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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6:31-35
강설날짜 2018-01-28

우리나라의 역사 중에서 1945년 8월 15일은 광복절로 특별한 날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국경일로 만들어서 그 날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생각하여 기념하는 날을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해방하여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유월절에 대한 의미를 잘 드러내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면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동안 너희들은 수많은 유월절을 보냈지만 이번 유월절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왔던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그림자였지만 이제는 실체이신 당신님께서 오심으로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함으로 유월절을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심으로 실체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제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내 때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심으로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는 십자가의 사건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대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습니다. 은혜로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없는 가룟 유다를 드러내어 밖으로 스스로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심으로 가룟 유다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하면서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백을 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대제사장들에게 넘기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말씀도 듣고, 이적과 기사를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결국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은 삼십”에 넘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내니이까’하면서 다른 제자들처럼 부인하는 목소리에 합세를 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속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마음의 아시고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심으로 너가 진실을 말하였다는 의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에 성만찬을 제정하시는 자리에서 유다의 배신을 알리신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으로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사탄의 유혹, 인간의 결정과 책임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하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중대한 사건은 이런 복합적인 여러 이유 가운데 가룟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면서 당신님의 몸이라고 하심으로 과거 이스라엘이 유월절 떡을 먹음으로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먹음으로 구원을 누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기실 당신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제자들에게 먹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초대하고 계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양의 피를 가지고 문설주에 바름으로 구원을 얻은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주의 몸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신령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신령한 생명의 양식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귀한 복음의 증인자로 생활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가룟 유다가 배신 한 것은 일반인도 아는 상식일 것입니다. 또한 일반인도 잘 아는 상식이 오늘 말씀에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최후의 만찬에 참여를 하고 있는 제자들의 믿음이 견고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때 베드로 외의 제자들도 각자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룟 유다와 “도긴개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자들의 믿음이 강직하고 견고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은혜인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적이고 마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분문 3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는 가룟 유다는 없습니다. 가룟 유다만 배신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밤에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고 하심으로 제자들은 당신님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서 스스로 실족하여 넘어져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슥13:7절의 말씀을 이루신 것으로 보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목자이신 예수님을 치니까 너희들은 다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님이 실족의 원인이 되신다는 말씀으로 제지들은 예수님의 수난으로 인하여 실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님의 수난으로 인하여 스스로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여 주지 아니하면 인간은 마치 지푸라기와 같고 갈대와 같습니다.

 

베드로를 나라고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목회자인 저에게 질문을 한다면 ‘주님만이 아십니다’라고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위험에 처한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치 목자 잃은 양같이 두렵고 떨림으로 흩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신실하게 인내하시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제자들은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아마도 우울하고 절망적이라고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절망 가운데 한 줄기 소망을 주시고 있습니다. 32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부활을 가르쳐 주신 것을 여기서도 다시 가르쳐 확인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신 이후의 일들을 어렴풋이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부활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난 후’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망의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심으로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는 구체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갈릴리는 특별한 장소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곳이고, 부활 후 그곳으로 다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각자 흩어졌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다시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신다는 것은 목자의 이미지를 잘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0:4절에서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지만 당신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은 부인하지 않고 버리지도 아니하면서 선한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불러 모아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그들 중에 베드로는 늘 그랬던 것처럼 곧바로 이렇게 33절에서 말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을 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충성을 다하여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모습은 진실하게 대답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탄은 더 치밀하게 계획하여 무섭게 공격을 가한 것 같습니다. 사탄은 베드로에게 정신적인 영향력을 끼치면서 예수님의 수난의 분위기를 압도하여 큰 두려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보잘 것 없는 하녀가 한 말에 저절로 예수님을 부인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첫 시작을 보면서 베드로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베드로를 욕 하고 싶어도 이것이 죄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사탄이나 주의의 환경이 나를 힘들게 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각자의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홀로 있으면 저는 넘어지는 존재입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소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왜 갈릴리에 먼저 가서 기다린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고,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부활하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나의 신앙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울부짖어야 합니다. 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주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것이 믿음이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평소에 자신의 능력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하더라도 절망 가운데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주님만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곧 바로 34절에서 예수님의 슬픔과 한편으로는 애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하심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베드로가 얼마나 쉽게 자신의 맹세를 깨뜨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심으로 예수님과 제자와의 관계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한 모든 것을 부인하고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딛3:3절에서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부인하는 어리석은 불신앙의 모습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딛4:4-7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자기 의지에 따라 주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위기에 처한 것을 이제야 안 것 같습니다. 35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이라고 말함으로 그의 결심과 의지는 대단히 확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도 가까이 닥쳐오고 있는 위기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십자가의 위기를 예수님과 함께 맞이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강설을 듣고 있는 성도님,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따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닙니다. 신실함으로 묵묵히 끝까지 헌신하는 것이 믿음을 소유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흔들리는 갈대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것처럼 나의 마음이 갈팡질팡 해도 믿음의 뿌리는 흔들릴 수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반복되는 배신과 신실하지 아니한 모습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는 은혜는 한없는 아가페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제자들만 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과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자들처럼 십자가와 같은 현실에 처한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당신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사람의 힘이나 능력 그리고 지혜와 지식 등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아니하면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무능력함을 알려주심으로 오히려 더욱 예수님만 붙들 수 있도록 하시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더욱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고, 제자들이 견고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지 아니하면 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눅22:32절을 보시면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붙들어 주지 아니하면 그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을 감당할 수 없었지만, 갈릴리에 먼저 와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무너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진정으로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경건에 있어서 완벽한 자들을 제자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믿음과 경건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자신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저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 성령님의 깊고 신비로운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는 다 알 수는 없지만 유다는 돌이키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베드로는 일평생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수치스러운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더욱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요21:15절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림들보다 나를 더 사량하느냐”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헌신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늘의 사건을 일평생 기억하면서 제자의 본분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신앙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생각할 때 나의 연약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을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만을 더욱 의지하며 사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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