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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8:1-4
강설날짜 2017-03-12

지팡이교회는 마17장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았을 것을 믿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마17장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동기 그리고 부활의 영광스러운 광채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신적인 광채를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진정한 의미를 몰랐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리고 성령강림 사건 후 모든 비밀을 알게 됨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 강설의 제목을 아시고 있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도 일부 인용을 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고난 예고와 성전세를 내시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고난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제자들이 참된 제자도로 갈 수 있도록 하시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귀 담아 들어야’하는데 오히려 ‘매우 근심’ 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두려워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와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는 것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만약 나라도 당연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신적인 광채을 직접 목격을 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신적인 광채를 말씀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으로 구원하여 주심으로 내 안에 있는 양심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성전세’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하여 주심으로 당신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구원하여 주심으로 성전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세’를 냄으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왜 구원하여 주셨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하심으로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으로 구원하여 주실 것을 ‘성전세’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우리가 잘 알듯이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천국에 가면 누구는 짜장면 배달을 하고, 누구는 개털모자 등을 이야기는 참으로 성경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을 했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섯 편의 강설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을 하고 있습니까? 가장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으로 5-7장이고, 10장은 제자를 부르신 사건과 너희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두려워 할 분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면서 영접하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을 강설을 했습니다. 13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강설의 비유와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신 사건입니다. 오늘부터 강설을 듣는 18-20장이고, 마지막으로는 24-25장입니다. 오늘부터는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강설하신 말씀을 통하여 풍성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고난을 두 번에 걸쳐 말씀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에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하면서 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야 했고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이 신적인 광채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또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으로 더 가까이 가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사망하셨음에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함께 예수님께 와서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세우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오신 진정한 의미와 정체성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메시야 왕국을 통하여 자신들의 자리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자주 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늘 말씀과 병행본문이 막9:34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서로 자신의 입장과 이론을 내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35절에서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너희들이 누가 크냐 하면서 쟁론을 물어보신 후 첫째가 되고자 하면 사람의 끝이 되어야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좀 더 길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이지만 마태복음의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통해서 그 부분만 이야기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잘 기록 되어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잠잠해진 것입니다. 잠잠해져 있는 가운데 서로 자신들의 속마음에서는 ‘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침묵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이 침묵을 깨고 질문을 합니다. 오늘 말씀인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계속 침묵을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예수님의 마음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큰 자가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자녀가 ‘머리가 될지라도 꼬리는 되지 말라’고 이야기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두 번째 고난의 예고’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자리가 이제 준비될 것을 생각하면서 논쟁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의 의미를 아시는 예수님은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늘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유교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서열을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서열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심은 서열에 의한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통하여 서열의 중심이 아니라 기본적인 도덕법과 윤리를 중요시 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잘 알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녀가 부로를 공경하고 이웃의 어른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십계명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으뜸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2절에서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제자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욕심이 가득하며, 어리석은 자들인지 가르쳐 주시고자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통해서 겸손을 보여 주신 것과 같이 어린 아이를 세워 겸손의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벧후1:5-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심으로 겸손한 자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세우심으로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책망의 의도를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의미를 잘 생각할 수 있도록 막9:35절은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으뜸의 지위에 있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겸손으로 섬겨야 하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기적이고 욕망과 욕심에 대한 논쟁을 간접적으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열 두 제자들은 메시야 왕국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이적과 기적 그리고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그들에게 어린 아이를 불러 세워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주님께는 얼마나 힘들고 슬픈 길이었을까를 인간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잘 하면 할수록 머리가 될수록 특히 으뜸일수록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잠시 오늘날의 교회 현실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제자들도 처음부터 철들어서 예수님의 의미를 아는 것은 힘들 것입니다.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서 철이 들어가듯이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행을 하면서 철이 들어가야 하지만 서로 으뜸이 되고자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는 어떠합니까? 자녀들이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는 되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은 과연 겸손입니까? 이웃을 섬기고자 머리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런 문제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실상은 목사가 교회의 대표로, 장로가 교회의 대표로 서로 다툼을 하는 것은 서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보여주신 겸손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잘못된 생각하는 목사와 장로가 성도의 대표라는 것은 한심한 것입니다. 또한 목사와 장로의 갈등으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욕심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라고 하면서 모든 영광은 목사와 장로입니까? 교회는 교인의 모임으로 우리는 이것을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교회라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진 교회가 교회당에서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의 장소에서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욕심과 야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는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부부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협력하여 한 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와 장로만 그래야 합니까? 교회가 서로 협력하여 한 몸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서로가 한 몸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서로 논쟁을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겸손한 자가 되어라 한 것이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제자들은 큰 자가 되기 위해서 논쟁을 했지만,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라는 의미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자를 통해서 큰 자는 늘 겸손해야 하는 것이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교만이 통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백성이 된 사람은 그리고 지팡이교회는 겸손한 마음으로 시민권자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만이 아니라 겸손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질서와 서열 그리고 으뜸은 이 세상의 세계관과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입니까? 예수님은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 하셨음에도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제자인가에 관심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적어도 훗날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강설을 하신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네 주님의 말씀을 잘 ‘알겠습니다’ 하면서 ‘어린 아이가 겸손한 것같이 겸손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그런 의미 보다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순진한 성격의 겸손을 생각 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춘다’라고 하는 의도는 어린 아이의 특정한 속성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어른보다 어린이는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어른들의 교정과 교훈을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 아이는 누구나 훌륭하니까 천국 백성으로 안성맞춤이라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누가 으뜸이 되든지 권력자가 되든지 거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이 자신을 낮추어서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제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미 소유한 사람으로 참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나는 죄밖에 없는 자요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오직 은혜가 아니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부모의 섬김과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으뜸자가 된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의 섬김과 돌봄이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인 성도는 가장 작은 자 곧 무가치하고 무력한 자가 가장 높고 크신 분의 섬김과 돌봄을 받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가장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교만과 욕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나라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큰 자가 되고 싶으면 자신을 낮추고 성도를 섬기어야 합니다. 직분 자가 되고자 하시면 더욱 섬겨야 합니다. 직분 자가 되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군림을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피할 수 없는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목사와 장로는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성도를 바르게 섬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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