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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0;44-48
강설날짜 2019-02-24

베드로의 강설 중에 성령을 부어 주심(행10:44-48)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에 대한 특별한 계시의 책입니다. 누구나 성경을 통해 구원으로 초대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진 성경을 통해 당신님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세상 사람이든 성경을 통해 참된 길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만 도를 닦으면 터득하도록 하는 비법이나 비밀은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심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전하여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은혜와 평강과 진리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28:19-20절에서 지상명령을 부탁 하셨습니다. 얼마나 유명한 말씀인지 세상 사람도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상명령의 핵심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슬람처럼 무조건적으로 믿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를 삼기 위해 선교나 전도를 해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아 채우라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여 이상한 방법으로 예배당을 채우라는 것입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제자란 진실하게 신앙고백하면서 믿는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세례를 주라는 것이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표지가 말씀의 강설(가르치는 것)과 성례(세례와 성찬)이고, 지키게 하라는 것(기도와 권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는 세 가지 원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할 때 주님께서 명령하신 뜻대로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개신교요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지팡이교회는(합신) 주님의 제자를 삼기 위해 무조건 사람을 많이 모이게 하는 방식보다 교회론이 바로 세워져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신사도운동으로 멍들어 가는 시대에 바른 성령론이 세워져갈 수 있도록 성경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즉 지극정성이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최소한 지옥은 면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는 사람만 많이 모이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명령하신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바른 신앙 고백을 통한 지속적인 성장″을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 ″한 성도를 세우고 양육하여 세례 받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지팡이교회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지난 주 강설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강설(설교)하다”이었습니다. 고넬료로부터 귀한 대접과 교제를 하면서 베드로는 강설을 합니다. 베드로만 열심히 전했던 것이 아니라 고넬료와 친척과 친구들이 마음의 양심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강설하면서 처음으로 전한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11-12절)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환상을 통해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던 종교적이고, 인종적 편견에서 벗어나 이방인도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외모를 보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한 교회요 성도는 주님의 은혜로 “양자”됨을 받은 백성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외모도 보지 않고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안 베드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하면서 43절은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도록 하게 하심으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을 신앙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만 하면 즉 나의 열심과 열정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택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어떻게 백성을 이끌어 갔습니까? 결국 비극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심으로 “화평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통해 우리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지니신 분으로 ‘화평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즉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임마누엘”로 오신 것입니다. 고넬료가 이해할 수 있도록 로마인들이 이방인 신들을 지칭하는 “만유의 주”를 사용하여 유일하신 신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강설에서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면서 했던 일들을 전한 후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라고 강설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화평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인물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은 백성은 누구나 지상명령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가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고 세례를 줄 때 복음의 메시지는 언제나 성경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특히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상명령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신자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잘 알 수 있도록 “선지자도 증언”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되게 믿는 신자들은 임마누엘이 있는 행복한 교회입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강설 중에 성령을 부어 주신 것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베드로는 부름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사도만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도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는 것이 가장 좋은 교회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먼저 4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지난주에 고넬료에게 강설한(34-43절)것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닙니다. 행10장 본문이 길어서 나누어서 강설하지만 말씀의 강설과 성령의 부어 주심은 같은 날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강설을 계속 하고 있던 중에 고넬료의 집에 모인 이방인 모두에게 임한 것입니다. 마치 오순절에 모인 120명의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처럼 고넬료의 집에서도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누구나 완전하고 동등한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이 끝나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하고 있던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서 성령의 부어주심은 베드로가 성령이 임할 수 있도록 유도하거나 어떤 초청이나 도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성령운동을 한다는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무엇보다 본문의 사건은 안수나 세례 없이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점이 오순절 성령의 임재 때와 유사하다는 것은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가 어떤 의식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어떻게 임했는지 기록을 하는 것이 45절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미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의 임재를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 일어난 임재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도 같은 성령이 임하리라고 상상하면서 강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 즉 유대인들도 놀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유대인들의 절대적 신념이 무너진 것입니다. 안수를 한 것도 아니고, 세례를 주었던 것도 아닌 말씀의 강설 중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부어주신 환상의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할 때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원받을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어떠한 특별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닌데도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놀란 가운데 성령께서는 순간적이고, 시청각적으로 고넬료의 집에 모인 이방인에게 임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이 임하도록 조작하거나 이상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은혜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방도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해 이단들처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나는 단지 순종함으로 성경의 말씀대로 준행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을 믿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45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에 집에 간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직접 성령이 임한 것을 목격하도록 한 것은 선교의 정당성을 증언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행11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를 하고, 그 이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잘 알 수 있도록 누가는 46절에서 방언에 대한 것을 기록을 합니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왜 이렇게 기록을 하는 것입니까? 결코 쉬운 구절이 아닙니다. 방언을 주신 것은 아마도 이방인에게 성령의 임재와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해 할례를 해야 하는 조건 없이 그들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오순절 사건과 같은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방언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고넬료의 집에 함께 했던 베드로와 유대인들이 성령이 임했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여튼 베드로의 강설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고넬료에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는 미완료 형으로 그들이 계속해서 강설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는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은혜를 부어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찬양 행위가 노래였는지 말로 표현했는지 아니면 방언으로 찬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같이 높여 드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알았습니다. 또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세례를 줄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47절을 보시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방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해도 같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이처럼 구원은 외적인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을 성령께서는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세례를 베풂으로 신자들이 성전으로 지어져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세례를 준 것은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입교시키는 데 아무 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사람이든 주는 사람이든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례를 줄 때 함께 참여하는 신자들도 그냥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같은 고백자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서로 교제를 하면서 사귐의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함께 가르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함께 준행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입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축도도 자신의 이름을 넣어 하는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아니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48절을 보시면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베드로는 같이 동행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가 직접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같이 동행한 유대인들이 주도록 한 것입니다. 즉 위임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이방인들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편견과 장벽이 무너지도록 임한 성령은 이제 교제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유대인의 의식 절차인 할례를 받지 않고 서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더 머물렀는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행11:1-3절로 미루어 보아 그곳에 머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지팡이교회 성도님, 오늘 강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초청을 하시는 것이고 성령을 선물로 임재 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이 성도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것을 따르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바로 이것을 한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이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도록 한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구원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과 십자가의 사건 그리고 부활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 즉 믿음입니다.

 

사귐의 공동체가 있는 성도님,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언을 하느냐 아니면 못하느냐가 아닙니다. 신사도 운동을 하는 분들에게는 중요하지만 성경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핵심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와 방언은 이방인인 고넬료와 우리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음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이루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행1:8절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을 알도록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성경을 난도질하면 마치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사건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두 주님의 제자이지 베드로파, 사도 바울파, 목사파, 장로파, 집사파 등이 아닌 것입니다. 직분은 봉사의 섬김입니다. 외모로 구원을 받는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이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술 취한 것처럼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고넬료에게 임한 은혜처럼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외모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위 있는 당신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증인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필요성과 중대성을 성령의 임재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에게 이방인들도 성령의 역사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누구나 아무런 제한 없이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방언을 하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됨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지팡이교회는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을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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