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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42
강설날짜 2018-12-16

성경이 가르치는 성찬의 의미(행2:42)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2:42절을 보시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말씀을 잘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교회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두세 사람이 모여서 예배의식만 하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까? 교회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표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설과 성례(세례와 성찬) 그리고 기도”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예배를 생각하면 성도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한 교제와 떡을 떼며 거룩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며 기도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교제와 떡”을 뗌 즉 성찬에 대한 강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찬은 교회의 머리요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체인 신자들은 교제를 하면서 모이는 예배와 흩어지는 예배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정해진 예배시간에만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은 예배의 강화이며 세상으로 나아가서 삶으로 예배를 하는 신자들이 지상명령을 감당하도록 하는 사회적인 확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배를 보면 “쇼”를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 예배가 사람 중심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새 신자가 오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면서 박수치고, 왕 같이 대우를 하는 것은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예배는 사람이 중심이 됨으로 자기만족을 위한 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요기를 위해 이상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거룩한 교회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참된 예배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지팡이교회 홈페이지에서 개혁주의 신학자라는 곳을 보시면 “장로교회의 예배 이해와 장로교 예배 모범의 전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승구 교수님의 글입니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reformch.org/board_NppB72/5728)

 

예배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도록 지팡이교회는 힘을 다해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찬에 대한 강설을 한다고 했습니다. 성찬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맛보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믿음 가운데 즐거움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감사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위해서 복음으로 증거 하면서 삶을 통해 증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신자들의 마땅한 도리요 기쁨입니다. 옛적부터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심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재림 때에 충만할 나라요 보배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지만 신자들의 구원은 돈이나, 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신앙 생활하는 하나님 나라의 성도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되어가는 교회입니다.

 

예배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성찬식을 하면 슬퍼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지배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을 상상합니다. 마치 장례식이나 추도예배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성찬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만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죽음에만 국한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교회를 통치하시고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성찬은 무엇보다도 예배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배는 구원함을 받은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입니다. 하나님과 언약 백성 즉 교회와 교제를 하는 방법입니다. 성찬에는 교제, 기념, 감사 기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님들은 보이는 방식의 은혜의 방도라고 했습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죽으심의 역사적 사실과 예수님의 사역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몸과 영혼의 부활을 소망하면서 마지막 날에 구원함을 받음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의 생활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성찬은 하나님 나라의 몸과 영혼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표현하면 거룩한 식사입니다. 성찬의 본질이 식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것으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을 우리가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성찬을 고전11:20절에서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무엇입니까? ‘주의 만찬’입니다.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주의 만찬 즉 주님께서 주신 식사를 먹기 위해 모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고린도교회는 시기와 다툼이 많았던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하나의 공동체의 시민권자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성찬에 참여하는 마음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고민해 보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주의 만찬’이라고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애찬과 성찬이 구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식사 중에 자연스럽게 한 것이 성찬입니다. 오늘날 애찬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성도의 교제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성찬은 특별한 절기에만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고전11장을 생각하면 매주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성찬은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14:22절을 보시면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리고 마26:26절에서도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라는 말씀에서 두 구절이 첫 시작을 하는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라는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제자들이 음식을 마련한 것이 성찬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송별의 “주의 만찬”의 시간을 통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하는 송별의 식사 자리였음을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예수님이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시고 떼어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심으로 제자들을 섬기고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워가는 제자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성도로 세워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당신님께서 직접 만찬의 식탁을 준비하시고 봉사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눅22:27절에서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교회는 하나요 서로가 섬기는 나라임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성찬예식을 통해서 당신님의 살과 피로 우리를 먹이시는 것을 생각하면 어떠한 신앙의 생활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찬에 어떠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시편23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편을 묵상하면 왕이 베푸신 식사에 대하여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을 목자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요10: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당신님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가정교회와 셀을 하시는 분들이 목장을(구역과 비슷) 돌보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는 것은 바른 용어가 아닌 것입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을 목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로 당신님의 백성을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지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성찬을 통해 먹고 마시게 하십니다. 최후의 극치인 주의 심판에서는 원수들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어서 당신님의 백성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런 선한 목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직 유일하신 신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에 대한 말씀을 듣고 다음 주에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하고자 합니다. 성찬을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찬에 어떻게 참여해야 합니까? 장례식자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야 합니다. 물론 진정한 감사의 마음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할 수도 있지만 그 눈물도 기쁨의 눈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서 통치하시고 있으면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영적인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주의 만찬입니다. 성찬은 하늘에서 내리는 새 양식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가 43장을 찬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 내 맘을 편케 하니 즐겁고 기쁜 날, 이 날에 하늘에서 새 양식 내리네 성회로 모이라고 종소리 울리네, 이 주일 지킴으로 새 은혜 입어서 영원히 쉬는 곳에 다 올라갑시다”를 찬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6문을 보시면 성찬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주를 주고 받음으로 그의 죽음을 나타내 보이는 성례인데, 이를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육신적이거나 육욕적인 태도로 참여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 그의 모든 혜택을 받아 신령한 양식을 먹고 은혜 가운데서 자라가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5문으로 성찬에 대한 정의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단번의 제사와 모든 복과 은사에 성도가 참여한다는 것을 성찬을 통해서 어떻게 깨닫고 확신 합니까?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모든 성도에게 예수님을 기념하여 이 뗀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시고 또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분배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예수님의 몸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드려지고 찢기셨으며 예수님의 피도 나를 위해 쏟으셨습니다. 둘째 떡과 잔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분명한 표로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찬을 거행하는 목사의 손에서 그 떡과 잔을 받아 내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확실히,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로써 나의 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친히 먹이시고 마시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제정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칼빈은 성찬을 주신 목적을 친절하게도 정리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에서 복음의 모든 약속들을 주신다는 증표요 보증이며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양분임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을 우리는 구원의 모든 은총을 확신하고 예수님 안에서 즐거워하면서 영적인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받아 먹으라”고 하심으로 성도라면 누구든지 먹어야 생명을 유지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6:35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심으로 영적 배부름과 다시는 목마름이 없는 생명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영적 양분을 충분히 공급받는 것임을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찬은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기독교인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성찬은 무엇보다도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신경을 사용하여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를 믿사오며”는 주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찬을 통해 먹고 마심으로 주님의 교제 안에서 푸른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말로만 선포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말로만 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끔 하기 위해 성찬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은혜의 방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고자 하는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아났다고 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나한테도 저런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성도만이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찬을 제정하신 후 막14:25절에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더 확증하여 주심으로 고전11:26절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지상의 교회가 할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계속하여 확증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신실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짐하고 순종하는 고백을 함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성찬에 참여 하고 자 강설을 듣는 지팡이교회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자리에 영적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단지 기념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은혜의 방도인 말씀의 강설을 통하여 들음으로 믿음이 장성을 했습니다. 그러면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연합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깨달음의 이해와 실제적 것은 강설이지만, 믿음을 더욱 견고하고 강화하는 은혜는 성찬을 통해서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잠서 여기서 고전11:27절절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우리가 성찬을 할 때 떡을 떼면서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찢기신 주님의 살입니다. 주님의 몸입니다.”라고 하고,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것이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피입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결국은 그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다음 구절인 28-29절을 보시면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입니다. 어쩌면 무서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실제적으로 ‘주의 만찬’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찬은 주님과 나와의 생명적인 관계를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교제를 한다는 것은 당신님께서 주시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식사를 그냥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되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어야 살듯이 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사역은 십자가의 죽음도 있지만, 부활도 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죽은 자를 기념하는 엄숙한 분위기 즉 추도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을 믿으면서 극치에 이르는 날을 기다리는 거룩한 신부와 같은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성찬에 참여하려고 하는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떡과 포도주에 임재 하셔서 당신님의 부활하신 영화로운 살과 피로써 죄로 물든 우리의 육신을 양육하여 주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찬에 참여하는 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과 포도주 즉 식사의 자리에 주님께서 초대를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더 이상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영광의 부활이 있습니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나도 주님께서 승리하도록 하시고 몸과 영혼을 부활하도록 하실 것을 소망하면서 식사에 임해야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참된 양식을 주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떡을 먹고, 주님을 피를 마시므로 배부름과 기쁨의 복을 누리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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