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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4:1-7
강설날짜 2019-05-12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Uxnn4Ia3rHQ

이고니온에서 전도하는 바울과 바나바(행14:1-7)

 

이 시대를 보면 기독교를 개독교로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사건이 생기면 그 사람은 개독교인이 아닌가?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현실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급속도로 불신앙의 길로 가는 시대에 주님을 믿는 것은 더욱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원한 영생이 있지만, 불신앙의 길로 가는 자들에게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예배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도록 예배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든, 적게 모이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상한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속이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지 사람이 왕처럼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고자 하십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이런 시대에 목회자는 돈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그리고 오늘날과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바르게 인도하십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와 제자장, 왕이었고, 신약시대는 사도였습니다. 그 후로는 신자들에게 널리 복음이 전하여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들을 세우심으로 주님의 교회를 든든히 하시고 있습니다. 저도 당연히 목회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말씀의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님 중에서는 목회자를 “말씀 봉사자”라고 하였습니다. 말씀 봉사자는 신자들이 장성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는 신자들은 든든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오늘도 저는 말씀의 봉사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봉사자를 세워 전하는 오늘, 풍성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오늘부터 강설할 행14장은 13장에서부터 기록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13장과 14장의 공통점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면 언제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언제나 같지만, 오늘도 지난주 강설을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바울이 다음 주에도 강설하여 주기를 원했습니다. 초청을 받은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하나님의 길을 온전하게 가야 하지만, 반대 견해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이 다시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을 듣기로 한 날이 된 것입니다.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듣는 것을 거부하여도 성령은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개독교라고 하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견인”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과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한 것과 일치를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가득한 자들은 바울이 전한 것을 비방하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기보다는 “장로들의 유전”을더 믿은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에도 성경을 믿기보다 유명한 목사의 말을 신봉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단을 따르는 자들은 성경을 믿기보다 가짜 목사를 신봉하는 것입니다. 회당에서 강설이 끝난 후 사람들이 두 사도를 따랐습니다. 이번에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비방과 반박을 당하면서도 두 사도는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위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한 후 어디로 갔습니까? 이고니온입니다. 이고니온으로 떠나기 전 사도들이 한 행동을 기억하십니까? 비방과 반박을 하는 자들을 향해 “발의 티끌을 떨어” 버렸습니다.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나올 때 하는 행동이었지만, 두 사도는 경고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것은 너희들이 심판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방과 반박을 당해도 바울과 바나바는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우리도 증인 된 삶을 생활할 때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며 주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으로부터 12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이고니온에 바울과 바나바가 도착합니다. 이고니온에 도착한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한결같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입니다.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휴식하기보다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고니온은 중앙 소아시아의 높고 풍요한 고원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이 도시는 비옥한 평야와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과 동쪽에는 높은 산들이 솟아 있습니다. 휴식하기에는 좋은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아시아의 다메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메섹이라고 하는 이유는 물이 풍부하고 날씨는 온화하며 초목이 무성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분의 구별 없이 믿기로 한 것입니다. 복음은 성경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믿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오늘 본문에서도 두 사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바나바도 사도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일꾼이었고, 안디옥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과 1차 선교 여행을 동행한 사역자였습니다. 간략하게 먼저 답변을 하면 좁은 의미로 사도는 교회를 창설하는(비상직원 또는 기초직원) 열두 사도만 칭합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바나바를 사도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사도운동을 하는 분들이 자신을 사도로 칭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도 시대 이후에 등장한 신앙의 선배님들도 ‘사도’가 아닌 ‘속사도’나 ‘교부’로 불렸습니다. 사도들의 제자들도 자신들을 사도라 하지 않고 속사도 또는 교부라고 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사도 시대 이후에 사도로 불린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 자신을 사도라고 하거나 특정인을 사도라고 추종하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신학적 용어로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개혁교회이든, 장로교회라도 특히 칼빈은 직분을 목사, 장로, 교사, 집사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도에 대한 권위를 이해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특히 엡4:11절이 중요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입니다. 그냥 읽으면 오늘날에도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도는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묘사하는 반면 디모데를 "형제"라고 묘사합니다(참조: 롬 16:23; 고전 1:1; 고전 16:12). 다른 곳에서는 디모데가 사도이지만(참조: 살전 2:6), 바울과 동일한 사도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성경의 사도는 다양한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도를 한 가지 의미로 국한해서 생각할 때 생기는 오해입니다. 말의 의미는 항상 그 말의 사용법에 따라서 결정되는 법이라고 노승수 목사님은 이야기합니다. 사도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는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사도에 대한 특강을 함으로 자세히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지만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같은 현실에 처합니다. 2절을 보시면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입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대해 순종하지 아니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을 선동하여 악한 감정을 가지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집단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비방과 반박을 하면서 핍박을 한다는 뜻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시고 보냄을 받은 그들은 역시 그들과 달랐습니다. 왜입니까? 같이 욕설한 것이 아닙니다. 3절을 보십시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라고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핍박을 당한 후 신발의 티끌을 떨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핍박을 당하지만, 자신들이 더 오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3절에서 ‘악감’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악감을 가지도록 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들은 서로 악감을 가지지 않고 잘 생활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와서 이야기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충동하여 필연적으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좋은 사이로 지내고 있었지만, 바울과 바나바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유창한 말을 하는 자들이 와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10: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분열을 한다는 뜻입니다. 가족이라도 애인이라도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극단적인 분열을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극 아닙니까? 이렇게 극단적인 분열이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고니온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 두 사람을 반대하는 자들은 선동하여 악감을 가지도록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바울과 바나바는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했습니까? 저희 때문에 분열이 생기었으니 그러지 ‘마십시오’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지역에 더 머물면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다른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여기서 순교를 한다 해도 담대히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메시지는 늘 한결같이 예수님이 누구신가입니다. 두 사람은 말하는 방식을 바꾸어서 이렇게 말하든, 저렇게 말하든지 늘 성경의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상한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사람만 많이 보이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장소는 달랐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냄을 받은 자의 사명입니다. 우리도 두 사람처럼 성도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지팡이 교회는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두 사람에게 함께하시는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시고 있다는 것을 ‘표적과 기사’로 보이셨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이 예언의 성취에 대한 것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표적과 기사가 있어도 현실은 어떠합니까? 주님을 믿겠다고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까? 4절을 보시면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입니다. 이고니온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선동을 당한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어떻게 합니까? 5절을 보시면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입니다. 계획적으로 두 사람을 모욕하여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연합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했습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무례하고 모욕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조롱하고 학대를 했습니다. 여기서는 육체적인 상해보다 언어적인 폭력으로 괴롭힌 것입니다. 이것이 통하지 않자 돌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돌로 친다는 것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사형이기도 합니다. 돌로 죽인다는 것은 죄인에 대한 저주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사울이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을 죽였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울이 스데반과 같은 현실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그들이 해야 할 사명이 있기에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러한 음모를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입니다. 이고니온 사람들이 무서워서 도망한 것이 아닙니다. ‘도망’이라는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단순히 폭력을 두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핍박하는 자들과 무리한 충돌을 피하려고 다른 곳으로 피난하여 옮겨 간 것입니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표현보다는 피하였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기독교가 대중적이며 크고 부유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원하는 현대의 번영 신학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오직 복음만을 전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이고니온에서 ‘루가오니아’라는 지역으로 이동을 합니다. 루가오니아의 두 성 즉 루스드라와 더베를 루가오니아의 도시로 말함으로써 누가는 이고니온이 루스드라와 더베와는 다른 지방에 속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 도시는 모두 로마의 갈라디아 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지역을 다스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나누어서 통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도 무엇을 합니까? 7절을 보시면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이고니온으로부터 도피를 하여 루가오니아로 오면서도 복음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지역에 도착해서도 한결같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핍박을 당해도 복음이 위축되지 아니하도록 오히려 더 많은 지역을 다녔습니다. 6절에서 도망이라고 번역했지만, 7절과 연결하여 보면 어떠합니까? 이고니온에서 그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두려워해서 숨어 버린 것이 아니라 충돌을 피해 활동 무대를 옮겨간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환경에 구애받고 있지 않습니다. 환경과 지역에 구애를 받는다면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방과 핍박을 당해도 변질되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불신앙으로 인한 행동 앞에는 무력함을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전도할 때는 불굴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먼저는 하나님의 보내심에 근거하고 다음에는 전도자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도 같은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런 후 가서 복음의 증인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피신하도록 하심으로 순교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가 순교자의 피와 희생으로 이어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것을 공식화시킬 수 없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하에 진행되는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바울과 바나바의 피신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른 것으로서 그들이 처한 상황과 여건하에서는 ‘순교자의 피’ 보다 ‘전도자의 발걸음’을 더 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피신은 부끄러운 후퇴가 아니라 지혜로운 발자취입니다. 그들의 발자취는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움직임입니다. 복음은 어떤 순간에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정지하고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유대 지역으로부터 중동지역으로 그리고 유렵과 미국으로 확산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한국에도 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멈추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주를 힘입어’ 담대히 전한 결과는 오늘날 복음이 증거되도록 했습니다. 복음이 증거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시기에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증거될 때 소란이 일어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십니다. 지팡이 교회도 주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진정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각자 필요한 은혜를 주실 줄 믿으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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