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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37-42
강설날짜 2018-06-10

베드로의 오순절 강설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강설은 열정적이고 뜨거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권능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라는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섬세하고, 치밀하고, 지혜롭게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강설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충만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과 공생애 동안 동고동락함으로 말씀을 듣고 삶을 통한 배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을 보시면 사람들을 억지로 개종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상을 보면 위험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회개시켜 주기를 바라고, 교회당에서나 특별한 집회 장소에서 죄의 고백을 하게 하도록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능력과 카리마스적인 권세를 보여 줌으로 신뢰하도록 하는 것은 성경적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향력 있는 힘을 보여 주면 복음이 잘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목회자를 믿도록 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지난 주 목요일에 “김용의 선교사와 복음학교”에 대한 공청회를 합신 이단대책위원회에서 했기 때문입니다. 공청회를 한 것이지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아닙니다. 이대위는 결과에 대한 것을 총회에 보고 하여 총대들이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양성경 특히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많은 이적과 기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앞에서 놀라운 신비적인 권능을 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처럼 체험적인 신앙을 통하여 믿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점을 악용하여 그들만의 이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즉 체험하도록 함으로 믿도록 하는 것은 ‘상상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아니한 자가 체험을 함으로 은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들에게 “지상대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1: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증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슬람처럼 이상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자신에게 이루어진 열매와 결과를 누리면서 특별한 계시인 성경의 말씀을 자신에게 이루신 일을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들의 사역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할 때 이상한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교회가 타락하도록 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역사상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여 즉 이상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베드로는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성령이 임재를 했지만 신비적인 방법이 아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증인으로 전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섭리가운데 예수님을 독생자로 보내어 주셨지만, 너희들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이용하여 죽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강설의 시간은 ”제 삼시“로 우리의 시간으로는 오전 9시입니다. 새 술 즉 포도즙을 먹고 취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간은 예루살렘에서 제사하러 온 사람들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가 한 말씀을 인용하여 말세에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어서 새로운 시대에 ’하나님의 큰 일‘을 하시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오순절 성령사건을 기록하면서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을 넘어 종말의 마지막 사건들이 어떻게 발생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오순절 성령 강림은 남녀 구분 없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임하지 아니했다면 그 사람은 거짓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각 사람에게 한량없는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의 강설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예언할 것이요, 환상을 보고, 꿈을 꾸리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구속 사건에 대해 증거하고 선포하는 사역은 성령을 받아 새로운 차원의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이 요엘서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우리를 ‘새 술’에 취했다고 하지만 이제 잘 들어 보시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성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복음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요엘 선지자의 말을 하면서 예언과 환상 그리고 꿈을 꾸리라는 과거의 그 모든 것이 ‘성령강림’사건으로 가장 큰 은사와 능력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분이 메시야이며 그 분이 성육신으로 오시어 여러 가지 증거와 말씀 그리고 생활로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이 십자가에 어떻게 했는지 생각하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다윗 왕이 이미 예언한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그 자손 가운데 “주”가 약속하신 대로 그 보위를 계승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 보좌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즉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함으로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을 우리들은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베드로의 사역과 신약교회의 메시지의 제목이요 신앙고백의 내용이기도 하였습니다.(롬10:9, 고전12:3)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베드로의 강설에 의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말씀을 들으십시오. 베드로의 오순절 강설을 들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우선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성경의 말씀을 전함으로 권위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구약성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강력한 도전을 안겨 주었습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에 대한 강설을 들은 사람에게 마음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신비적인 방법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지혜롭고 설득력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설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탄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음성을 들은 베드로는 38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두 개의 명령 동사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는 그들에게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는 것이고,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회개와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되는 구원 메시지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니 당신은 죄인입니다. 왜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지팡이교회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즉 로마의 힘을 이용하여 십자가에 너희가 못을 박아 죽였으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회개를 한 사람들은 유일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접붙임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접붙임을 받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가능하여 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에게 있어서 회개하라는 것은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세례를 받아야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칠성례 중에 “세례성사”가 있습니다. 그래야 최소한 지옥은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비경성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칠성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비성경적인 것을 만들어 사제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목사이든 장로이든 누구나 교회요 성도요 신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제주의를 만들어 놓음으로 지옥과 천국을 누가 결정하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신부가 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 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세례를 받으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세례가 중요한 것입니까? 눅3:3절을 보시면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했고, 베드로는 벧전3:21절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함으로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회개는 죄인이 세상으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성령은 회개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세례를 받도록 하십니다. 자신의 양심으로 나도 당신들과 같은 신앙고백을 하겠다는 외형적인 선언이기도 합니다. 선한 양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오직 주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없는 곳에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죄 사함과 세례는 연결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유대교에서 시행해 왔던 회개와 사죄의 외적 상징으로 물 세례(행13:24, 행18:25, 막1:4)와는 판이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말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일 뿐 아니라 성령을 받는 일과 관련된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38b절을 보시면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죄 사함을 누리는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이 당신님의 통치 아래 머물도록 격려하고 돕는 보혜사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새 언약 백성 공동체 즉 교회에 소속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옛 성전을 대치하는 하나님의 새 집과 새 성전이 되었으므로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롬8:15-17절을 잠시 보았으면 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내가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확증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후사가 되었음 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상속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세속적으로 귀족과 왕처럼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증인 자로 생활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는 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양자된 자녀로서 상속자지만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르려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베드로는 성령의 선물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온누리의 이방인들을 위한 것임을 3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자신의 사상이나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즉흥적으로 제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는 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만 아니라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고 참되게 회개하는 모든 이방인에게도 약속하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믿는 이방인까지도 보편적으로 주어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십시오.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내가 입으로 시인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은혜를 주실 때 자연스럽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진실하게 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성령이 임한 것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든, 약자이든,가난한 자이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베드로는 강설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계속적으로 권고하며 훈계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스스로 나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법정에서 판결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시면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베드로는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증거 하는 것이고, 엄중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본문에서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베드로가 하였다는 것을 ‘여러 말’이라고 계속하는 것이고, ‘확증’하여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강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을 확인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법 없는 자들을 이용하여 죽였으니 얼마나 패역한 시대였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만 패역한 시대입니까?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패역한 시대입니다. 종교지도자들처럼 말씀으로 고의적으로 속이고 그 시대의 그릇된 정신을 신봉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눅9:41절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권면을 들은 사람들은 베드로의 가르침대로 무엇을 받습니까? 41절을 보시면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을 때 기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혼자 삼천 명을 하루에 세례를 준 것입니까? 물론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일반 적으로 물 세례를 유대인이 아닌 자가 유대교로 개종할 때 베푸는 의식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이 세례는 개종한 자가 과거에 범했던 모든 부정함을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강설을 듣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 세례를 받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적 충격이었고 또한 의미심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여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가르쳐 주셔도 베드로의 강설처럼 삼천 명이나 변화되어 세례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더 대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부활과 승천하신 후 성령강림 후에 일어나는 사건임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베드로는 숟가락만 올려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공생애 동안 배운 것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강설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돌이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내가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 즉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이기에 ‘나’의 행함과 믿음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롬7:24절의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성화의 과정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던 사도 바울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늘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공로로 성전이 되어가는 나를 알고, 늘 하나님으로 인하여 복음의 증인 자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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