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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7:35-43
강설날짜 2018-10-28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4(행7:35-43)

 

오늘은 종교개혁 501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해 저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에 스텝으로 참여 하였습니다. 각 신학대학원의 교수님들이 모여서 행사를 했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주변의 교회를 둘러보아도 교회의 현실은 성경적인가라고 물어볼 때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루터를 준비하신 것처럼 그런 목회자들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교회는 어떠한 모습이었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루터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했을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예배당을 크게 짓는 것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 잘못된 꿈은 좋은 스승님들을 만나면서 무너지고 교회론을 바르게 세워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목회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성장한 교단인 합동 총회헌법 중 신조 서문을 보시면 "대한예수장로회에서 아래 기록한 몇 가지 조목을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승인할 신조로 삼을 때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를 설립한 모(母) 교회의 교리적 표준을 버리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 소요리문답은 더욱 우리 교회 문답 책으로 채용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합신 목사 임직 예식의 선서를 보시면 “노회는 예정한 회원으로 임직에 적합하도록 설교한 후 노회장이 정중히 취지를 설명하고, 청빙 받은 자로 하여금 친히 노회장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서케 한다. 1) 본인은,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습니다. 2) 본인은, 본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에 교훈한 교리들을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합니다. 3) 본인은,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신종할 것을 선서합니다. 4) 본인은, 주안에서 같은 직원 된 형제들과 합심 협력하기로 선서합니다. 5) 본인은, 목사직을 구한 것이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6) 본인은, 어떠한 핍박이나 반대를 당할지라도 인내하고, 충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보호하며, 교회의 성결과 화평을 위하여 힘쓰며, 성실하게 사역할 것을 선서합니다. 7) 본인은, 신자요 겸하여 목사가 되겠은즉 자신의 개인 관계의 책임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와 직무에 대한 책임을 성실히 실행하여 복음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하사 봉사하게 하신 교회 앞에 경건한 모범을 보일 것을 선서합니다.”라고 하면서 목사 임직을 받습니다.

 

각 교단마다 헌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들어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이 고백한 것으로 성경을 잘 가르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 주보 첫 면을 보시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지팡이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저에게 언제나 희망과 용기를 주는 글이기도 합니다. 목회자로서 선서 한 것을 지키기 위한 격려이기도 합니다.

 

지팡이교회는 3주 동안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라는 강설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날로 강설을 듣게 되고, 다음 주에는 스데반의 순교를 듣게 될 것입니다. 스데반은 유대교에 대한 종교개혁을 한 일꾼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순교였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만 일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 고백하는 지팡이교회이든 누구든지 즉 신자들은 일꾼입니다. 일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복음을 전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일꾼이십니까? 세상에서 법조인, 정치인, 회장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보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일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면서 자녀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자녀의 성공적인 인생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가 믿음의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 일꾼이었습니까?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 일꾼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지혜와 성경으로 말함”을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담대함으로 자신을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믿음의 족장과 유대인이 잘 알고 있는 선지자와 왕을 통해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 “관리와 속량하는 자” 즉 재판장으로 세우심으로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출애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삭, 야곱, 요셉을 통해 그리고 모세의 시대에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출애굽은 쉽게 이루어지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애굽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선지자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결국 이스라엘은 출애굽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거부한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자신이 긴 강설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드러냅니다. 모세가 구약시대의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라는 것을 스데반은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속자로 삼으시기 위해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세워지기 바라지만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세워져야 일꾼입니다. 스데반도 일꾼인 것처럼 모세도 하나님의 충실한 일꾼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로부터 버림을 당했지만 가족의 생명을 구원한 것처럼, 하나님의 지도자로 또한 구속자로 세움을 받은 모세는 거절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르심은 인간적인 힘에서 기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직 신적인 힘과 능력으로 기원됨을 본 절에서 스데반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공회의 회원과 스데반을 거짓 증인으로 세운 자유민들(디아스포라)에게는 굉장히 마음을 찌르는 일입니다. 36절을 보시면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내심으로 구속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홍해와 광야에서 모세가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이야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것을 모세를 통해 드러낸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강설에도 잘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행2:2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이런 말씀을 알아도 믿지 못하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보면 출애굽을 하던 시대와 신약교회의 현실을 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37절에서는 그토록 스데반이 말하고자 한 강설의 핵심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있는 공회는 깜짝 놀랐을 것이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신18:15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모세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통치자요 구원자가 아님을 상기시키면서 누군가를 생각하도록 한 것입니다. ‘나와 선지자를 하나님이 장차 세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을 죄 가운데 건져낸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거룩한 계시를 모세에게 주셔서 예언한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세를 배척한 것처럼 예수님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출애굽으로 해방 한 것처럼, 로마로부터 구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한다는 오늘날의 현대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38절에서 스데반은 모세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면서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유민들이 거짓 증인을 세워 주장한 것에 대해 스데반이 생각하는 율법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모세의 율법을 잘못 생각한다는 고소 내용이 근거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광야교회’라는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과 거룩한 계획을 이루어야 할 이 광야의 회중 즉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했지만 결국은 목적을 향해서 행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교회는 이 땅에서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면서 구별된 백성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만 구별된 백성이라고 생각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구원하신 것처럼, 광야교회인 너희들도 온누리에 ‘생명의 도’인 즉 생명의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자신이 전하는 도가 그 ‘생명의 도’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36절의 첫 시작을 무엇이라고 하고 있는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38절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이것을 인크루조 구조라고 합니다. 잘 보시면 ‘이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심코 넘어가기 쉬운 단어이기도 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선지자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모세가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기사와 표적을 행한 것을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에게 세우신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것처럼 39절을 보시면 모세도 어떻게 됩니까? 출애굽의 의미를 알고 있는 백성들은 그러면 광야교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수여자를 거절할 뿐 아니라 그 법을 우상 숭배 등으로 깨뜨렸습니다. 그러면서 더 놀라운 것은 어디로 다시 가고자 한 것입니까?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교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하기 전에도 모세를 배척하였고, 출애굽한 광야 교회도 다시 모세를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만 배척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지금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애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기도 하지 않고, 애굽에서 당했던 노예 생활이 잠시 당하는 광야 생활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것을 스데반이 지적한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하는 행동이 마치 광야교회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은 40절에서 직설적으로 과거 우상숭배를 지적합니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를 하기 위하여 아론에게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그들은 수 없이 ‘표적과 기사’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홍해의 기적을 알면서도 조그마한 시험도 감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잠시 동안 모세를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면서 더욱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지금 너희들도 그들과 같이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9절의 말씀을 생각하면 교회도 이와 같은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41절을 보시면 실제로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가짜 신들을 섬기기 위해 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이용하여 제사하며 기뻐한 것입니다. 송아지는 애굽 사람들이 섬겼던 황소의 신이고 다산의 상징인 “아피스’입니다. 애굽의 생활을 그리워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다시 애굽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림으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그 중에 다섯 번째가 가축의 돌림병이었습니다.(출9:1-7) 가축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애굽 사람을 구분하셨는데도,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배척 한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 계속해서 즐거워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스라엘도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반역한 사실을 강설함으로 지금 너희들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던지신 질문을 인용합니다.(특히 암5:25절입니다.) 본문 4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 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고 하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광야교회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로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광야교회와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 위함인데 이스라엘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광야의 군대 즉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을 표기하고, ‘하늘의 군대’를 섬긴 것입니다. 하늘의 군대라는 것은 태양, 별 등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17:3절에서는 “일월성신”이라고 하여 금지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조상들의 우상 숭배를 지적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일들을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까? 부정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스데반은 질문을 해 놓고 곧 바로 43절에서 부정적인 답을 합니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것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우상 숭배를 한 것입니다. 몰록은 아모리 족속이 섬긴 신입니다. 몰록은 놋쇠로 만들어져 있으며,황소 머리에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형태를 지닌 것이라고 합니다. 왕하23:10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즉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우상의 팔 가운데 어린아이를 산 제물로 바친 후 밑에서 불을 사용하여 어린아이를 태워 죽여서 복을 빌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 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레판의 별’은 애굽, 앗수르 사람들이 숭배했던 별의 우상으로서 토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암5:26)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결국 성전의 의미를 상실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성전을 장사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광야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할 당시에도 구약의 광야처럼 또 다른 경험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이스라엘 땅과 성전을 중요시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를 모르면서 외형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스데반은 거짓 증인 자들이 고소한 것으로 다시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스데반의 강설은 구약의 말씀에 근거하고, 역사적인 사실을 강조함으로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보시면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이 불순종을 하면서도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무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너희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과거의 조상들과 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세상을 좋아하면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들과 같은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스데반과 같은 신앙으로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광야교회인 이스라엘처럼 죄악에 몸부림치면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삶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신앙 고백하는 신앙인이요. 신자들이라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스데반과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생각한 성전의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막11:17절에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집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백성이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당신님의 백성이 자기의 사정을 기도로 아뢰면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내 산 광야에 성전은 없었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곳에 임하여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해 내시기로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의 의미는 언약의 백성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강설에서 마음의 신음 소리를 내면서 호소라는 음성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옛 언약과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과 상충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분개했던 것처럼 스데반의 강설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처럼 죽이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종교입니다. 지도자들은 자신을 위한 종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들과 같은 것으로 신봉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강설은 실패한 이스라엘의 역사와 새로이 시작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대조되는 새로운 교회 즉 새로운 이스라엘이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성도요 신자들로 구성된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모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묵상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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