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2019.03.31 14:32

헤롯이 죽다

조회 수 65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2:18-25
강설날짜 2019-03-31

헤롯이 죽다(행12:18-25)

 

오늘날 일부분의 목회자를 보면 성도가 목사만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천국아래 분당이라고 하는 말처럼, 하나님 아래 목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만인 제사장”을 이야기합니다. 모두다 성도로서 서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섬길 때 복음이 증거 되는 것처럼 오히려 목사가 성도를 섬김으로 장성한 신앙인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을 보면 목사보다 신자들이 더 치열하게 군사처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섬기는 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뒷짐만 지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실 때 베드로가 어떻게 말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치열한 전투의 생활을 한 후 예배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주님의 영광의 위해 이중직을 감당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중직을 감당하는 분들을 보면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 그들에게 우리는(목사는) ‘섬김’으로, ‘봉사’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안정화 되면 더욱 성도를 위해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도 신자들의 마음을 좀 더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마음을 알 때 목사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과거에 일을 해 보았기 때문에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성도의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중직을 감당하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직업을 통해 성도의 교제를 하면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직업 주심으로 당신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기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통해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늘 전투와 같은 삶에서 주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성도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님은 지난 주 강설도 기억하실 줄 믿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을 받은 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도착하여 대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여자 아이(여종?) ‘로데’가 마중하러 나왔다가 너무 기뻐서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기도를 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간 것입니다. ‘로데’는 베드로가 대문에 와 있다는 말을 하지만 “미쳤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렇지만 ’로데‘는 계속해서 ”참말“이라고 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말은 ”그의 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사라고 한 이유는 그 당시에 각 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베드로와 같은 모습으로 대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수호천사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곳에 모여 있던 신자들은 기쁨과 당황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한 후 “다른 곳으로” 떠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헤롯이 죽다”입니다. 그 동안 지팡이교회는 야고보가 처형당한 것과 베드로를 처형하기로 했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구출을 당한 것을 강설로 들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정치적인 것을 위해 사도들을 죽이고자 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헤롯을 심판하심으로 당신님의 교회를 확장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혼을 먹이는 양식입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음으로 풍성한 은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가 감옥으로부터 탈옥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18절은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처형을 당해야 하는 베드로가 사라진 것을 안 군인 즉 경비병들은 정신이 혼미했을 것입니다. 죄수가 도망을 치면 그 사람의 형벌에 따라 같은 형벌을 당해야 하기 때문에 소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사방으로 수색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역사하실 때 사람들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사라진 것을 계속해서 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없어진 사실을 헤롯에게 보고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헤롯 궁전 안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헤롯도 베드로를 찾고자 군인들을 총동원했을 것입니다. 19절을 보시면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헤롯은 베드로를 찾지 못하자 그 날 경비를 담당했던 군인(파수꾼)들을 처형을 합니다. 군인들은 자신을 변호하고 싶어도 변명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정치적 불을 끄기 위해 가이사랴로 급히 내려갑니다. 가이사랴하면 문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베드로를 초청한 고넬료 백부장이 있는 지역입니다. 분봉왕인 헤롯이 가이사랴로 간 이유는 그 곳에 로마 총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로마의 행정 중심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헤롯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함으로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지역을 다스리고 싶었지만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헤롯은 힘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가이사랴가 예루살렘보다 북서쪽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가서’로 표현된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어디든지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올라간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유대인입니다.

 

헤롯이 가이사랴에서 통치를 하고 있는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생깁니다. 헤롯이 분을 내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20절을 보시면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은 베드로에 대한 화풀이로(?) 시돈과 두로 지방에 대해 노여워 한 것입니다. 아마도 식량 공급을 중단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로와 시돈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식량을 갈릴리 지방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왜 두 도시 사람들에게 화를 냈는지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헤롯이 먼저 분을 낸 것인지 아니면 두 도시 사람들이 화를 내도록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오늘 본문에서 더 중요한 것은 헤롯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롯의 화를 풀기 위해 사람들은 왕의 침소를 담당하던 ‘블라스도’를 설득합니다. 헤롯과 화해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통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그들의 제안을 수용해 날을 정해 그들과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그 기회를 이용해 헤롯은 백성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이 21절입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입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헤롯의 왕복이 햇빛에 반짝이는 은으로 만들어져 백성들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연설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앞 절과 연관하여 생각하여 보면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 화해를 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헤롯의 연설은 아마도 카리스마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22절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이라고 하면서 화답을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헤롯과 화해를 하기 위해 아첨하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중동지역에서는 모든 자연을 신으로 보았습니다. 신들의 질서는 인간 세계와 밀접하며 범상하지 않은 사람은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왕을 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자연현상은 신이 행한 결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여튼 백성들은 헤롯을 신이라고 하면서 아첨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자신을 향해 ‘신’이라고 하는 소리에 흡족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신의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23절을 보시면 헤롯의 마지막은 어떠합니까? 인간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죽음이기도 합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헤롯과 베드로를 생각하면 대조적입니다. 행10:26절에서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고넬료에게 환대를 받고 있는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헤롯과 같은 마음을 품은 자들은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영광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헤롯의 대가는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입니다. 주의 사자를 통해 사망한 것입니다.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은 닷새 동안 앓다가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닷새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헤롯이 죽어 간 과정은 벌레에 먹혀 가는 과정이지만 복통의 진짜 이유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의 비참한 최후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 한다는 것은 결국 영원한 형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호를 하시지만 세상을 좋아하는 자들은 심판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벌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주의 사자가 구출을 합니다. 그와 반대로 헤롯에게 주의 사자가 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의 기적적인 구출과 헤롯의 죽음은 가말리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한 권면이 진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행5:38-39절을 보시면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당할 때 가말리엘의 권면을 듣고 풀어주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하고자 했지만 24절을 보시면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입니다. 교회를 핍박 하지만 교회는 흥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진실한 신앙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핍박을 했던 헤롯이 사망을 했기 때문에 교회는 더 성장을 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를 보면 어떠합니까? 어려움을 당하지만 개종자가 생기고, 말씀을 담대히 전함으로 교회가 든든히 서 갔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교회에 임한 내적 문제나 외적 박해는 오히려 교회를 장성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물질이 많고 핍박이 없는 교회는 오히려 스스로 타락되어가는 현실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를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이기게 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하고 스스로 악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헤롯처럼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십니다.

 

헤롯이 사망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25절을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흥미롭게도 누가는 안디옥과 다시 연결하기 위해 11장의 끝에서 우리가 읽은 이야기로 돌아간 다음 13장과 연결합니다.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만난 후 자신의 고향인 다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와서 같이 안디옥에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중에 예루살렘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지역에서 신앙 생활하던 신자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에 부조를 하도록 보냈던 것입니다. 부조를 잘 감당했던 두 사람이 그들만 안디옥으로 온 것이 아니라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도행전의 초점은 베드로로부터 바나바와 사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안디옥에 초점을 두게 함으로 사도 바울의 3차 여행은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행12장은 교회가 이방인 지역으로 뻗어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길을 예비하신 모습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죽임 당하도록 하심으로 교회가 더욱 흔들리지 아니하고 참된 신앙을 붙들도록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주의 사자를 보내시어 베드로를 옥에서 구출하십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기도를 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초대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증거 될 수 있도록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이 흩어진 일과 사울을 안디옥으로 오게 한 일과 베드로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구출하신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롯을 사망하도록 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행13장부터 시작되는 바울의 전도여행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은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신의 한 수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권력의 안정을 위해 교회를 핍박하기로 생각을 했습니다. 핍박을 하면서도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야고보를 죽인 후, 베드로도 죽이고자 한 것을 보면 사악한 존재입니다. 죄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기회도 버리면서 자신의 분봉왕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완악한 마음은 마치 애굽의 바로 왕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심판을 당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의 결과는 고통스러운 죽음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강설로 전해지고, 전도자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듣습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교회로 부르심을 받지만 헤롯처럼 거절을 하면 사망하는 것입니다. 사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신앙생활 합니다. 극과 극 중에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당신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순종 하도록 하셨습니다. 순종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면서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초대교회 신자들은 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이 된 우리는 나의 것을 주장하지 않고 선한 청지기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의 인생관은 전적으로 변하여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 된 삶의 예배를 하는 성도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신 분들이 누구인가를 성경을 통해 알 것입니다.

 

헤롯은 만유의 주 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기에 야고보와 베드로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 교회와 사도들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가를 들었지만 완악한 존재였습니다. 나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헤롯입니까? 아니면 초대교회와 같은 성도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나의 가치관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324 회심한 바울이 다메섹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은덕 행9:20-25 2019-01-06 695
323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의 복 그리고 결론 전은덕 마5:9-12 2021-03-07 363
322 혼인 잔치의 비유를 아십니까? 전은덕 마22:1-14 2017-07-30 620
» 헤롯이 죽다 전은덕 행12:18-25 2019-03-31 654
320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즉 우리를 살리셨도다 전은덕 엡2:1-5 2022-04-10 708
319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전은덕 고전3:10-16 2023-06-11 80
318 하나님의 뜻대로 바울이 로마로 압송...... 전은덕 2020-06-07 680
317 하나님의 뜻대로 바울이 로마 압송.......2 전은덕 행27:9-26 2020-06-14 461
316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전은덕 엡1:3-6 2022-03-13 397
315 하나님 나라에 호적을 둔 교회 전은덕 시87:1-7 2023-12-31 13
314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성도의 영향력 즉 소금과 빛 전은덕 마5:13-16 2021-03-14 309
313 표적을 구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심 전은덕 마16:1-4 2017-01-08 461
312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한 은혜 전은덕 마20:1-16 2017-05-21 1054
311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전은덕 요1:1-4 2023-10-29 14
310 최초의 이방인 안디옥 교회 전은덕 행11:19-30 2019-03-10 638
309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의미? 전은덕 행4:32-37 2018-08-05 803
308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1 전은덕 행5:1-11(1-5절 중심으로..) 2018-08-12 724
307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행한 표적의 의미 전은덕 행5:12-16 2018-08-26 422
306 초대교회 안에 일어난 원망과 사도들의 대처 방법 전은덕 행6:1-7 2018-09-23 407
305 천국은 이런 자의 것임을 아십니까? 전은덕 마19:13-15 2017-04-23 41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