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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5:1-12
강설날짜 2020-05-03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bhRNA4ji1y4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재판받는 바울(행25:1-12)

 

지팡이 교회는 사도행전을 주일마다 계속 강설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중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떠 올라야 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에 의해 온 누리에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도들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분들도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 지상명령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배우고 있으므로 사도 바울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소 출신입니다. 작은 도시가 아니라 큰 도시입니다. 로마로부터 지배를 받는 27개 중의 하나입니다. 다소는 고대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적어도 6천 년간 지속한 도시로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다메섹보다도 더 오래되었습니다. 위치는 터키의 남부에 속해 있습니다. 다소는 로마에게 있어서 중요했기 때문에 자유 도시로 인정하여 주었습니다. 로마 정부로부터 분리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다소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 아니라 도시 자체의 군대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와 다소는 정치적으로 절친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다소는 중요한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개의 시민권 즉 로마 시민권과 다소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선교 활동에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로마에서뿐만 아니라 로마가 통치하는 속주에서도 엄청난 특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에게는 사회적으로나 법적 지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많은 권리와 의무를 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지역에서 자유롭게 전도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는 가운데 로마 시민권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습니까? 학자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울이 시민 자격을 보여주는 증서를 지니고 다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출생을 알려주는 사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문화와 유대인이 문화를 알기 때문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대와 로마 제국의 광활한 세계에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적용하는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고 대처하며 해결해 나가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준비하심으로 당신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울은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배우는 중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두 주에 걸쳐 “고소당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한 것을 강설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감옥”에 갇힌 것도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알기 위해 지난주 강설부터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부장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안전을 더이상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하며 금식하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장한 군사를 동원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보낸 것입니다. 바울만 보낸 것이 아니라 편지도 함께 보냈습니다. 편지를 읽은 벨릭스 총독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바울을 고발한 자들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 그리고 더둘로”였습니다. 그들은 총독에게 바울이 죄가 있다고 고소하며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들의 고소가 끝나자 바울은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고소를 당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배와 구제와 제물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무죄라는 것입니다. 나를 고소하는 자들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들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 소망을 믿습니다. 단지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는 이유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 공회가 열린 것을 알 것입니다, 공회에서 나는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죄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변론을 들은 벨릭스 총독은 무죄 판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판결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2년 정도 가이사랴에 있으며 갇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벨릭스가 유대인들의 눈치를 본 것입니다. 무죄로 석방하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수 있어서 판결을 유보한 것입니다. 재판을 유보했지만, 바울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바울의 친구들이 면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약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누가 바울에게 왔습니까? 벨렉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였습니다. 드루실라는 유대인 혈통이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이킬 기회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최선을 다했지만 복음을 전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가운데 벨릭스 총독은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극복하지 못한 벨릭스는 틈이 있으면 바울을 다시 부른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들을 기회는 자주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벨릭스는 거절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권력 그리고 야망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바울이 돈이 많은 것으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복음은 듣지 않고 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갇혀 있어도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바울과 같은 마음입니까? 아니면 벨릭스 총독과 같은 마음입니까?

 

복음을 믿지 않았던 벨릭스 총독은 로마로부터 해임을 당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갇혀 지낸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벨릭스가 해임된 후 누가 가이사랴의 총독으로 왔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누구입니까? 베스도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도시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통치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총독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삶과 하나님을 섬기는 따분한 관습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동물을 잡아 제사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피 냄새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면 총독들은 왜? 가이사랴에서 통치를 했던 것입니까? 해변에 건설된 아름다운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휴양하며 편안한 삶을 생활했습니다. 바울은 새로 부임한 베스도에 의해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왜 바울이 갇혀 있는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문화적인 현실과 가이사랴을 잘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따라 성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행9:15-16) 그래서 재판을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2년 정도 미결 상태로 남아 있던 바울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베스도가 부임하자마자 3일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바울의 사건을 알게 됩니다. 베스도 총독이 산헤드린에 방문한 것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야 통치하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스도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베스도에 관한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벨릭스 후임 후 2년 또는 3년 뒤에 사망합니다. 베스도는 바울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베스도 총독은 누구를 가장 먼저 만났습니까? 2절을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총독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이나 과거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한 명이지만, 복수형으로 쓰는 이유는 전직 대제사장이 물러났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벨릭스가 통치할 때 제사장은 아나니아로 기록하지만, 베스도가 통지할 때는 이스마엘로 소개합니다. 그러면 아마도 베스도가 만난 대제사장은 이스마엘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나니아도 같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24장에서 “어떤 장로들” 아니면 산헤드린 공회에서 만난 인물들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적대적인 감정이 있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사두개인들 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지만, 사두개인은 믿지 않았습니다. 신임 총독이 산헤드린에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총독은 그들의 환심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은 바울을 죽일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기회가 온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3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은 살인 음모가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베스도가 유대 지역의 사정에 밝지 못한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바울의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할 있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부임한 베스도는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2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죽이고자 했던 방법으로 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 방법은 길에 매복하는 것입니다. 매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벨릭스가 재판할 때 바울의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결과를 맞이하면 안 되기 때문에 매복하여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로 가득한 자들의 완악한 마음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의 요구에 베스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는 호락호락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바울을 보호했습니다. 베스도는 그들의 요구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유력한 자들이 와서 바울을 고소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력한 자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여튼 아마도 바울에 관한 재판을 어느 정도 베스도는 알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쉽게 넘겨줄 수 없으므로 와서 고소하라는 것입니다. 베스도의 말로 인하여 그들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공교회인 성도님, 벨릭스 총독의 재판에서도 바울은 무죄였습니다. 바울을 계속 구속할 증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벨릭스는 2년 동안 가두고 있었습니다. 벨릭스가 해임되자마자 바울은 다시 재판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6절을 보시면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8일 또는 10일 동안 있은 후 다시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베스도만 간 것이 아니라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 유명한 자들도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죄목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24장에서 더둘로가 화려한 언어로 구사하여 바울을 고소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마도 같은 내용이라 기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베스도는 가이사랴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의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베스도는 신속하게 재판을 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다시 법정에 서게 되므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바울이 도착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바울이 온 것을 알고 있는 고소자들은 바울의 죄목을 입을 열어 고발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들이 고발한 죄목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성전 그리고 부활 마지막으로 로마 황제에 대한 범법행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단의 우두머리, 전염병으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발은 예수님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바울에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제 바울도 같은 죄목으로 순교자의 길을 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24장과 비교하면 더둘로와 같은 자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력한 자 즉 높은 신분이 있는 자들이 법정에서 바울을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했습니다. 고발자들이 긴밀하게 준비하여 고소했지만,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은 하여도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증거가 있었다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을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증거도 없으면서 자신들의 신분이 중요했기 때문에 바울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아는 것은 이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어떻게 성경을 믿어야 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발을 당한 바울은 자신을 변호합니다. 어떻게 변호하는지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고발하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바울은 종교적인 죄목, 정치적인 죄목에서 죄를 범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확고한 사실과 진리에 근거하여 변호했습니다. 사악하고 위선자인 유명한 자들 즉 산헤드린 공회원과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24장에서 변호한 내용으로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명분 없는 거짓 내용으로 나를 고발하지만, 바울은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역으로 그들을 고발해야 할 것입니다. 소송하기를 좋아하는 자들과 다른 바울은 오직 복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명한 자들처럼 세상의 부귀영화, 맘몬주의에 관심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바울은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위대한 신자였습니다.

 

베스도는 사도 바울의 변론을 알고 있기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죄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했습니까?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오늘날과 과거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9절을 보시면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입니다. 베스도는 전임자처럼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전임자처럼 행동했습니다. 판결을 내려야 하는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에게 제안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겠는가?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듣자마자 황당했을 것입니다. 너도 벨릭스와 같은 자라고 생각하며 주님만을 의지했을 것입니다. 무죄로 판결해야 하지만 베스도는 유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재판해도 베스도가 재판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벨릭스는 사도 바울의 판결을 유보함으로 결국 2년 후 해임 되었지만, 베스도는 사망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두려운 것입니다.

 

베스도의 재판은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 뜻 안에서 로마로 가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베스도가 부임하자마자 첫 번째로 한 재판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스도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0절을 보시면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가시사 즉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재판 장소를 옮김으로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바울은 다짐한 것입니다. 사형을 당할 수 있는 바울은 제안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들의 특권은 많았습니다. 그중에 바울처럼 사형을 당할 처지에 이르면 재판을 황제에게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로마법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베스도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로마법의 절차에 어긋나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이 재판을 받는 것은 로마 법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해결해야 할 일을 예루살렘에서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의 속셈을 잘 알기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이야기하며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1절을 보시면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입니다. 죽을 죄라면 당당하게 사양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반어적 표현으로 자신의 무죄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위에 겸손하게 굴복하려는 뜻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죽음으로 복음이 온 누리에 확장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이사의 법정이 어느 면에서 하나님에게서 온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사건을 가이사의 법정 앞에 가져갈 것을 제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는 심각한 음모가 기다리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재판을 가이사에게 받겠다고 요구한 것입니다.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으면 사도 바울을 죽이고 싶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바울을 매복하여 죽이면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을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점점 로마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자신의 권력과 유대인들의 환심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의 결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베스도는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12절을 보시면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바울이 베스도의 법정에서 상소하기로 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를 했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것입니다. 2년 동안 끌어온 바울의 재판은 로마행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인 복음을 가지고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의 교묘한 수단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로마에 가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2년 또는 3년 동안 유대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전임자 벨릭스는 후임자 베스도가 오기까지 마무리하지 않고 넘기었습니다. 베스도도 벨릭스처럼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위해 유대인의 환심을 얻고자 했습니다. 기회라고 생각하는 산헤드린 공회는 베스도에게 바울이 예루살렘에 와서 재판받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럴 때 베스도는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는 멀지 않으니 고소할 것이 있으면 와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 때 매복하여 죽이고자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와 함께 가이사랴에 가서 재판을 다시 했습니다. 이번에도 벨릭스가 한 재판처럼 거의 같았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으라고 바울에게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겁쟁이라 그런 것입니까?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로마 시미권자인 바울은 복음의 유익을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행23:11절 말씀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계획 할지라도 주님께서 이루십니다. 지금 힘들어도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예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재판은 결국 로마로 가도록 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베스도는 배석자들과 상의했지만, 바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타락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악에서 선으로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와 베스도는 바울의 재판을 통해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믿을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이 더 중요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야망을 위해 죄악 된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의인의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향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참된 주님의 길을 걷는 우리는 행복한 신자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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