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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4:23-31
강설날짜 2018-07-29

베드로와 요한의 석방을 통한 교회의 기도(행4:23-31)

 

지팡이교회는 사도행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강설로 듣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배신자였고 겁쟁이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안 후에는 진리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들의 증거는 사실에 근거하여 전하였고,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음으로 우리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분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고 오직 복 받기 위해 믿는 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이요 성도요, 교회인 신자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지상대명령”에 충실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사도들은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잘 되기를 바라기보다 오직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침으로 오히려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구나 두려워 할 것입니다. 공회의 위협과 경고를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풀려날 수 있을까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곳(공회)에서도 복음을 전함으로 오히려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들은 것은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공회는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비굴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였습니다. 오직 사실에 기초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종교지도자들도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과거를 보면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했고, 야심과 욕망으로 가득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큰 일’을 향해 가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사도의 길은 아니더라도 사실적인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사도를 감옥에 투옥시키고 심문과 고난을 주었던 산헤드린 공회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백성의 폭동이 두려워 위협하고 경고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높은 자리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두 제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풀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공회는 제자들에게 나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하고 위협을 하였지만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함으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입니까? 복음입니까? 아니면 영혼 구원 없는 물질적인 성장과 종교지도자들처럼 높은 신분이 되고 싶은 것입니까? 교회는 성경의 사실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두 제자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복음이 없는 가르침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현실을 보면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희망이 없는 것 같기 때문에 ‘자신만 잘 믿으면 되지’하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위해서 지금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복음이 오래되었다고, 현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지만 나중에는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도록 하시고 있습니다. 그 날 즉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재림의 주로 보내실 때에 열매는 거두지만 쭉정이는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그 날을 향해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지팡이교회는 귀한 열매입니다. 목사들처럼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배우지 아니했을 지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목사가 가르치는 장로로서 전한 복음을 신자는 잘 들음으로 성령을 의지하면서 오직 성경의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믿으면서 주의 길을 잘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한 산헤드린 공회는 두 제자를 풀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전하기도 하면, 다시 체포하고 죽일 수 있다는 경고와 위협을 당하면서 풀려났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다행이다 하면서 속세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제자는 23절에서 어떻게 합니까?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동료들에게 돌아와서 그 동안 있었던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같은 사도들과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신앙의 공동체요 동질적인 성도들인 교회에 공회에서 있었던 일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동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두부부터 먹이고 다음부터는 조심해, 수고했어요, 그들이 너희들을 싫어하니 더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하세요. 이런 대화를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23절은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오늘날 교회에 던지고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강설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등으로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당에서도 성경공부를 통해서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출석도 잘하고 양육도 잘 받는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아닙니다. 참고로 교리만 잘 안다고 해서 안심보험에 들어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아니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사도처럼 심문과 고난을 당해도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은 24절에서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그 곳에 모였던 동료들은 일심으로 즉 한마음으로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베푸신 큰 일, 즉 두 사도로부터 들음으로 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올려 드린 것입니다. 동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대주재여’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호칭할 때 사용되는 ‘퀴리오스’ 즉 ‘주’였습니다. ‘주’라는 것을 우리말로 좀 더 번역하면 선생, 주인, 남편 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주재’는 주권자, 통치자, 대통령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다스림이 있는 것으로 ‘주’라는 표현보다 극존칭으로 ‘대주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심문과 고난을 당할지언정 그들보다 더 높으신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동료들은 한 마음으로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라고 한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경계를 넘어 범람하려고 하는 권력자들 억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적인 확신으로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하루하루가 죽지 못해서 산다고 표현하는 시대에 기도는 영적인 힘이 있는 것이고,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모인 동료들은 25절에서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하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반역하는 대리자들을 좌절시키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의 기도인 시2편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동료들의 기도는 시편2:1-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고난과 그들 가운데 성취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 가운데 인용되는 시2편은 본래 제왕 시로서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왕이 세상의 세력에 의하여 방해를 받게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 있게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시2편은 구약으로만 한정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동료들은 즉 사도들은 25절과 26절에서 시2편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을 의탁 하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실 메시야가 겪을 고난을 미리 알려 주는 시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밝히 드러낸 것입니다. 세상의 대적 자들은 공포의 분노로 결국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서 나온 계획으로 고난과 죽음을 당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엔 그것이 ‘허사’를 경영한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다 헛된 것이고,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온갖 핍박에도 예수님께서는 구원 사역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26절에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잔인하게 처형함으로 예수님의 시대가 끝났다고 확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그들의 예상을 뒤엎으시고 남은 자를 구원 사역으로 인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믿음을 소유한 교회요 성도인 우리를 통해서 핍박과 방해를 물리치고 믿음을 지키게 하시며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두 사도들과 다른 사도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르는 영역이 있거나 하나님이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 나라를 파괴하려는 큰 흑암의 세력이 연합하여 반역하는 것은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분들도 대적 자와 같은 것입니다. 대주재자이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열방들, 족속들, 군왕들, 관리들이 하는 행동을 보시면서 딱 한마디 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25절에서 ‘어찌하여’입니다.

 

세상의 대적자들에 대해 사도들과 동료들은 27-28절은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적 자들이 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하신 예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의 맡으신 몫은 어디까지입니까? 또 인간이 개입한 부분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문제는 인간의 관점에서만 설명하면 아주 어렵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미심장인 이 구절에서 십자가를 보는 관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과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대로 행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원대한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가 왔지만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오해하여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십자가는 저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어쩌다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로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종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종으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대로 충실하게 십자가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행2:23-24절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이는 성경의 전체 사상이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탕으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교회에 대한 핍박이 오히려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며,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어 간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 역시 대적 자들의 악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그들은 패배하고 말 것이며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29절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위축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대적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여전히 사도들과 초대교회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기를 포기했으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극렬한 대적자로 활동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높은 지위와 권력을 위해 메시야를 죽였던 것처럼 제자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를 죽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스데반 집사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교회는 누룩과 같이 펴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으로 그들의 위협과 경고에도 굴복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단지 기도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복음의 증인으로서 가르치고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당시에는 더욱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만 필요한 것입니까? 오늘날에도 동일한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요 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한 것처럼 우리도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도 제자들이 한 것처럼 예수님 이름으로 강설하고, 가르치고, 일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여 주신 것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은 나의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기도했던 것입니다. 자랑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높이 추앙을 받고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도로 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공회의 위협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물러서지 아니했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했습니다. 자신들의 현실을 알면서도 30절을 보시면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무조건 ‘병과 표적 기사’가 나타나도록 해 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29절에 기초하여 보아야 합니다. ‘담대함’으로 전할 때 하나님께서 ‘병과 표적 기사’로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능력으로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른 것입니다. 진실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진실한 복음을 무시하고 능력만 간구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초대 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님의 종들을 통하여 능력 있는 통치를 행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고 생각할 때 당신님께서 필요한 방식으로 능력을 행할 것을 믿으면서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사명자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공회로부터 심문과 고난을 당한 것을 동료에게 말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한 후 31절을 보시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모인 장소에 진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견고한 땅의 기초까지 뒤흔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무리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진 사람들은 더욱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위선자들은 예수쟁이라고 하지만 과연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예수쟁이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증시를 위해 초대교회처럼 생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본권력이 저지른 불법 앞에 미력함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불사르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부귀영화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그리스도인보다 행실이 바른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 없는 교회를 보면서 자신들의 양심이 더 났다고 하는 시대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너의 예수 믿음은 대체 무엇이냐?"할 때 답을 줄 수 있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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