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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3:14-25
강설날짜 2019-04-14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iuxKoFfsY3o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행13:14-25)

 

세상 사람도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 잘 모르지만 사도신경과 주기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미디어의 발전과 신자들이 전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아마도 가장 먼저 암송할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자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공예배에 “해야 된다”, “안 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실제로 유럽 일부 개혁교회와 침례 교단은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세례에 대한 고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사도신경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천지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장로교회는 더 하는 것이 그들과 구별하는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종교 개혁가였던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사도신경 구조를 사용하여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사도신경은 “삼위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가장 핵심이 요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바르게 하는 것은 성경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지팡이교회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은혜의 방도를 통해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지난 주 강설을 기억하십니까? 바나바와 사울이 이방인 최초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파송의 주체는 안디옥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성령이라고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를 통해 구브로에 갔습니다. 두 사람만 같이 간 것이 아니라 마가도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구브로의 가장 번창한 도시인 “살라미”에 도착을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회당에서 전하였습니다. 그런 후 바보라는 지역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는 가운데 누구를 만났다고 했습니까? “바예수”라고 했습니다. 그의 실제 이름은 “엘루마”로 마술사라는 뜻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고 있는 가운데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마술사인 바예수가 두 사람과 대적하며 총독이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성령이 충만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라고 하면서 말한 것입니다. 바예수는 바른 길을 굽게 하는 거짓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 즉시 맹인이 되어 미래를 본다는 선지자는 자신을 위해 돌보아줄 사람을 찾아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총독은 보고 믿었습니다. 교회가 확장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 하심으로 놀라운 이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최초의 교회를 통해 바울과 바나바가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한 은총이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 강설에 이어서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을 하여 복음을 전하는 내용을 강설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요한은 바보에서 출항하여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 무슨 문제가 발생합니까? 사도행전의 저자는 요한 마가가 선교여행 중 왜 떠났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하기 전(행15:37-39) 요한 마가 때문에 논쟁을 한 것을 보면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자들은 바나바의 사촌 동생인 요한이 질병과 위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교를 그만 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른 이유로는 안디옥의 지도자였던 바나바가 선교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데 바울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마가가 불만을 가지고 떠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방인 중에서도 로마 총독이 회심을 하는 것을 보면서 화가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도 많이 말하지만 우리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행15장을 통해 더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요한 마가는 골4:10절과 딤후4:11절을 보시면 바울이 인정하는 믿음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서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꾼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도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 강설에서 구브로는 큰 섬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으로부터 구브로, 이제는 밤빌리아 지역의 버가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잠시 복음을 전한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런 후 두 사람은 어디로 향합니까? 14절을 보시면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을 하려면 산맥을 넘어야 하는 험준한 길입니다. 이 지역은 로마 군인들도 통제하기 어려운 강도들이 이곳저곳에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은 해발 1080미터 고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정착해 생활했고, 로마로부터 지방 자치권과 세금 감면 해택도 누렸다고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곳에 도착하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을 때의 상황을 기록을 합니다. 15절을 보시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입니다. 당시 예배 순서는 회당장이(장로) ‘율법과(모세요경)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 권고의 말씀을 누구에게 부탁을 하곤 했습니다. 오늘 여기서는 회당장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권고의 말씀을 청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에게 부탁한 것입니까? 회당장은 그들의 소문을 많이 듣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권면의 말씀을 전하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가마리엘 출신으로 랍비이기도 하였습니다.

 

권면 말씀을 부탁 받은 바울의 모습은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전한 부분 중 첫 번째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족장들의(아브라함, 야곱 등) 선택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강설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당장으로부터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어느 장소이든 가르칠 때는 앉아서 하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어나 한 것입니다. 온 마음과 한 뜻으로 오직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개종한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할례를 받지 않았으나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으며 유대인과 같이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들에게 경청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진실한 복음을 들으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17절을 보시면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신들의 족장들인 조상들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족장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제나 명심하고 있는 유월절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떠 오르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구별하여 높인 후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출애굽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자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인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강설은 스데반이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는 자신들의 마음이 찔려 오히려 스데반을 죽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18절에서 출애굽한 후의 광야 생활을 이야기 합니다.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오래 참으시면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해서 가나안까지 직선거리로 아무리 멀어도 400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직선으로 가면 일주일 정도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가축과 노약자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면 한 달이면 족히 도착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달이 아니라 40년 동안 걸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운전을 하다보면 “우회”라는 표지판을 볼 때가 있습니다. 멀어도 돌아 가라는 의미입니다. 우회하라는 것은 마치 표지판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내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광야 생활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함축함으로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름으로 바울은 19절에서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고 강설합니다. 멸한 족속은 “헷,기르가스,아모리,가나안,브리스,히위,여부스”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한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땅을 주시기까지 사백오십 년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굽에서 종 살이 하던 400년, 광야 생활 40년입니다. 그런데 10년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나안 땅을 정복한 년 수입니다.(참고로 사사 시대는 사무엘 이전까지 약 380년간 지속되었고, 사무엘이 사사로 앉으면서 활동한 기간이 다윗 왕까지 이어지는 70년간으로 계산할 경우 450년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은 450년 동안의 이야기함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묵상할 수 있도록 한 것 같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바울의 강설을 들었을 때 조상들의 역사를 다시 재확인 했을 것입니다.

 

광야 생활에 대한 것을 말한 바울은 이제 20절과 21절에서 사사 시대와 선지자 사무엘을 이야기 합니다.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입니다.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 나라를 보니 왕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과거에 종살이 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방 나라의 왕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삼상12:13절에 “이제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한 절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무엘상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세상 나라들처럼 인간 왕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무엘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의 왕의 문제점을 말씀 해 주셨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분노하심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호13:11절을 보시면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함으로 결국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이는 결과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하나께서는 왕을 달라는 요구에 사울 왕을 주신 후 22절을 보시면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입니다. 사울 왕을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울 왕은 백성들이 요구하여 세운 것이지만,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왜 바울은 다윗 왕을 소개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에 뛰어들기 위한 도약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함으로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구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왕임을 드러나도록 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 왕의 계보에서 메시야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 왕을 통해 구원의 메시야의 초점은 23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하면서 분명히 합니다. 다윗 왕의 씨 즉 계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로부터 많은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의 말이 무엇인가를 짐작했을 것입니다. 특히 사무엘이 아닌 나단 선지자를 통해 무슨 언약을 주셨습니까? 삼하7:12절에서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었다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왕과 맺은 전통적인 왕이요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다윗왕과 맺은 언약만이 아니라 수난의 종, 인자, 대제사장 등으로 묘사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정치적이요 군사적인 메시야로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을 오해함으로 생명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처형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회당 안에서 다윗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설하면서 24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을 언급 합니다.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공간복음서에서 말한 대로 사도행전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기록을 합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존경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했다는 것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더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 바울은 25절에서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 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 나는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강설을 함으로 메시야에 대한 정체를 확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 주 강설로 배우겠지만 부활의 사실성에 더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를 하지만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구원의 완성도 그 분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여 주신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강설로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강설을 하면서 청중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강설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강설은 목사를 위한 것도 아니요, 성도를 높여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영광을 받는 분은 삼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올바른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 오해하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때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삶이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희락과 화평, 평강’으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증거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내주하여 주심으로 힘을 주십니다. 

 

성전으로 예배하러 갈 수 없는 자들이 회당에 모여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있었지만 바울과 같이 강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의 강설은 참된 구원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바른 강설을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한 것입니다. 바울의 강설은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바울은 잘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알기 위해 성경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외면하는 것은 참된 신앙인가를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보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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