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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12-26
강설날짜 2018-05-13

지팡이교회는 예배당에 모여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서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교회요 성도인 우리는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구원의 복음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타락한 종교처럼 구원을 위한 좋은 설교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개그맨처럼 웃기는 강설을 바라고 있습니까?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면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여 주시기를 믿는 신자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듣고 있는가? 복음인가? 아니면, 구원을 위한 좋은 충고인가? 성경은 굿 뉴스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복음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더욱 군사다운 강인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지어져가는 지체요 성전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길동무로 함께 가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교회는 지난주에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강설을 들었습니다. 복음서마다 다 기록을 한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만 기록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것에서만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재림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밀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은 비밀이 아니라 공개적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지상 사역의 마무리이시며 하나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통치하고 보존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있으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도 지상대명령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을 믿으면서 주의 길을 잘 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에서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초첨의 첫 시작을 오늘은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에서 모여 한 일들”이라는 은혜의 방도인 강설을 들으십시오. 먼저 1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예수님의 승천이 감람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거리는 대체적으로 914미터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걸어서 가기 알맞은 거리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베다니”라고 합니다.(눅24:50)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2.4키로미터 떨어진 장소입니다. 그러면 같은 저자인 누가의 기록 중에 하나는 가짜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해서 기록을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언급을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보다 세밀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감란원과 베다니는 같은 방향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감람원으로 기록 하는 것은 아마도 유대인이 잘 알고 있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감람원이라는 감람산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기 전 하루를 쉬신 바 있고,(마26:16) 뿐만 아니라 당신님의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신 후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되었던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곳도 바로 이 감람산이었습니다.(마26:30) 이처럼 감람산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무리하시는 데 중요한 활동 무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즉 독자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집중하도록 하면서 예루살렘과의 연관성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성령의 임재 후에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까지 지상대명령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을 친절하게 13절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유대인에게 다락방은 위층 또는 옥상에 있는 가장 아늑한 거실입니다. 대략 120명이 올라 갈 수 있는 장소로 보면 아주 넓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여 학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락방 앞에 정관사가 쓰인 것으로 보아 독자들은 어딘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후 마가는 제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 한 후 마지막 인생의 길을 선택 했기 때문에 제외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소개한 저자는 14절에서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니지만 그들과 함께 기도에 몰입한 사람들로 소개합니다. 제자들과 여인들과 예수님의 동생과 함께 서로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지체요 성전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블어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사이기도 합니다. 과거 그들은 서로 자신이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노력한 자들이었고, 배신과 상처로 인간성에 상처가 난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하나가 되어 여인들과 예수님의 동생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지도자로 발돋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모두 예수님을 결국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자발적으로 모였던 것이 아닙니다. 이 처험 구원은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냥 주무시고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함께 하시면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죄를 지었다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죄를 회개를 하면 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 같지만 결국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탄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 하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어도 당신님의 말씀을 깨달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를(우리)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면서 교회로 부르시고 성전으로 지어져갈 수 있도록 함께 하십니다.

 

14절에서 ‘기도에 힘쓰다’라는 동사를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동사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이렇습니다. “~에 부여하다. ~을 굳게 계속하다. ~에 헌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럼 점을 생각하면 기도는 초대교회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한 후에는 제자들은 기도를 했고, 종교개혁자들도 기도를 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헌신은 어떠합니까? 우리교회의 현실도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도 당신님의 제자들에게 가장 좋은 기도인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 당신님의 사역을 마무리를 하면서도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기도를 헌신적으로 실천할 때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자기의 신앙만이 정통이며 보수라는 아집과 편견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협력하여 성전으로 지어져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14절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후 사도행전의 저자는 15절에서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락방에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에 대해서 ‘약 백이십 명’이라고 합니다. 왜 120명으로 기록을 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무의미하게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것을 전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당시 “다락방에 모인 무리의 수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수이며(녹 22:30),당시 산헤드린공회의 규칙에 의해 하나의 공동체가 그 자체적인 공회를 가지기에 합당한 수(최소 120명)” 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 전통을 생각하면서 교회의 기초를 시작하면서 하나의 공회를 구성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대표는 예수님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베드로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어부 출신임을 아실 것입니다. 새로운 일을 하려면 우리는 누구를 선택하기를 원합니까? 특출한 지도자,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 기획력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 학력이 높고 재산이 있는 사람 등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부를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면 전문가를 택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어부는 바다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수제자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아도 베드로는 연약한 제자였고 배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이고 베드로도 같은 제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나선다고 할 때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그 동안 함께 했던 베드로를 떠 올리면서 삿대질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락방에 모든 약 120명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성령을 사모하고 갈망하면서 기도합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베드로가 나서는 것입니다.

 

왜 베드로가 나서는지 17절부터 말씀하여 결국 26절에서 “맛디아”를 12명의 한 사도로 뽑습니다. 먼저 16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라고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마태복음 강설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국 스스로 다른 길을 선택하여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가륫 유다의 배반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를 하지 마십시오. 유다는 계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도록 한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이미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예수님를 따르던 자였으며(요12:4-6),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다를 이미 아셨습니다.(요 6:70),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팔아넘길 자임을 아셨음에도 그를 곁에 두고 그가 배신하기 전까지 다른 제지들과 동일한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 즉 이스라엘을 대표로 모였을 때 베드로의 등장은 가룟 유다를 대신하는 사도를 선출해야 하는 정당성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16절을 다시 읽어 보면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즉 구약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시69:25절과 시109:8절은 배신의 길을 간 사도를 대신하여 다른 사도를 뽑는 것의 성취임을 베드로는 전달하고 있습니다. 17-20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가룟 유대의 배신은 우연히 아니라 구약에서 말씀하신 뜻대로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님을 배신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로 택하신 것은 가룟 유다를 향했던 크신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12사도에 포함하여 부르셨고,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최후의 만찬에서도 같이 식사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돌이키지 않고 탐욕을 따라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이런 상황을 제자들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모두 배신자이기도 했습니다. 서로 쑥스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나설 때 서로 민망할 것입니다. 아직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을 때이기도 합니다.

 

왜 하필 기도를 하고 있는 중에 사도를 뽑아야 하는 것입니까? 베드로의 연설을 통해 새로운 사도를 뽑아야 하는 것이 성경이 예언한 내용의 성취라는 점을 알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열두 사도를 임명하셨다.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13절은 의미 있게 기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죽음은 사도 중의 한 사람의 결손이기 때문에 사도의 전체성이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21-22절은 아주 의미 있는 발언을 베드로는 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입니다. 왜 성령이 임재하기 전 새로운 사도를 뽑아야 하는 것입니까? 왜 열둘이 중요한 것입니까? 열한 명이면 어떠합니까? 열둘이 중요 했다면 부활하신 후에 즉각적으로 예수님이 뽑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 지상대명령을 감당하도록 하시면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도의 빈자리를 채우라는 말씀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22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신적인 사역이기에 당신님과 함께한 제자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진 존재일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기 시작했음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있으면서 지상 사역은 당신님의 제자들에게 위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베드로 자신의 스스로 사도를 뽑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명령에 대한 당연한 순종으로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은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할 사람을 뽑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들은 사람들은 23절에서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많은 대상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적합한 ‘요셉과 맛디아’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안식일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별명은 유스도입니다. 역사가인 유세비스에 의하면 요셉은 불신자에 의해 도전 받을 때 주님의 이름으로 독을 마셨으나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맛디아는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맛디아는 70인의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두 인물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자세히 기록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쉽기도 합니다. 요셉을 부각시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가장 유역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력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제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기보다는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잘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베드로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도하여’라는 복수를 사용함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대신 하여 사도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 즉 봉사직입니다. 오늘날 직분자를 오해 하지 마십시오. 봉사직입니다. 더욱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높이고자 하는 섬김이 아닙니다.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이고 복음의 증인 자로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직분자를 세울 때 봉사의 섬김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봉사의 섬김을 통해 서로 간에 화목을 이루는 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맛디아가 열두 제자들 중에 한 사람으로 제비 뽑기로 선출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선출을 한 것은 구약 시대에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당시 사도들은 제비를 뽑아 사도의 빈자리을 채웠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이 방법이 성경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12:1-3절에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죽임을 당했지만 뽑지 아니한 것은 사도의 임무를 충실히 하다가 사망하면 선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보면 진리에 대한 내적인 확실성을 상실하는 시대입니다. 말씀의 강설은 마치 개그맨처럼 웃겨야 하고, 목회자의 성공을 위해서 듣기 좋은 강설을 하는 시대입니다. 구원은 충고 적이고, 수준 높은 이야기만 해야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무차별하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너희들이 전해도 ‘예수님의 모습은 없다’라고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를 위한 복음 증인 자 이십니까? 베드로는 분명하게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혈연을 뛰어넘는 영생의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처럼 부활을 목격하지 못 했으나,날마다 예수님과 교제하며 당신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증거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같은 제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활 신앙을 가지고서 부활을 증거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로 예수님이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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