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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4:10-19
강설날짜 2020-04-19

고소당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다(행24:10-19)

 

오늘은 빵에 관해 이야기하며 강설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 중에 일부는 빵을 좋아할 것입니다. 구약을 보아도 빵은 중요했습니다. 오늘날도 중요한 먹거리이기도 합니다. 빵집 중에 생각나는 이름은 대체로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신자들은 어느 가맹점을 좋아 할 것 같습니까? 파리바게뜨입니까? 아니면 뚜레쥬르입니까? 각자 성향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기 전 이름의 뜻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파리바게뜨는 프랑스어라는 것을 쉽게 알 것 같습니다. 뜻은 “프랑스빵 또는 프랑스 막대기(지팡이)”입니다. 막대기 모양의 빵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뚜레쥬르는 대한민국 CJ푸드빌이 운영하는 체인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뜻이 있는지 아십니까?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뚜레쥬르이지만 프랑스어로 “매일 매일” 즉 “온종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신자들은 성경과 연결해 생각하면 어떤 것을 선택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뚜레쥬르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아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이 성경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회사는 기독교 회사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성경에서 나오는 뜻과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은 시편 1장과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라면 시편1편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중에 2절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입니다. “매일 매일”과 2절과 어떠한 관계인지 아십니까? 서로 같은 뜻인데 번역하기 나름입니다. 왜냐하면, “주야”와 “매일 매일”은 온종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같은 뜻입니다.

 

오늘 강설을 듣는 지팡이 교회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야로 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종일 동행하는 성도이며 교회입니다. 매일 매일 동행하는 지팡이 교회는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도 즐거운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신자들은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를 통해 온종일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성도입니다. 주님의 양식을 먹는 신자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로 증명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때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때를 바라보며 “매일 매일”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며 생명의 양식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는 행복한 성도입니다. 말씀을 잘 먹기 위해 먼저 지난주 강설을 요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설 제목이 말씀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 그리고 변호사 더둘로..”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고소함으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지 못한 자들은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온 이유는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대단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어떤 장로들은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벨릭스 총독도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재판에 압력을 넣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변호사인 더둘로였습니다. 더둘로는 유대법과 로마법을 잘 아는 변호사였습니다. 바울을 고소하는 더둘로는 언변에 능통한 자이기 때문에 벨릭스 총독에게 극찬합니다. 총독은 매우 흡족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했기 때문입니까? 벨릭스 각하 때문에 우리는 태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선견 즉 신의 예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리한 판결을 받기 위한 교묘한 찬사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어떠한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바울의 생사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죽일 기회라면 거지말을 해도 좋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전도를 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무리와 함께 있다면 참된 교회로 돌이키도록 성경을 잘 전해야 합니다. 벨릭스 총독에게 찬사를 늘어놓은 더둘로는 자신이 하는 말을 너그럽게 들어달라고 합니다. 바울은 전염병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무너뜨리도록 하는 전염병이요 이단의 우두머리 바울이라고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정작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바울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교묘한 방법입니다. 더둘로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벨릭스 총독께서 바울을 심문하여 확인해 보라고 하며 마무리했습니다. 더둘로의 고소가 끝나자마자 법정에 참석한 유대인들은 “이 말이 옳다 주장”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변호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더둘로가 유창한 언어의 마술사처럼 고발해도 재판장인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 대한 죄명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을 석방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고발한 자들을 의식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변론의 기회를 줌으로 벨릭스 총독은 판결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고발자들의 은근한 압력은 쉽게 벨릭스 총독이 거절할 수 없도록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변론 기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 어떤 장로들 그리고 변호사 더둘로와 다르게 정직한 마음으로 변호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바울은 간단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에게 한 말들과 대조적이기도 합니다. 더둘로는 총독에게 찬사을 하며 바울의 유죄로 이끌어 가고자 했습니다. 반대로 바울은 진실한 마음을 통해 무죄를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의 첫인사는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이 이스라엘에서 여러 해 동안 통치해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환경과 종교적 사건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바울을 재판하는 시기는 벨릭스 총독이 가이사랴에서 어느 정도 지난 때였습니까? 대략 3년 또는 5년 정도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가이사랴 이전에 사마리아에서 거의 10년 정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벨릭스는 유대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10절에서 ‘이 민족의 재판장’이라는 말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더둘로가 3절에서 말한 것과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해방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더둘로는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라고 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바울은 더둘로와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이 민족의 재판장’이라고 함으로 로마와 이스라엘 민족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무죄를 받기 위해 더둘로처럼 찬사를 하지 않고 간략하게 인사말을 한 것입니다.

 

간단한 인사말을 한 바울은 11절에 어떻게 변론을 시작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입니다. 더둘로가 고발한 일체의 협의를 부인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기간은 ‘열이틀’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온 이유는 당연히 예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온 이유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전염병과 이단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둘로는 정치범 즉 로마의 평화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자로 몰고 가지만, 바울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는 것입니다. 더둘로가 5절에서 고발한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기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간이 짧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활동과 가이사랴에 있는 기간을 합친 것을 생각하면 사도 바울이 이단의 우두머리로 폭동을 일으킨다는 쉽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변론합니다.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입니다. 더둘로가 고발하는 전염병과 이단의 우두머리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론하면서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17절을 보면 무엇을 하고자 예루살렘에 왔는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이었습니다. 성전에 예배하러 온 것은 어려움을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구제할 것과 제물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동은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바울을 해치려는 음모였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피해자였습니다. 더둘로의 이야기를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내세울 것 즉 증거도 없으면서 날조해서 무고한 자신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벨릭스 총독이여! 저들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을 전해달라는 요청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구제와 제물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발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증명한 후 이제는 결정적으로 더둘로의 고발이 거짓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둘로와 같이 고발하는 자들이 불순한 의도라는 것입니다.

 

더둘로가 고발한 내용 중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한 것에 대하여 바울은 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바울은 자신을 고발한 자들에 내용을 반론한 후 무엇이라고 한 것입니까? 나는 정치범이 아닙니다. 이단의 우두머리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또한,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을 고발하는 자들과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은 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치범이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저들이 고발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15절에서 저들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유대인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부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 중에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부활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즉 악인도 부활한다고 합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악인도 부활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악인은 기독교의 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같이 부활을 받지만, 서로 다른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영원한 삶의 부활입니다. 반대로 악인의 부활은 영원한 심판을 당하는 지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팡이 교회는 지상명령을 복음으로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꽃이라고 하는 부활을 믿는 신자들은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의와 희락과 화평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처럼 부활을 소망하는 자신도 하나님 앞에 양심으로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시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선한 양심으로 노력했다는 바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렇게 요약해 주신 것을 제자들로부터(열두 사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바울은 이방인이 예루살렘을 돕고자 한 것을 가지고 전달자로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기에 유대인을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언제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선한 사람입니까? 바울은 자신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아 그리고 어떤 장로들과 더둘로와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바울처럼 우리고 낮은 자세로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오게 된 두 번째 이유를 말합니다. 17절을 보시면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구제의 헌상 즉 헌금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모금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성도이며 하나의 교회입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든지 하나의 거룩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기독교의 공동체로서 주님을 믿는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에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방인은 예루살렘 신자들을 위해 구제의 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은 더 유익한 성도의 교제를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것으로 대가가 없는 헌금이었습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행21:26-28절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압축하여 말합니다. 18절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성전에서 붙잡힌 사건을 진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례를 행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례를 한 것도 유대인의 법에 따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실제로 고발해야 하는 자들과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법정에 없다는 것을 깨닫자 변론을 간략하게 마무리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그들을 법정에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사도행전을 강설로 들었기 때문에 바울이 결례를 한 것도 유대인의 법 절차에 따라 했던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이 문제에 관한 것은 천부장 루시아로부터 편지를 받은 벨릭스 총독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변론하는 바울은 19절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입니다. 이 말씀처럼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고소하리라는 것입니다. 고발하는 자들이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판장에서 증언할 증인이 없었습니다. 바울을 고발하는 자들은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재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자들은 거짓이기에 화들짝 놀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정에서 위증하는 것은 어떠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변론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이 고발하는 것은 거짓이니 위증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고발자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법정을 쉽게 이끌어가고자 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고소당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다”라는 뒤 이야기를 강설로 듣겠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지내는 이야기를 통해 사도행전의 흐름을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바울을 고발한 자들은 “나사렛 우두머리 이단”과 “전염병”과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고소를 당한 바울은 자신을 변론해야 했습니다. 고소하는 자들은 대단한 법률가였지만, 바울은 혼자 해결해야 했습니다. 고발을 당한 바울은 법정의 재판장인 벨릭스 총독에게 변론합니다. 로마의 평화를 무너지도록 하는 소동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오랫동안 예루살렘에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시간상으로 폭동과 내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동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 증인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발자만 있을 뿐 증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고소하는 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도 너희들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단이라고 하지만, 나도 하나님의 도를 믿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단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가 아님을 변호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고 고발하는 자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변론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썼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늘 하나의 유기체요 조직체이지만, 세상에서 바울과 같이 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고난을 겪어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굳건하게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처럼 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바울이 변론하는 가운데 늘 함께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을 아는 바울은 벨릭스 총독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매달리며 자신을 변론했습니다. 신학이 높든 학문이 높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 해결하고자 애쓰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의 공동체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같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늘 신자들과 동행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즉 온종일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온종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주야로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양한 지식과 학문이 있어도 주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을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영의 양식을 먹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먹을 양식도 준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단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매일 매일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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