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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9:32-42
강설날짜 2019-01-20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을 행한 베드로(행9:32-42)

 

주 안에서 하나 된 성도님, 지팡이교회는 이 세상에 왜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실 수 있습니까? 저와 같은 마음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교회를 주신 이유는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팡이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면 좋은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기 위해 하나 된 고백을 하면서 지상명령을 이 세상 가운데서 잘 감당하였습니다. 신약에서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을 보면 자신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실한 일꾼이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입니다. 주님께서 심판의 주로 오시는 그 날까지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하나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기 위한 주님의 교회입니다. 지상명령을 잘 감당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잘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인 성경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잘 구현해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임마누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지금도 여전히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통치하시고 보호하십니다. 한 번도 통치하지 않으셨던 때와 시기는 없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받으면서 오늘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살인자요 핍박자라도 주님께서 이방인을 위해 부르신 것처럼 지팡이교회도 누구나 사명자입니다. 사도이든, 신자이든 똑같이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일꾼인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도하던 사울은 3년 후에 예루살렘에 도착을 합니다. 그곳에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제자 됨을 예루살렘 교회는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누구를 준비하셨습니까? 다 아시겠지만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를 통해 사울이 다메섹에서 경험한 일과 복음을 어떻게 증거 했는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을 두려워하고 핍박 자로 생각했지만 바나바는 참된 일꾼으로서 섬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지팡이교회에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여호와 이레”이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부터는 더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였던 자유인들이 속해 있는 “헬라파 유대들”에게 사실과 증거 등으로 변론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울을 스데반과 같은 이단자요 배교자로 생각하면서 죽이고자 힘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사울의 마음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지 않고 죽이고자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울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 예루살렘의 형제들은 어떻게 하였는지 아실 것입니다.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보내었습니다. 사울이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교회가 핍박당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하더라도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 번 고민해 보아야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도록 지상명령을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땅 투기가 없는 나라입니다. 여러 지역에 땅 투기를 하여 예배당을 아름답게 건축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고민해 보십시오. 예배당 터를 샀더니 땅값이 오른 것이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입니까?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울이 예수님을 안 후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증거를 잘 하고 있던 중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공모를 안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을 다소로 피신을 시킵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사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록을 해야 하지만 저자인 누가는 갑자기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을 한 사역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울을 중심으로 기록한 이야기를 접고 베드로 중심으로 기록하는 것은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인 베드로를 통해 확인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유대지역만이 아니라 이방지역에도 전하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통해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보면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그 때에’라고 하는 것은 주제의 전환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이야기에서 베드로의 이야기로 전환하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룻다의 신자들을 심방하는 것을 기록합니다.(하지만 심방보다는 베드로가 전도 여행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있는 중에도 베드로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 안에서 사귐의 공동체입니다. 베드로가 신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33절을 보시면 애니아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애니아는 중풍병으로 8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던 병자였습니다. 애니아는 문맥적으로 볼 때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자로 생각을 합니다. 치유가 필요한 병자를 베드로가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애니아는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베드로가 찾아온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의 위로하심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가 방문 했을 때 애니아가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는가에 대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눅5:24절에서 말씀하신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과 유사하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34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애니아를 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 누가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의 기초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유명해도 기적의 근원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치유를 했다고 해서 돈과 물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광이 주님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방문은 병자라 할지라도 믿음이 든든히 세워질 수 있도록 일꾼의 역할을 잘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분들은 모든 영광 하나님께 하면서 착복을 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된 성도님 베드로를 통해 초자연적인 일을 하시는 것은 성령의 은사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2: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친 것과 같이 베드로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병자를 고치는 것에만 집중하여 하나님 나라는 치유가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신자들이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를 받으면서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복음 증거를 위한 것입니다. 치유도 성경의 말씀을 떠나서 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 자신도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낫게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을 치유하면 소문이 빨리 퍼지는 것처럼 애니아를 고친 것도 같았습니다. 35절을 보시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소문은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룻다만 아니라 사론에도 알려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적을 보면서 사람의 육체를 낫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여 고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문맥을 잘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적은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베드로가 주님의 이름으로 한 기적이라면 36절 즉 욥바에서 일어난 기적은 그 지역에서 신앙 생활하는 공동체의(교회, 성도, 신자들) 기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도 룻다에서 일어난 기적을 욥바에 있는 신자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욥바는 지중해 연안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65킬로미터 거리에 있고, 룻다로부터는 15킬로미터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문은 쉽게 들었을 것입니다. 기적의 일을 알고 있는 욥바에서 베드로가 ‘두 사람’을 보내어 오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 수 있도록 38절에서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는 소식을 듣고 욥바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남자가 군대에서 한 시간에 4킬로미터 정도의 행군을 합니다. 그러면 아마도 늦어도 5시간 안에 욥바에 도착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기를 간청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36절을 보시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욥바에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제자의 이름을 도르가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실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비다는 아람어이고, 도르가는 헬라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하여튼 그녀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던 여제자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을 만큼 봉사의 섬김을 했던 위대한 여제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다비다라는 여제자에게 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37절을 보시면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그 당시 죽은 사람에 대한 예우로는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몸에 기름을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있는 그대로 기록을 하면서 몸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씻어 다락에 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장사는 대체적으로 그 날 밤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룻다에서 일어난 기적을 들은 신자들은 베드로가 오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열심과 정성으로 봉사의 섬김을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믿고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39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도착하자마자 과부들은 다비다가 봉사의 섬김 즉 구제와 선행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그녀가 만든 ‘속옷과 겉옷’을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다비다는 과부을 더 많이 돌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잘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봉사의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돌보아준 다비다를 위해 울 수 있는 것을 보면 진실 된 마음으로 섬기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처럼 여기서도 과부들은 다비다의 마음을 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섬김입니다. 이런 섬김을 잘 알고 있는 과부들은 베드로에게 그녀가 한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여 준 것입니다. 이 처럼 경건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생명의 빛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을 보여주신 것을 다비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을 들었던 베드로는 무엇을 하기 시작합니까? 40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죽은 사람 세 명을 살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과거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침착하게 과부들을 모두 다락방에서 내보냈습니다. 그런 후 무턱대고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왕상17장)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베드로도 자신이 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던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향해 무엇이라고 합니까? ‘다비다야 일어나라’하는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에게는 초자연적인 힘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하면서 내가 미쳤나가 아니라 다비다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지식과 믿음으로 믿은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나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믿고 있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41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다비다의 생명은 일시적이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과 과부들이라고 함으로 그녀가 한 구제와 선행은 믿는 자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자에게도 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와 과부들을 따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비다의 섬김의 봉사는 스데반과 같은 일꾼의 사역으로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과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많은 과부들이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룻다에서 일어난 기적으로 많은 사람이 믿었던 것처럼, 욥바에서 일어난 기적도 어떠했습니까? 42절을 보시면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역은 믿음의 길에 들어서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믿도록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이든 신자이든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비다의 기적은 베드로가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를 믿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베드로는 43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입니다. 여기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두장이는 죽은 짐승의 가죽을 취급하였고, 당시에 가장 천한 직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죽은 동물의 가죽과 이방인의 집에 같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43절의 의미는 행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성령을 받는 사건과 연결되는 중요한 암시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행15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에게 모세의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정적인 말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지팡이교회는 두 가지의 기적을 통해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기적과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모두 같지만 의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의 기적은 불신자에게 일어난 것이라면,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애니아와 다비다였습니다. 두 여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부활을 소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힘든 신앙생활 가운데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휴식시간도 없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32절을 보시면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전심전력으로 사도의 섬김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외면하지 않고 기적과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귀한 신분이었을 것이고 큰 저택에서 머물 수 있지만 가장 천한 신분이고 부정한 집에 머물렀던 사실은 오직 복음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었지만 선민의식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을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나 평등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은총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용하시어 은혜의 은총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베드로를 통해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던 것처럼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지상명령을 잘 감당하고, 신실한 섬김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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