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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8:14-25
강설날짜 2018-11-25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음?(행8:14-25)

 

기독교 교회사 중에서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에 대한 지각 변동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오늘날 안수집사로 결혼을 한 가정의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순교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스데반은 공회에서 강설을 한 후 돌로 맞으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생존보다 진실이 중요했습니다. 스데반만 아니라 초대교회는 생존보다 오직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위해 신앙고백을 하면서 순교를 감당하였습니다. 남자들만 순교를 감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을 보시면 많은 분들이 감당했습니다. 온누리에 복음이 증거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를 준비하심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위져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심으로 신자들이 본향을 향해 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스데반과 같은 신앙고백이 있는 일꾼이 있습니까? 하s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목사의 카리스마적인 언변술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말씀에 즉 계시 의존사색을 함으로 오직 복음만 증거 되도록 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함으로 온누리에 퍼지도록 하였습니다. 지난주 강설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이 유대에서 사마리아와 온누리로...)였습니다. 제목만 기억 해도 저는 마음이 흡족합니다. 다시 한 번 기억을 떠 올리면서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살렘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은 오히려 복음이 온누리로 확장되도록 하였습니다. 로마가 만들어 놓은 도로는 오히려 복음이 증거 되도록 하였습니다. 순교를 당한 스데반이 죽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을 사도가 되도록 하신 것을 보면 복음은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복음의 힘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도록 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공회는 스데반만 죽이면 그리고 예루살렘 안에 있는 신자들만 죽이면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히려 복음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사울은 교회 즉 신자들을 사로잡아 남녀 구별 없이 옥에 가두었지만 오히려 자신이 옥에 갇히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을 크게 울면서 경건한 사람들이 무엇을 하였습니까? 스데반을 장사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그들이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무엇인지를 잘 말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마음이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 가면서 경건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는 믿음이 든든하였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면서, 사마리아이든 어느 곳이든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핍박을 하면, 자신들이 한 행동이 잘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자들이 온 누리로 퍼지면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전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복음이 온 누리로 전하여지는 것을 잘 알 수 있도록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빌립이 하는 것 같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 위해 신자들을 사용하지만 회개의 마음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목회자와 복음을 전하는 분들의 언변술과 카리스마적인 것보다 성령께서 은혜를 주시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은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권위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든, 베드로든, 어거스틴이든, 칼빈이든, 빌립과 스데반이라도 자신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좋은 이미지는 얻을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 즉 좋은 소식으로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이처럼 온누리에 기쁨이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하지만 큰 기쁨중에도 가라지와 같은 인물이 등장을 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시몬입니다. 시몬은 마술사로 자칭 ‘큰 자’라고 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신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이 하는 표적 등을 보면서 마음의 변화가 생기었을 것입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는 것을 보면서 시몬도 믿겠다고 한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만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가라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복음에 관심이 없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성장하기 위해 외형적인 것으로 사역을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좋은 소식이지 자신만의 기쁨을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지 생각해 보면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음”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면서 말씀을 듣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에는 빌립이 복음의 중심에 있었지만,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도를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을 공인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를 통해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들도 유대인처럼 동등한 신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마리아 지역은 지난 주일에 강설한 것처럼 과거의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같은 민족이지만 혼혈정책과 서로 다른 성전에서 예배를 하기 때문에 이방인보다 더 원수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군대로 모집할 때도 사마리아 출신이 많았다는 것은 더욱 갈등이 고조되었을 것입니다. 원수와 같은 동포들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진 것을 보면 매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도가 스스로 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마리아로 보낸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위임을 받아다는 것입니다. 사도라 할지라도 교회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위임을 받은 두 사도는 사마리아에 도착해서 무엇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15-17절을 보시면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먼저 15절을 보시면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의 신앙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을 통해 세례를 받았지만 16절을 보시면 “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두 사도는 개종자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두 사도의 임무는 빌립이 전한 복음에 대한 확증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1:8절에 말씀하여 주신 예언에 대한 성취가 이루어졌다는 확신이기도 합니다. 누가가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교회의 일치성을 위한 것으로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복음의 증거는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를 세워감으로 사마리아인들과 예루살렘에서 신앙 생활하는 신자들이 같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난제도 있습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했을 때 세례만 받았는가?입니다. 좀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도로부터 성령이 임함으로써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즉각적으로 성령이 임했지만 빌립은 세례만 준 것을 생각하면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사마리아인과 예루살렘 교회 간에 서로 하나라는 지체 의식을 부여하기 위한 섭리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를 한 후 17절을 보시면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안수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안수’란 일반적으로 손을 사용하여 타인의 머리 위에 얹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 능력이나 자질들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적 자격을 인정하는 외적 표시로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자신의 죄를 동물에게 죄를 전가할 때 안수를 합니다. 그러면 신약의 안수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도 안수는 구약 시대의 경우와 거의 비슷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약의 제사가 아닌 예배를 하게 됨으로 더 이상 동물에게 안수하여 죄를 전가하지 않습니다. 안수에 대한 오늘날의 입장은 :안수가 신약시대에 와서 비록 보편화되기는 했으나 안수가 기복 신앙을 위해 행해지거나 감정적, 심리적 방법 등으로 남용되지 안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안수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에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리고 삼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을 받는’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사마리아인들도 참된 교회의 완전한 지체로 알게 하도록 하는 것이고, 서로 다툼으로 개별적인 기독교회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이 구절은 성령을 받기 위한 안수의 필연성을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안수를 통해 성령을 체험하기도 하였지만(행9:17),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는 경우도 있고(행10:44), 여렷이 모인 곳에 임하기도 합니다.(행2:1-4)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안수를 통해서만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위험합니다. 또한 사도에게만 성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에 의해 성령이 강림한 것은 사마리아 지역의 교회가 사도들에 의해 인정을 받아야 됨을 암시하는 것이고. 사도권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스도인임이 최종적으로 확인되고 선포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목사나 신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노회로부터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이 임함으로 더욱 경건한 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는 중에 18-19절을 보시면 시몬이 다시 등장을 합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몬은 두 사도로부터 사마리아인들이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을 받는 것을 목격 한 것입니다. 시몬은 이미 빌립을 통해 세례를 받았지만 안수가 특별한 효력을 주는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례를 받았지만 자신의 악한 마음을 고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으면 빌립과 사도들처럼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술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던 시몬은 그것으로 당신들의 권능을 나에게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시몬은 이런 요구를 한 것입니까? 신학자 중에서 일부분은 방언 등 외형적인 것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 강림으로 인해 외적 현상이 나타났음이 분명하며 이 현상을 시몬이 목격함으로 돈으로 사고자 한 것입니다. 두 사도들 앞에서 시몬은 성령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외적 현상만 봄으로 더 많은 권세를 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시몬의 말을 들었던 베드로는 20-24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하고 책망한 것입니다.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것을 돈으로 사고자 하는 시몬에 대한 준엄한 경고입니다. 오늘날에도 일명 부흥회(? 바른 용어는 사경회)를 하면서 헌금을 통해 기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마치 시몬과 같은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을 보내면서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마10:8절을 보시면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시몬처럼 돈으로 성령을 구입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이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십니다. 베드로는 재물이 지닌 위험성을 지적하여 종교 타락의 원인이 되는 돈, 금 등을 멀리하도록 우리에게도 경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돈이 개입된 흥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를 보면 무엇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베드로는 시몬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도록 “네가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네 말과 행실을 보니 네가 받은 세례는 바람직하지 못하고 거짓되도다”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서 시몬이 회개할 수 있도록 악한 마음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시몬의 영적 상태를 바르게 알고 책망하면서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혹 그런 사람에게도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지적으로만 알았을 뿐,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깊은 경험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오직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빛 진 우리는 마귀로부터 노예가 된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베드로로부터 심한 책망을 들은 시몬은 24절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자신이 망하지 않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돌이킬 수 있는 기회도 시몬은 자신에게 임할지도 모르는 재앙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처신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강한 권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에게 기도를 요청한 것은 여전히 불신앙입니다. 기도의 부탁을 회개와 혼돈하면 안 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도를 부탁했으나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면 영지주의 자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회개하도록 요청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기도 부탁을 많아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시몬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25절을 보시면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두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사마리아로 파송을 받은 후 그곳에 말씀을 전하면서 양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처럼 사마리아에서 편안한 생활만 한 것이 아니라 빌립처럼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사도들의 이런 사역은 사마리아인들과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신자들이 있지만 모두 하나의 교회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라고 할 때는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보이는 교회는 거짓 교회와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강설과 성례 그리고 권징입니다.(권징 안에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단이 일어났을 때,참된 교회를 인식하는 표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진리를 옹호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들이 분열되고 갈라지는 상황에서 교회가 반드시 따라야 할 진리의 표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많은 핍박 가운데에서 교회가 생명력을 유지하고 확장되는 요인은 교회가 진리의 표준 위에 바로 서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지도록 함으로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알도록 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위의 세 가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주인입니다. 사람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목사 또는 장로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 도움이 없이 사역을 친히 하시거나 천사들을 시켜서도 하실 수 있으나 사람을 사용하여 일하시는 편을 선택하십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성령께서 하실 수 있지만 빌립과 두 사도를 통해 하시는 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마술사인 시몬을 기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즉 권능을 돈으로 매수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시몬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가 무엇이라는 것을 잘 전해야 하는 임무가 지팡이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값없이 거저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우리는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안수를 할 때 그 어떤 요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은 값없는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이런 선물을 그들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받았습니다. 이런 선물을 복음으로 전하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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