋지 않습니다. 바울로 인하여 반란이 일어나면 좋지 않습니다. 총독과 유대인과 서로 적대감 일으키지 마십시오. 바울의 재판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찬사는 이처럼 교활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의 재판을 담당하는 벨릭스 총독이 쉽게 마무리 못 하도록 하는 찬사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둘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관용으로 잘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4절을 보시면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더둘로는 언변의 마술사처럼 더욱 돋보이도록 합니다. 벨릭스 총독님에게 찬양할 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재판을 해야 합니다. 불편하더라도 관용으로 잘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더둘로는 총독이 불편하지 않도록 매우 간단하게 중심만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너그럽게 들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총독을 존경하고 극찬하니 잘 부탁합니다는 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소하는 자들은 일정한 죄목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바울은 로마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염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전염병은 전염성이 높고,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염병과 같은 자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전염병은 형편없는 사람에 대한 욕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바울은 로마에게 치명적인 전염병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 대해 분노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발자들은 바울이 로마를 위태롭게 하는 정치적인 우두머리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로마법을 어기고 다른 종교를 믿도록 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이단의 우두머리인 바울이 당파나 분파를 만들어 로마를 무너뜨리고자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속주 국가가 반란이 없도록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사전에 차단할 수 있도록 보안법이 있었습니다. 더둘로는 이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소는 마치 예수님을 떠 오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청치적 선동죄로 고소되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바울도 같은 죄목입니다. 그래서 더둘로는 예수님처럼 바울을 처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둘로는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고발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발은 로마의 법과 무관합니다. 성전을 더럽게 한다는 것은 재판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를 드러낸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을 모독하는 것은 즉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법에 죄목에 들어가지 아니하는 성전모독 죄를 중요한 죄목으로 넣었습니다. 정치적인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면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과 더둘로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강설을 듣는 우리는 고소인들처럼 되고 싶습니까?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성도님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구원자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나그네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 이제 7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7절이 없습니다. 성경책을 보시면 괄호 안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6하반~8상반 없음)이라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개역개정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떤 사본에는 “유대인들이 바울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려고 했으나 천부장이 바울을 빼앗아 갔다”고 더둘로가 말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본은 별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6절에 근거하여 ‘우리가 잡았사오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입니까? 우리는 행23장을 알았기 때문에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공회가 바울을 잡아서 가두었습니까? 총독에게 사실처럼 말하는 것 같지만,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이 고유한 직권으로 바울을 체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안전을 위해 체포한 사람은 천부장 루시아였습니다. 아쉽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에는 없는 구절이기에 자연스럽게 넘기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더 알고 싶으면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 질문해 보면 완벽하게 알 것입니다.

 

언변의 마술사 더둘로는 바울을 고발한 후 8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더둘로는 총독이 직접 바울을 심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제기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장이 직접 확인해 줄 것을 이야기하며 더둘로는 마무리했습니다. 왜 더둘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자신이 고발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길 수 있다는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야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해야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더둘로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했으니 총독이 바울을 심문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그리 좋은 말이 아닙니다. 바울의 변론도 듣지 않고 무조건 심문하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법정은 서로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더둘로의 고소가 끝나자 9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은 뭐하고 했습니까?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을 동원했는지 모르겠지만, 법정에 모인 유대인들은 더둘로의 말이 사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군중을 이용한 것처럼 아나니아와 장로들은 유리한 판결을 위해 유대인들을 이용하였습니다. 교활한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지팡이 교회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성경을 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천부장은 바울을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보냈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의 사건을 쉽게 마무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벨릭스가 통치하는 지역 중에 예루살렘이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도 듣지 않고 사건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독단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고발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온 것입니다. 언변에 능통한 더둘로가 있어도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어떤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법정에 참석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벨릭스 총독이 흔들리도록 위협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에게 유죄를 선포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재판이 열리자 더둘로는 총독을 높이 칭송하며 이렇게 고소를 했습니다. 바울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자입니다. 바울은 전염병과 같아서 많은 유대인을 선동하여 반란과 폭동으로 들고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평화를 무너지도록 하는 반역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바울의 무죄를 쉽게 선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소자들은 치밀한 계획을 준비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고소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고 고소했습니다. 성전 모독죄는 로마법과 관련이 없지만, 산헤드린 공회의 강력한 요구 즉 바울을 우리에게 넘기던지 유죄를 선포하라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고 무지하면 이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학력이 높고, 신분과 권력 등이 높다고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산헤드린 공회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믿음은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만큼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도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믿음과 나의 믿음이 높고 낮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동행하고 있는가입니다. 바울이 힘들 때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며 주의 길을 가도록 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길은 아니어도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주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바울과 함께하셨던 주님이 나와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실망하지 마십시오. 이 또한 지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로 부르신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거룩한 공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삶이 나를 속일지언정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기에 푯대를 향하여 죽음의 길이라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부심을 누리시기 소망합니다. 집에 돌아가서도 오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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