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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2:14-21절
강설날짜 2016-08-21

우주의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당신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리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슬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뜻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마11:28-30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시면서 안식일의 참 주인이 누구신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를 알려 주심으로 네게로 와서 나의 멍에를 메는 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받는 자 곧 성도는 마음의 쉼을 얻으면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의 생활을 잘 아시는 주님은 스스로 당신님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표현을 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의 쉼을 위해서 당신님은 비참한 현실의 세상에서 낮추어서 구원받은 백성을 위해서 온유한 마음으로 섬기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감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 안식을 잘 알 수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여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했지만, 원래의 본 뜻과 본질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집착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하면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아니하는 날로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하면서 안식일이 무엇인가를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의 아시는 주님은 12: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은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여 7절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다니던 중 회당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마침 회당 안에서는 “한 쪽 손 마른 사람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올바른 것이냐고 질문을 던지지만, 예수님은 11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바리새인의 안식일의 개념과 예수님의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육체만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여 살리는 안식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예수님) 통하여 너희들이 참 안식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너희들은 살리는 것처럼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손 마른 사람을 살리시는 것이고, 당신님은 가장 험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시면서, 많은 사람의 병과 귀신의 고통에서 힘들어 하던 고통을 고쳐주심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자유함을 누리도록 하심으로 안식의 쉼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쉼은 사단의 올무에서 자유함을 얻고 주님 안에서 쉼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우리에게 올무를 주고자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쉼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거부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오늘 본문 14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하면서 죽인 방법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뜻을 분명하게 능력과 권세로 보여 주셨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기득권이 더 중요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가르침과 병을 고치시는 사역을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기득권은 백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올무로 생활하는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모습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바르게 교회를 이루려 가면 오히려 어려움을 당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서 교회를 하면 어려움을 당하는 것보다 더 성장하는 것이 현실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의 음모를 알게 되면서 15a절에서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여기서 유심히 볼 필요가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떠나가시니’라는 단어의 동사를 보면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의 마음의 거리는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마음의 거리는 육체적으로 거리를 두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두려워서 멀리 다니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아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피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때가 아직 아니기 때문에 당분간은 공개적인 갈등에서 멀어지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성장하면서 더 가까이 나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15b절에서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안식의 참 뜻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님을 믿고, 부르짖는 자들에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복을 주심으로 수고하거 무거운 짐에서 성경의 말씀을 배우게 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쇼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 16절을 보시면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쇼가 아니라 분명하게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신사도 운동과 그리고 병을 고친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높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높이지만 결국의 일들을 보면 자신의 명예와 권력 그리고 돈을 챙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이 없이 참 안식의 주인으로서 쉼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셨음에도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열광적인 백성의 마음을 읽었을 것을 바리새인이 알았을 것을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백성을 위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지금 당장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키고, 사단의 올무에서 구원하심으로 세상을 유대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용하게 일만 하시는 것을 보면 울화가 터지는 것입니다. 하나 더하면 병을 고치는 것을 자랑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겸손하신 것을 보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 그리고 돈 등을 소유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품을 무엇인가를 더 자세히 알려 주시기 위해서 17-21절까지 기록을 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는 17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고 하시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 인용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긴 구약의 말씀은 인용한 것입니다. 신학교에서는 이사야 42장을 “종의 노래”로 많이 배우기도 합니다. 마태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기억이 떠 오르십니까? 상반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태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유대인 독자들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지만, 그 반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메시야로 기대를 한다면 배척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완고한 이스라엘의 마음을 아는 마태는 믿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으로 방향 전환을 알게 하심으로 복음을 거부하면 심판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암시하여 주시는 것으로 온누리에 구원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19절에서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성품은 참으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지만 능히 심판하실 수 있어도 겸손한 마음으로 물러서는 것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서는 군사적인 영웅의 메시야라고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기 때문에 실망을 한 것입니다. 교회를 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은 겸손하게 목회를 하면 어려움도 많이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사업적인 방식과 카리스마적인 황제적인 목회는 기쁨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성도를 위한 목회가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나무라기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것처럼 지팡이교회는 느리더라도 바르게 가는 교회로 성숙되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겸손을 생각하지 못하고 분노와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20-21절에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더욱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갈대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여 펜을 만들기도 하고, 지팡이도 만들고, 옷을 만드는 재료로,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이 글을 기록하는 양피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게 사용하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상한 갈대는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는 당시에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저도 과거에 전기불이 없는 시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등잔의 심지가 짧아지거나 제대로 잘라 내지 아니하면 연기가 나기 때문에 쉽게 등의 역할을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통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마음이 겸손한 주님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무거운 짐을 지고 생활하는 자들과 로마로부터 억압과 고통을 당하는 백성과 오늘날에도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에게 그리고 사단의 올무로부터 신음하고 고통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용하여 구원하여 주시는 겸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세상의 성품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성품은 유대인들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21절에서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심으로 이방인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일하심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주님이 왜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한 일들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보면서 인내하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게 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장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마음을 무너뜨리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우리를 위해서 대신 지시면서 참된 안식으로 초대하시고 세상의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부활의 영광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적인 마음을 품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종교적 열정만큼 위험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 안식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나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며 그 분의 영광을 가린다는 것을 생각하십시다. 죄인을 사랑하셨던 우리 주님은 지금도 죄인을 사랑하신에 있으면 그분은 모든 허물과 죄를 가려주시고 결코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의인이라 칭하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님께서 하셔야 하는 사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도 있고, 이단들과 사이비 집단들도 있습니다. 그들과 말로 논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반발심만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은 당신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외면하지만 그들은 외면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외면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3. 우리 주위에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4. 오늘의 말씀을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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