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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빌2:1-4
강설날짜 2022-10-09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o5WqHlqHTWY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생활(빌2:1-4)

 

사도 바울의 편지는 교회를 위한 사랑입니다. 자신의 몸을 돌보기 힘든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편지를 사용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사랑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사도의 권위보다 교회를 위한 바울의 사랑입니다. 누구나 사람은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름보다 교회를 돌보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교회인 우리도 나만의 세계관이 있겠지만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 즉 성경 말씀대로 생활하는 세계관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속에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 속에 박혀 있는 남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성경의 세계관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서 복음이 성령을 통해 전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겸손한 삶으로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삶으로 영적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도 바울은 종으로 일꾼으로 섬기었습니다. 복음이 진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빌립보서를 통해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 잘 알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생활을 위해 우리는 지난주 강설을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을 생활하고자 했습니다. 이제는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로마에서 자신이 사망하면 주님께서 계신 낙원에 함께 있기 때문에 좋으면서도 교회를 위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으로 있는 것이 교회의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섬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갈등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더 살고자 아등바등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믿음이 강건한 성도는 교회를 위한 마음도 있을 것이고, 주님의 품에 하루빨리 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평안의 삶을 생활하고자 하는 믿음이 많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느냐 죽느냐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음으로서 서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이 부분에 대해 교회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사용하여 신앙 고백합니다. 그 중에 “거룩한 공교회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교회는 어떠합니까? 각자도생이 아닐까요. 이런 시대에 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사도 바울의 권면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권면하기를 대적자들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적자들은 멸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 우리에게는 몸과 부활의 소망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교회는 “교회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세상 속에 있더라도 고난을 겪지만, 오히려 믿음이 강건해지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만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을 주시며 은혜로 이길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영광이요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것입니까? 빌립보서 1장에서 권면한 것을 확장하고 훈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의 개인적인 윤리와 도덕적인 고상함으로 알아서 잘하라고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경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 가능합니다. 예수님 없는 권면, 사랑, 위로, 교제, 긍휼과 자비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권면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위로를 받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교회로서 교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기관으로서 교회는 참된 긍휼과 자비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평안을 누리고자 말씀을 듣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권면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교회이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있는 것이니 늘 승리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니 서로 권면하며 위로하고 교제하며 긍휼과 자비로 연약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섬기러 오신 것처럼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가며 권면하며 위로하며 교제해야 합니다. 그럴 때 거룩한 공교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공동체로서 긍휼과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이기 때문에 긍휼과 자비로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글을 쓸 때 늘 “그리스도 안에서”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수 있도록 권면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으로서 기쁨으로 완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을 보아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말 번역으로 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글의 어순 때문에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문에는 1절과 연결되어 “기쁨을 완성하라”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기쁨을 완성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2절과 3절 그리고 4절입니다. 먼저 2절을 보시면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영광의 기쁨을 아는 일꾼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영광이라는 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도 그러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로 뜻을 합하며 한 마음으로 품어” 기쁨으로 완성하라고 하십니다. 빌립보 교회가 아직은 연약한 교회이기에 기쁨을 완성하라고 하십니다. 각자 알아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2절을 잘 보시면 “같이”, “같은”, “합하여”, “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마음과 사랑으로 같이하며 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태도도 중요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초대교회로 든든히 세워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유대 종교와 로마로 인해 그리고 내적으로는 분쟁과 불화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한마음이 되도록 하며 하나님께 영광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가도록 하십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기쁨이 될 수 있게 하려고 3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내적으로 힘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3절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야기하심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하십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할 때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면 교회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툼과 허영으로 이야기하면 좋은 가정이 될 수 있습니까?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가정도 다툼과 허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기관인 교회는 어떠하겠습니까? 거룩한 공교회는 거듭난 성도이기에 당연히 다툼과 허영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교회는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며 교리 교육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믿음의 선배님들은 유산으로 신앙고백과 교리 등을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가르치며 교회가 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거짓말이 좋은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이 말하는 영광은 사라질 영광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영광은 사라질 영광이 아니라 면류관의 영광 즉 구원이 있습니다. 영광의 구원을 위해 교회는 다툼이나 허영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행복하지 않았습니까? 마치 첫사랑과 같이 행복의 기쁨이 있지 않았습니까? 너무나 좋아서 말씀을 사모하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겸손 하고자 하는 것처럼 이웃에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우리에게 이웃을 낫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겸손한 삶을 생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도 겸손하셨습니다. 고난과 비방을 당해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가운데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생수의 강이 넘칠 때 순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예수님의 품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고자 하면 이웃도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사랑과 자비가 있을 때 겸손해질 수 있으며 이웃을 나보다 높게 섬길 수 있습니다. 겸손은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이 이런 마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쟁과 질투 등이 없는 아름다운 파라다이스와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사람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질투와 전쟁 등을 좋아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아도 어떠합니까? 사람이 참혹하게 사망해도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사랑과 위로 그리고 교제와 긍휼과 자비가 없습니다. 또한, 겸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높게 보지 않습니다. 다툼과 허영으로 인해 오히려 사람은 비참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으며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복음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4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기쁨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성도는 각자 자기 일을 잘 돌보며 이웃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웃의 이익만 추구하지 말며 자신도 잘 살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웃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부터 살필 때 겸손한 마음으로 교제하며 한마음과 한뜻으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을 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교회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웃음이 가득할 때입니다. 웃음이 있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실 때 웃는 모습이 가득할 때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사랑도 있고 열심도 있었으나 “다툼과 허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사랑을 받은 존재이기에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받은 존재이기에 기쁨의 영광을 위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성도요 일꾼이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며 기쁨의 영광이 되도록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야 하는 시민권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평안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은혜의 평강을 받으며 권면할 수 있으며 위로하며 교제하여 긍휼과 자비로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실 때 성령께서 이끌어주십니다. 그러니 교회는 한마음과 한뜻을 담아 같이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교회는 다툼과 허영이 없어야 합니다. 다툼과 허영은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사람보다 마귀가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한마음을 품어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섬기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섬김의 생활”이며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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