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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강설날짜 2017-02-19

제15항 원죄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원죄가 온 인류에게 완전히 퍼졌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원죄는 인간본성의 전적인 타락과 심지어 모태에 있는 유아에게까지 미치는 부모를 통하여 물려받은 악입니다 근원으로서 원죄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죄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악하고 혐오스러워서 인류를 정죄하시기에 충분합니다. 원죄는 심지어 세례로도 도말되거나 근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물이 솟구쳐 나오는 것처럼 이 무서운 근원으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가되어 정죄에 이르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사해졌습니다. 이 사실은 신자들이 죄 가운데서 평온하게 지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죽을 몸에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동안 이 타락에 대한 깨달음이 종종 그들을 탄식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죄가 단지 모방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잘못을 배격합니다.

 

지팡이교회는 두 주간 동안 제14항의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음’을 통해서 우리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제15항은 ‘원죄’로 우리 조상의 범죄로 어떤 결과로 인하여 죄 가운데 태어난 죄인이리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참된 신앙고백을 함으로 새로운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우리들의 모습처럼 자신들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양심을 속이면서 원죄를 부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인 나는 어떠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원죄를 용서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합니까? 다시 회복된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광을 올려 드리고자 열심을 내어도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나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성도의 삶의 생활에서 실제적인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전투적인 교회로 신앙을 하고 싶어도 언제나 늘 나를 괴롭히고 있는 죄입니다. 양심에서는 기도하라고 하는데도 기도하기 싫어하는 나는 참으로 주님의 사랑이 아니면 구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죄는 늘 특히 성도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청교도 신학의 최고봉이라는 존 오웬도 ‘죄 죽이기’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병에 들면 의사를 찾는 것처럼, 양심에서 죄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신을 볼 때, 자신을 더 속이지 마시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시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9:12절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마치 의사처럼 나의 병든 양심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처럼 물질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저자인 ‘귀도 드 브레’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은 “신자들이 죄 가운데서 평온하게 지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죽을 몸에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동안 이 타락에 대한 깨달음이 종종 그들을 탄식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는 것을 성경으로부터 배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탄식을 한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어도 기도하지 아니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나 원죄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죄라는 말은 최초의 죄라는 의미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으로 어느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최초의 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담의 범죄를 원죄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죄는 모든 다른 죄의 기원의 시작이고 원천이라고 합니다. 아담의 죄로 끝이 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원죄는 계속 유전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시편51: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2과에서는 온 인류가 아담의 첫 범죄에서 타락하였는가? 답은 분명하게 “아담과 체결한 언약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출생할 후손까지 포함한 것이어서 그에게서 통상적인 방법으로 출생하는 모든 인류는 그 안에서 범죄 하여 그의 첫 범죄와 함께 타락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 단순히 악행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죄입니다. 죄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15항의 첫 시작을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기록을 합니까?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원죄가 온 인류에게 완전히 퍼졌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원죄는 인간본성의 전적인 타락과 심지어 모태에 있는 유아에게까지 미치는 부모를 통하여 물려받은 악입니다 근원으로서 원죄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죄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악하고 혐오스러워서 인류를 정죄하시기에 충분합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있는 ‘물려받은 악’이라고 할 수 있고, ‘유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 다 같은 의미입니다. 아기로 태어나는 사람은 조상인 아담으로부터 영적으로 ‘물려받은 악’ 또는 ‘유전적’ 원죄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854년 비오 9세 교황이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면제되었다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지 아니하는 중대한 죄입니다.

 

전염병은 그 시대에만 미치는 병이지만, 원죄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있는 죄입니다. 사람은 죄라고 할 때, 외적인 죄를 범하는 경우를 죄라고 합니다. 성경은 외적인 죄만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도 죄라고 합니다. 마음의 태도는 더욱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당신님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면서 대항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죄는 성경에서 명확하게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롬5:12-21절의 말씀에는 아담과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대표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담은 모든 사람의 대표자로 언약을 맺은 것을 “언약의 머리”라고 합니다. 특히 롬5:1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고 19절을 보시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죄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죄이지만, 죄에 대한 것과 스스로 죄를 범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의 문제는 각자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왜 이런 형벌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까? 창2:16-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생명에 대한 첫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에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이지만, 불순종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비참한 현실에서 죄의 대가를 치르면서 사망을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제15항에서는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악하고 혐오스러워서 인류를 정죄하시기에 충분합니다.” 참된 성도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심으로 롬4:6절에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의로 여기심’ 하나님께서 성도를 통하여 롬4:11절에서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무엇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공의로우시다고 고백하지만,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어떻게 “갓난아이까지 죽이시는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들은 펠라기우스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사람이 태어날 때 죄가 없이 깨끗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자식이 악한 부모로부터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아 죄짓는 것을 모방하기 때문에 죄인이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합리적인 설명 같기도 하지만 성경을 합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15항 마지막에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죄가 단지 모방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잘못을 배격합니다”고 함으로 원죄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정죄 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로, “하나님과 원수”(롬8:7)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심판하셔도 나는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주입니다. 당장 심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셔도 놀라운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에게도 해와 비를 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는 일반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에서 나를 구원해주신다고 하시니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제15에서 이것에 대해서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가되어 정죄에 이르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사해졌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성도는 비참한 현실에서 “ 죄 가운데서 평온하게 지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죽을 몸에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동안 이 타락에 대한 깨달음이 종종 그들을 탄식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라고 귀도 드 브레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죽음으로 순간에도 증거하면서 순교의 순간에도 탄식하는 것이 죄인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16세기 개혁교회에 반대하여 ‘트렌트 회의’(1545-1563)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 중생의 세례로 원죄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이것에 대해서도 “원죄는 심지어 세례로도 도말되거나 근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세례가 죄 사함을 받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세례가 어떤 죄를 씻는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카톨릭의 주장에 대한 것으로, 원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세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죄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의 긴장된 신앙의 삶을 생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함을 받고 새롭게 되었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 가운데서 나의 죄를 곧 원죄와 자범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죄 사함을 받고 정죄에서 풀려났지만, 아직 죄의 몸이고, 사망의 몸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14문답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의 적은 시작을 할 뿐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죄인으로 “왜냐하면 죄가 물이 솟구쳐 나오는 것처럼 이 무서운 근원으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표인 세례와 인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사해졌음을 믿습니다. “이 사실은 신자들이 죄 가운데서 평온하게 지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죽을 몸에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동안 이 타락에 대한 깨달음이 종종 그들을 탄식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복음의 증인자요 사도이면서도 롬8:21-23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참된 성도는 영원히 밝은 미래를 갈망하면 나는 ‘죄인이로소리이다’라고 탄식하면서 선한 싸움의 전투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니 마음대로 죄 짓고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 가겠구나.”하면 교만입니다. 내 자신이 참된 구원을 얻은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면 그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제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주님 뜻에 자원해서 즐거이 순종하고자 하는 새로운 마음과 본성이 우리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어떠합니까? 과연 탄식의 기도를 합니까? 외식적인 기도를 하십니까? 성도는 늘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경고의 말씀 앞에 늘 회개하여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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