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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5:1-13
강설날짜 2017-12-17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을 말하면 ‘성경’책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이든 신약 시대든 성경을 읽고 싶어도 읽기 힘든 것이 성경책이었습니다. 읽기 힘든 가운데에서도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전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많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보급화 됨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위에만 보아도 편의점, 미용실 보다 더 많은 것이 무엇입니까?하면 예배당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인 아니면 예수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님만 의지한다고 고백하지만 세상의 힘인 돈을 더 의지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주일이면 신앙고백(사도신경)을 사용하여 우리가 믿는 바를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께 고백을(상징적) 하지만 맘몬을 더 의지하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주위의 교회를 보아도 프로그램은 즐비하게 돌리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까? 또한 목사님을 유심히 보십시오. 자신의 박사 학위를 자랑 하면서 강설(설교)를 하지만 성령의 감동은 더 많이 있습니까? 이런 시대에 주의 길을 잘 가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교회는 지난주에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마24:37-51)이라는 강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한 번 떠 올려 보십시오. 왜 깨어 준비를 해야 합니까? 이스라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어서 하나님은 당신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지만 그들은 부인하면서 결국 죽였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지만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를 잘 생각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지만 오히려 세상을 더 의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심으로 당신님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주의 재림을 전하여 주면서 무화과나무의 교훈과 깨어 준비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이야기를 하여 주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니라”고 하셨지만, 그 시대와 지금 우리의 현실과 같은 것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면서도 인자의 임함을 알지 못하고 더 맘몬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셨고,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께서는 ‘지혜있는 종과 악한 종’을 사용하시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지팡이교회는 영적인 긴장상태에서 주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 힘들겠지만 오직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질문인 “인간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를 생각하십시오. “인간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즉각적인 심판과 구원으로 그 누구도 예측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하시고,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심으로 영적인 긴장상태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마25장에서도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이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더디더라도 당신님이 오시는 것에 대하여 마땅히 예비하고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다시 오실 때 제자들이 충성되고 신실하게 남아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사용하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은 당신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알기 쉽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면을 강조하면서 말씀을 듣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열 처녀 비유”에서도 다른 비유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관한 것과 또 다른 모습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처녀는 결혼식에 참여한 신부의 친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무척이나 명예로운 일입니다. 처녀인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초대를 받은 자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를 받은 시민 즉 처녀는 진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분리됩니다. 신랑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시고, 결혼식은 그리스도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혼인 잔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무엇입니까? “천국은 마치......와 같다”입니다.(마13:24, 18:23, 22:2 등) 우리말 성경으로는 이 의미를 알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24장과 연결하여 보면 주의 재림은 미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미래시제를 사용하여 깨어 준비하라고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잘 알 수 있도록 신랑과 신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신부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교회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당신님을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지칭하셨습니다.(사54:4-5, 렘2:2)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9:14-15절에서 당신님을 신랑으로 말씀하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 신부는 그리스도인 즉 성도 즉 주님의 몸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의미를 생각지 않고 건물을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또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듣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을 읽는 독자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를 알기 위해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혼인 문화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 처녀는 신부의 친구들이고 그 당시에는 열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등”은 우리나라에서 과거 사용하던 집안에서 사용하던 등불이 아닙니다. 여기서 등이란 일종의 횃불입니다. 그 당시에 횃불로 대체적으로 15분마다 기름을 보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횃불 즉 등불을 들고 신랑이 오면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신랑이 오면 신부의 집에서 축하의 잔치를 하고 대체적으로 밤중에 신랑의 집으로 이동을 하기 때문에 횃불 즉 등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신부의 친구들이 횃불을 들고 신랑의 집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잘 알고 있는 일반적인 혼인 예식을 사용하여 비유로 말씀하실 때 그 의미는 우리들보다 제자들은 즉각적으로 잘 알았을 것입니다.

 

신부의 친구들은 횃불을 잘 준비해야 했습니다, 2절을 보시면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신랑은 더디 오고 언제 올지 모르는 가운데에서 신부의 친구들은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미련한 친구들은 3절에서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로운 신부의 친구들은 4절에서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의 신랑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깨어서 준비한 마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과는 대조적으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올 경우 기름이 다 소모될 것을 대비하여 그릇에 기름을 담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 처녀는 기름이 다하여 횃불이 꺼지지 않도록 용기에 기름을 담아 준비한 것입니다. 이런 슬기로운 신부의 친구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이 땅에서 미리 준비함으로 영적으로 깨어서 긴장 상태에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늘 깨어 준비하는 것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는 신부의 친구들에게 기쁨의 영광이 들리는 것입니다. 5-6절을 보시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당시 유대인의 결혼의 풍습에서 신랑이 더디 올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신랑이 더디 오는 것보다 그 누구도 알 수 없이 도둑처럼 오는 것입니다. 미련한 친구들은 시간이 걸리면 걸릴수록 잠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잠을 잔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긴장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데 세상의 맘몬을 좋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고백을 하지만 속으로는 세상의 맘몬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즉 모두 잠든 상태에서 ‘신랑이 도착’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모두 잠든 상태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큰 음성의 소리로 ‘보라 신랑이다. 너희는 그를 만나기 위해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두 부류는 확연하게 정신이 번쩍 했을 것입니다. 한 편은 기쁨의 소식이고, 다른 한 편은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7절은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련한 친구들은 슬기로운 친구들에게 8절을 보시면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무엇을 나누어 달라고 합니까? 기름입니다. 왜 기름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햇불들이(미련한 자) 꺼져 가기 때문입니다. 기름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으므로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인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다섯 명과 기름에 너무 의미 부여를 하면 알레고리적인 해석과 본문의 의미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은혜로운 강설(설교)이 될 수 있지만 본문의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여기서는 단지 미련한 친구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고 슬기로운 친구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영적인 긴장상태에서 준비한 것입니다.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친구들이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데 슬기로운 친구들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주지 아니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까? 신랑이 갑자기 올 때 기름을 나누어 쓸 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의도는 나누어 쓸 겨를이 없는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신부의 슬기로운 친구들의 대답을 통하여 알리고자 하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9절을 보시면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미련한 친구들의 등불은 점점 꺼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다급한 나머지 그들은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에게 기름의 일부를 나누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들려온 이야기는 단호한 거절입니다. 기름을 나누어 주기에 기름이 결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단호한 거절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나 자신의 소유를 이웃과 나누는 마음이 냉정하게 배제됩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방을 대신하거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원은 누구에게도 양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친구들은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알았을 것입니다.

 

미련한 친구들은 신랑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10절을 보시면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무엇입니까? 준비를 해 두었던 다섯 처녀 즉 신부의 친구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 간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친구들은 혼인 잔치에 갈 수 없도록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주의 재림은 갑작스러운 것이고, 그때는 무엇을 사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늦게까지 하는 상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모두 깊은 잠을 자는 가운데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회를 박탈당하는 비극을 맞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아무도 모르게 오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해야 하는 영적인 긴장상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신랑같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므로 교회는 주의 재림을 예비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처럼 주인이 올 때까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자가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오직 영광의 감사만 있지만 미련한 자들을 보십시오. 11절입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열심히 갈망하고 애결하지만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마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지팡이교회는 영적인 긴장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날에 슬피 울면서 통곡을 하여도 더 이상의 방법이 없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님을 존중하지 못했음을 탓하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12절을 보시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들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 아닌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겉으로만 신앙고백을 하고 속으로는 다른 맘몬을 사랑하는 자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하심으로 불신앙의 결과를 잘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13절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늘 잠도 청하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문자적인 의미보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영적으로 항상 깨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심판 즉 주의 재림은 오직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모른다면 늘 참된 신앙생활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항상 깨어 있음으로 주의 재림이 지연 되더라도 그때까지 세상의 고통을 참고 유혹을 이길 만한 충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점점 더 어두움이 깊어 가는 때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라고 하면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지만 맘몬을 더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주의 재림은 도적 같이 온다는 것을 알지만 영적인 긴장 상태의 마음이 무너지면서 정신 줄을 놓음으로 비참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교회가 정화의 능력을 상실함으로 세상으로부터 정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예배당에서는 신앙고백을 하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신앙고백을 하십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부흥을 시켜서 예배당을 크게 지으면 된다고 하면서 성도에게 쉼과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목회는 프로그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함으로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통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지 목회자 마음대로 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처럼 성장할 수 있지만 열 처녀의 비유처럼 결국 문이 닫힐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주여’라고 통곡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얻고 싶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슬기로운 신부의 친구들처럼 잘 준비하심으로 참된 구원을 얻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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