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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7:57-66
강설날짜 2018-04-01

예수님의 장례식의 의미(마27:57-66)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자들의 신앙을 점검했을 때 사도들의 대표로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럴 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당장 죽이고 싶었지만 백성들의 민란이 두려워서 기회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 기회는 뜻밖으로 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가능하여 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때가 다 된 것을 알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십자가에서 당신님의 목숨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함이니라”는 그 말씀대로 이루시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들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신 후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풀어주고자 했지만 결국 민란이 무서워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 이 세상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시는 것을 보면 이상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면서 가르치는 내용은 신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전통적인 가르침과는 놀라운 정도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에는 느낄 수 없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국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논쟁은 결국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빌라도의 힘을 빌리어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들어왔던 것을 잠시 정리해 본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저번 주에 강설로 들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희롱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마27:27-44)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스스로 선택 받은 민족이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백성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시고 이단으로 몰려 비참하게 희롱을 당하시면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을 다시 기억하여 보십시오. 빌라도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병에 의해서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희롱을 당했습니다.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도착한 골고다에서는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에게 마시게 하면서 조롱을 하였습니다. 동정심도 없는 잔인한 자들로부터 예수님께서는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희롱을 당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시려는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호소하면서 당신님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기 위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호소를 들은 한 사람은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시어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는지 보자라고 했으니 참으로 비통할 뿐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일명 “부활주일”이면 친숙하게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씀으로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십자가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를 하십니까? 표면적으로는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지고 있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건처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은 은혜를 받지 못한 자의 한계입니다. 이런 것처럼 오늘날에도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에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조롱을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의 한계입니다. 이처럼 죄인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싶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지팡이교회는 오직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저주와 형벌을 제거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면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도가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를 알리시기 위해서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사망이 아니라 잠자는 것을 알리심으로 영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백부장과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심히 두려워하면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증인은 그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라고 함으로 이 모든 일들이 사실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의 문구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신비한 사건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하신 후 장례식을 통해서 알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말씀을 듣고 더욱 주의 길을 전진하는 군사로서의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57절을 보시면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오후 4-5시 사이에 예수님의 시체를 치워야 하는 그들에게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 온 것입니다. 마태는 아주 간략하게 예수님의 부자라고 기록하지만, 막15:43절에서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로 기록을 하고, 눅23:50절은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19:38절에서 요한은 독특하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숨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자마다 담대하게 나서서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담대함으로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58절을 보시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지금까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나 이처럼 불신앙과 악행에 가담하지 않고 담대함으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체를 내 주었는가? 아마도 신21:23절의 말씀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시체를 나무 위에 달거든 밤새도록 두지 말라”는 것이고, 조금만 있으면 안식일이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체를 내 주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법에 의하면 십자가에 죽은 자는 장례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빌라도가 허락을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가지고 온 아리마대 요셉은 59-60절에서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면서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망을 하면 묘실로 쓰고자 했던 곳에 예수님의 시체를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닫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장례식을 아리마대 요셉 혼자 한 것입니까? 답은 아닙니다. 병행본문인 요19:39-40절을 보십시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아리마대 요셉은 세마포와 무덤을 준비했다면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준비하여 예수님의 몸을 깨끗하게 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와 요3:2절에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는 것이고,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요3: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심으로 결국 니고데모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공회원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마지막 장례절차를 마무리함으로 당신님의 죽음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활의 서곡을 알리고자 하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절차가 마무리 되었지만 또 다른 사람이 밖에 있었습니다. 61절을 보시면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두 여인은 예수님의 시체가 어떻게 장사되었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어느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나중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린 후 그 무덤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62절을 보시면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안식일이 지난 후 빌라도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 부인하고 짓밟으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부인하여서 자신들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빌라도를 찾아온 종교지도자들은 63-64절에서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주여’라고 하면서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간 후 백성들에게 가짜 소문을 내어 속이면 그들은 진짜로 부활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덤을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예수님의 시체를 훔치어서 살아난 순교자로 만들어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속이던 자’라고 함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유혹하고 속이는 메시야가 아니라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소문은 종교지도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이고,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지만, 부활의 소망을 품고 있는 성도에게는 소망의 복음인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빌라도는 65-66절을 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끝까지 취한 조치는 경비병으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아마도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가 통치하는 도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은 가장 다스리기 힘든 도시입니다. 백성들은 매우 거칠어서 제 자신이 순간순간마다 폭동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제사장들을 주의해야 할 것을 로마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벼슬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해서는 그들의 어머니라도 배신할 자들입니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왜 예수님을 죽여야 하는지 더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도자들과 빌라도의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시체는 도둑맞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확인하여 주는 기회가 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은혜로 보아야 합니다. 마태는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을 함으로 독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해도 당신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최고 권력자의 실권을 가지고 있던 빌라도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악한 자들에게는 안식일이 평온이 아니었지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가운데 안식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1:28절의 말씀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것처럼 예수님의 안식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의 안식일에 참여함으로 부활의 소망을 품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매년 특별한 날이면 그 날만 부활절로 생각을 하는데 이미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모든 날이 주의 날임을 드러내심으로 안식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찬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하면서 예수님의 장례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으로 제정하여 주심으로 영원한 현재 사건으로 지금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면 오늘날 성찬식을 이른 바 기념으로 소개하는 것은 장로교와 개혁교회에서는 잘못된 것입니다. 장로교회는 “영적임재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떡을 먹으면서 그리스도의 살을 기리라고 하였고 잔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피를 기리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단번에 성취된 과거를 지금 여기에서 다만 기리고 기념하는 것으로 머무르는 것은 성찬의 의미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것을 단지 회고하면서 대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동안 이루어주신 구속사에 우리도 같이 참여하는 것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냥 생각만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희생하여 주신 예수님의 떡과 포도주 즉 살과 피를 실제로 받아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영적으로 동시에 실제로 우리의 양식과 생명으로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정하여 주신 성찬은 심리적으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방식으로 당신님의 죽으심을 실제로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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